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44화 (244/892)

244화. 안개비 속 10년

속세에 연관되기를 꺼리는 옥회산 수사들을 비롯한 선문의 수선자들은 노인과 같은 경험이 매우 적었다. 늙은 용과 같은 요괴들도 이런 경험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이 노 선생처럼 속세를 거닐기 좋아하고, 인간 세상의 때를 묻혀 가며 수행하는 고인들만이 이토록 풍부한 경험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늙은 거지는 영안현을 떠난 뒤 계연이 고의로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놨다며 원망했으나, 사실 계연은 그런 이야기가 정말로 듣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화제를 바꾼 것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계연 자신에게 있어 술법을 추론하는 과정이기도 했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계연은 붓이 종이에 닿을 듯 말 듯 글을 쓰는 동시에, 이전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 주로 혜동 대사와 운주에 관한 일에 대해서였다.

혜동 대사에게 여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연량국과 천보국 모두 아무런 일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단순히 그의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수륙법회 동안 요물들이 모두 사라진 일을 듣고 놀라 삿된 것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조금 나쁜 쪽으로 바라보자면, 늙은 용이 진노하여 국경선 부근의 요괴들을 눈에 띄는 대로 죽인 후 또 수륙법회의 일이 생겼으니 그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또 다른 각도로 보자면 오히려 고산진호(*敲山震虎: 고의로 경고하여 놀라게 하다)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운주의 형세가 변하려는 듯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정확한 내막을 알 수도 없었으니, 삿된 것들이 오히려 이 상황을 후자로 여기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게다가 비록 누군가에게 터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계연은 속으로 운주에 조만간 큰일이 나리라 예측했다. 하늘에서 내린 액운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분명 수백 년 혹은 천 년 후까지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다른 수많은 혼란이 뒤따르게 될 테니, 일단 자신이 사는 땅이라도 먼저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비록 그것이 오직 운주일 뿐이더라도 말이다. 계연은 현재 대정국에서 점차 새로운 국면을 열려 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지역들은 아직 계연의 손이 닿지 못했다.

게다가 때가 무르익은 바둑돌도 몇 개 없었다. 비록 바둑판 자체는 컸지만, 돌을 내려놓을 만한 마땅한 위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는 일반적인 바둑과 달라서, 비어 있는 곳이라 해서 바로 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기와 인연은 물론, 선문, 요괴, 마귀, 신령들의 형세와 그로 인한 영향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계연이 손에 든 바둑돌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야만 했고, 놓은 바둑돌의 실력이나 수량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다른 쪽보다 우위를 점해야 했다.

‘아직 내 심력(心力)이 부족한 거야. 일단 그때그때 생각해보며 해야겠다!’

계연이 이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자 때마침 계연의 손에 들린 황모필(*黃毛筆: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 멈췄다. 계연이 깊은 생각에 잠긴 동안 선지에는 어느새 빽빽한 글자들이 쓰이고 있었는데, 족히 수 천자는 될 듯했다.

자신이 뭘 쓴 건지 알 수 없었던 계연은 잠시 넋이 나간 듯 종이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붓걸이에 붓을 걸고 종이를 들어 올린 다음, 입으로 바람을 불어 먹을 말렸다. 그리고 다시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쓴 글씨에는 진의(眞意)가 담겨있었기 때문에, 글자가 작아 보이지 않는다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써 내려 간 것이지만, 천천히 읽다 보니 계연은 곧 그 안의 신묘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소매 안의 건곤술을 다루는 데 있어 줄곧 막혀 있던 부분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여 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신이 들린 듯한 솜씨(神來之筆)라더니, 하하하……. 정말로 신들린 것 같네!”

빽빽한 글자를 읽다 보니 이전의 답답했던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그는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글은 원래부터 존재하지만, 실력 있는 이가 그것을 우연히 얻을 뿐(*文章本天成, 妙手偶得之: 송(宋)나라 육유(陸游)가 쓴 <문장(文章)>에 나오는 말)’이라는 말은 지금 계연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가 추론하는 동안 천하의 형세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늙은 용이 이전에 혜동 대사를 잡아챈 소매 속 술법에 대해 감탄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 진의를 품은 글은 계연이 건곤술을 완벽히 다루는 데에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이는 삼매진화를 본래의 무형에서 형태 있는 불길로 만들어냈을 때보다 더 그를 기쁘게 했다. 이는 그가 교묘한 수단을 쓴 것도 아니고 바깥의 힘에 기대 얻어 온 것도 아닌, 스스로가 추론해 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돌파구는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로써 그는 마침내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이때 거안소각 부근의 민가에서 바쁘게 일하던 백성들은 모두 계연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가 이렇게 즐겁게 웃는 거지?”

