217화. 진노한 용왕
성황신은 기분이 착잡해졌는지, 개탄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해 입춘이 지난 후, 광동호 인근에는 비와 번개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바람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던 어느 날, 돌연 홍수가 일어나 호수와 이어진 강이 전부 역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광동호의 물은 30리가 넘도록 불어나, 인근 여러 마을은 수해를 입었고 물살에 끌려간 이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성황신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그 홍수는, 호수에 있던 요물들이 사람을 마음껏 잡아먹고 정기를 보충하여 인간의 형상으로 변하려는 목적으로 서로 손을 잡고 벌인 일이었습니다. 더욱 간악한 것은 갑작스레 일어난 홍수인만큼 재빨리 홍수의 기세가 수그러들어, 수 분 만에 잠잠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 요괴들은 다시 한번 광동호 깊은 곳에 숨어들었지요. 저를 비롯한 신령들은 모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성황신은 이 이야기를 입에 담자, 여전히 수염을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저희는 체면이 깎이는 것을 무릅쓰고 강신(江神)께 도움을 청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번개가 치고 비가 오던 어느 날, 교룡 한 마리가 강물을 따라서 광동호로 들어갔습니다. 그 교룡은 당시 기슭에 있던 신령에게 전갈을 남겼는데, 저 자신을 묵 씨라고 소개하고 자신이 대정국 바깥에서 왔으며 이미 용왕과의 이야기 끝에 광동호를 수행의 근거지로 삼기로 했다더군요. 그가 광동호로 들어가자, 호수 아래에서 요괴들끼리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해 며칠간 광동호에서는 곳곳에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 바람에 어느 낚싯배도 배를 띄울 엄두를 내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게 호수의 표면이 잠잠해진 후로는, 화 대왕 같은 요물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옛날 일이 되었지요.”
계연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저 교룡에게는 호수의 신이 되고자 하는 계획이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수행을 위해 광동호를 차지했을 뿐이었고, 이번에는 운이 없게도 큰 화를 당한 것이다.
계연과 여순부 성황신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호수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오늘은 하늘이 다른 날보다 더 빨리 어두워졌다.
밤이 되고 대략 반 시진(*1시간) 뒤, 떨어지는 빗물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계연과 성황신에게는 컴컴한 호수의 표면에 떨어지는 빗물이 더욱 많아진 것이 보였다.
번쩍!
쿠르릉……!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리며 번개가 대지를 환히 밝혔다. 이렇게 오후에 멈췄던 천둥 번개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굉음은 일찍 잠든 백성들을 깨우기 충분할 정도였다.
크르릉!
천둥소리 외에도 언뜻 용의 포효가 겹겹이 쌓인 구름 위에서 들려왔다. 용의 위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며 끊임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응굉이 왔구나!’
‘통천강 용왕께서 오셨군!’
계연과 성황신은 각각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연기처럼 보이던 용의 형체가 비의 장막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곧바로 광동호로 뛰어들었고, 뒤이어 ‘촤아!’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의 표면에 큰 물살이 일었다.
늙은 용은 보기 드물게도 계연과 먼저 인사를 나누지 않고, 곧바로 광동호로 들어간 것이다.
용이 호수로 들어간 후 표면이 넘실거리던 때에 넝쿨검도 푸른빛에 둘러싸인 채 계연의 곁으로 돌아왔다.
“용왕께서 크게 진노하셨군요!”
성황신은 계연을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네.”
계연은 대답하고는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넝쿨검을 통해 소식을 전할 때 계연이 그리 많은 신의(神意)를 불어넣지 않았지만, 그래도 늙은 용이 교룡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조금 전에 계연이 본 교룡의 태도와 방금 성황신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교룡과 응굉의 관계는 꽤 깊은 듯했다.
한 시간쯤 지난 뒤, 호수 모처에서 물이 요동치더니 대섶(*對襟: 중국식 윗옷의 두 섶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에서 단추로 채우게 되어 있는 것)으로 된 장포를 입은 응굉이 호수의 파문을 밟으며 천천히 기슭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그는 계연과 성황신을 향해 공수했다.
“계 선생, 성황 대인.”
“응 선생님.”
“용왕을 뵙습니다!”
늙은 용은 계연에게 인사할 때는 비교적 예법에 구애받지 않은 모습이었고, 성황신에게 인사할 때는 그보다 훨씬 정중했다.
쿠르릉……!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번개 치는 소리는 조금도 위세가 줄지 않았다. 이때 천둥 번개로 인한 빛이 셋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계연과 성황신에게 다가온 늙은 용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는데,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다.
“교룡의 상황이 어떤가요? 응 선생님께서는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방도가 있으세요?”
늙은 용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 성황신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계연이 나서서 물었다.
막역한 벗이 이렇게 물으니, 응굉은 생각을 거두고 계연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힘줄을 뽑힌 데다 온몸의 정기가 크게 상했더이다. 여의주마저 이미 훼손된 상태이니, 나라고 해도 이 상황을 되돌릴 방법은 없소. 계 선생이 제때 나서 교룡에게 들러붙은 악념(惡魇)을 없애지 않았다면, 저자는 혼백조차 보존하지 못했을 거요.”
“악한 념이요?”
성황신이 눈썹을 찡그리며 이렇게 물었고 계연도 마찬가지로 궁금해했다.
“그렇소. 이 괴이한 술법은 그야말로 사악하고 음험한 데다, 알아채기도 매우 어렵소. 악념이 들러붙어 발작을 시작하면, 마치 짐승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말을 할 능력이 사라지며 몸 안의 원기도 빼앗기게 되오. 만약 묵영이 악념에 의해 죽었다면, 그의 혼은 새로운 악념이 되어 이 술법을 펼친 자에게 돌아갔을 것이오!”
“허…….”
계연조차 참지 못하고 이렇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악독한 술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어떨 때는 차라리 이런 게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쾅!
우르르……!
천둥과 번개가 다시 한번 대지를 밝히고, 늙은 용은 무시무시하고도 엄숙한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얇게 뜨고서 계연의 침침히 가라앉은 두 눈을 응시했다. 이렇게 응굉이 계연과 눈을 맞춘 것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계 선생의 말이 옳소! 대정국의 기운은 끊겨서는 안 될뿐더러,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오. 이 동토 운주(雲洲) 전역에서 대정국의 기운이 가장 강성해져서, 인세의 거대한 기운으로 겁 없이 날뛰는 삿된 것들을 내리눌러야 하오!”
그는 계연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뒤, 고개를 돌려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묵영에게 손을 쓴 자는 만만히 볼 자가 아니오. 원래는 묵영이 대정국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려 했겠지만, 묵영의 성격이 얼마나 독한지는 그도 잘 몰랐을 테지. 그는 여태 쌓아온 수행을 모두 망칠 각오를 하고, 여의주를 파괴한 다음 도망쳐 온 것이라오. 이 수백 년간 두 황주(荒洲)의 경계에서는 수많은 소란이 일어났소. 그렇다고 해도 서로 수만 리나 떨어진 운주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늙은 용은 여기까지 말하고서 성황신을 한번 쳐다본 다음, 계연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나는 먼저 대정국을 떠나 한번 돌아보고 오겠소. 부디 계 선생께서 묵영을 잘 돌봐주시오. 지금은 나조차 어찌 된 일인지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 후에 돌아와서 계 선생께 자세히 이야기해 주도록 하겠소.”
응굉은 이렇게 말한 뒤, 모호한 용의 형체가 되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어흥!
그의 포효에서는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용왕께서는 이번 일의 원흉을 잡으러 가신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지 않은 요괴들이 죽게 될 것 같군요…….”
계연은 응굉이 떠난 하늘을 바라보며, 돌연 왜 그가 어떤 종류의 ‘신위(神位)’에도 앉지 않았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진룡이 떠나자 밤까지 이어지던 폭우가 드디어 멈췄다.
* * *
늙은 용이 떠난 뒤, 계연은 그에게서 들은 ‘두 황주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황주(南荒洲)와 흑몽영주(黑夢靈洲)을 일컫는 것이었다.
남황주는 십 수만 리에 이르는 신비한 남황대산(南荒大山)을 포함한 지역으로, 계연은 처음 사슴 요괴에게서 요괴들이 단약을 훔친 사건에 대해 듣다가 이곳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곳은 그 이전부터 매우 혼란스러웠던 지역으로, 요괴와 마귀들이 무성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흑몽영주라는 이름에 영주(靈洲)라는 두 글자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곳은 남황보다 더 혼란스러운 지역이었다. 그 면적은 천하 어디에 두어도 광활하기로 손꼽혔으며, 표면적으로는 산세가 좋고 풍경이 아름다운 초목이 우거진 지역이었으나 그 내부는 아주 엉망이었다.
기운이 혼란한 와중 몸을 숨길 곳도 셀 수 없이 많아, 정통의 선도(仙道)를 닦는 이들은 극소수이고, 요괴의 세가 그보다 더욱 강대하며 마념(魔焰)이 하늘을 뒤덮는 곳이었다. 인간의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숨겨진 동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도시가 세워진 곳에서도 인간들은 요괴와 마귀에 의해 가축처럼 사육되며 부려진다고 했다.
이 두 지역은 정통 수행자들에게서 각각 ‘남황’과 ‘흑황’으로 불리며, 통칭 ‘양황’으로 불린다. 하지만 남황은 사실 황폐한 지역 중 하나에 가까웠고, 흑황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역이었다.
흑몽영주에 관한 일을 생각하다 보니, 계연은 지난 예전 일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에 춘혜부 성황신이 윤재성을 통해 계연에게 매목으로 만든 목패를 보냈을 때, 목패에는 이물전신(以物傳神)의 술법으로 심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 홍 부인은 한 요괴와 서로 연인 사이였는데, 그 요괴는 일전에 흑황에 있던 한 사육 동굴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 안은 그야말로 ‘축인국(畜人國)’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온 후로 그는 그 동굴을 계속 잊지 못하다가, 수년 후 다른 요괴들과 손을 잡고 동토의 운주 어느 곳에 그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자는 자기 자신을 요왕(妖王)이라 칭하였는데, 결국은 각 지방의 신령과 선하도(仙霞島)의 수사들에게 발견되어 쫓기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들 중 조무래기에 속하던 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홍 부인의 일행은 요행으로 대정국까지 도망쳐 올 수 있었다.
매목에 담겨 있던 내용은 홍 부인이 심문 끝에 뱉은 내용으로, 성황신이 목패를 계연에게 보낸 데에는 이 사실을 계연에게 알려 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조금쯤은 계연이 나서서 그 ‘축인국’이라는 곳의 백성들을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계연도 그 전갈을 받았을 당시에는 돕고자 하는 뜻만 있을 뿐 충분한 힘이 없었고, 정보도 충분치 않았다. 물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그 일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굳이 그때 알게 된 내막이 아니었더라도, 계연은 늙은 용과 일찍부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황의 땅은 혼란스럽긴 했지만, 동토 운주에 자리한 대정국과는 그야말로 요원한 거리에 서로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응굉의 말을 들으니, 교룡에게 벌어진 일은 그쪽 지방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거나 최소한 연관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