마을 여인 하나가 의혹에 차 혼잣말을 하자, 곁에서 소쿠리를 엮던 노인이 잠시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가 이렇게 추측했다.

“아무래도 계 선생님 목소리인 것 같구나.”

“아, 정말 별일이네요. 계 선생님이 크게 말하는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는데…….”

“어쩌면 이제야 부인을 맞아들이셨는지도 모르지!”

“네? 설마요…….”

노인은 여태 시집가지 않고 있는 딸자식을 향해 물었다.

“설마 너 아직도 계 선생님께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품은 건 아니지?”

여인은 어색한 듯 미소 짓다가 작은 소리로 항변했다.

“저는 계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걸요…….”

“알면 됐다. 분수 넘치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해!”

“…….”

* * *

윤재성은 그간 완주에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 차릴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계주의 해시(解試)에 참가했던 윤청을 다시 완주로 불러와 자신을 돕게 했다.

윤청의 모친은 여전히 윤청을 아이처럼 여겼지만, 윤재성이 보기에 이미 약관의 예를 치른 큰아들은 이제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인재(人才)였다. 얼마 전 완주 관리들을 ‘청소’할 때 윤청의 도움을 받으며 받은 인상이 윤재성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윤재성과 그의 가족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다른 일에 신경 쓸 수 없이 바빴으므로, 자연스레 계연을 찾아오지 않았다. 늙은 용은 계연보다도 더 잠을 자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옥회산 수사들에게 있어 산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유수처럼 빨랐다. 그 외 다른 이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았고, 혹은 오더라도 감히 계연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동안 어떤 불길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으므로, 계연은 정해(丁亥)년 봄이 될 때까지 집에서 조용히 수련하며 술법을 연마했다. 이렇게 소리 없이 또 한 해가 흐른 것이었다.

그러다 4월 초, 거안소각의 고요함이 마침내 깨졌다.

* * *

이날 이른 아침, 계연은 꿈에서 깨어나 후원에서 옥간(玉簡)을 읽고 있었다. 그때 돌연 천우방 골목에서부터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계 선생님이 계신 게 확실합니까?”

세월의 모진 흔적이 보이는 얼굴의 남자가 다시 한번 노인에게 물었고, 노인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께서 비록 밖에 잘 안 나오시기는 하지만, 안에 계시는 건 분명하다네. 만약 어딘가 가셨다면 필히 거안소각의 문을 잠그고 가셨을 거야. 자, 보게, 문에 자물쇠가 없지 않은가?”

이에 남자는 기쁜 듯 미소 지었고, 이어 노인에게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건 사례…….”

“아이고, 젊은이, 나는 계 선생님과 한 고향 사람이고 이왕 자네도 선생을 안다고 하니, 내가 자네를 데려다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저 집에 가는 길에 데려다주었을 뿐인데, 자네에게 돈을 받으면 내가 나중에 무슨 얼굴로 선생을 보나?”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휙 몸을 돌려 가버렸다.

이에 남자는 노인이 떠난 방향을 잠시 쳐다보다가,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안소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뜰에 심어진 가지와 잎이 무성한 커다란 대추나무가 보였다. 그도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오지 않았더니 길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남자가 거안소각의 대문 앞에 섰을 때, 후원에 앉은 계연은 이미 손에 든 옥간을 내려놓고 장안법을 이용해 보통의 죽간으로 보이도록 만든 뒤였다.

“문은 열려 있으니 그냥 들어오세요, 육 대협.”

온화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려오자, 막 문을 두드리려 했던 남자의 손이 공중에 우뚝 멈춰 섰다.

그는 흥분되는 마음을 다스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대문을 밀어젖혔다.

거안소각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대추나무 아래 돌탁자에 앉은 계연이었다. 청색 장포에 옥비녀를 한 그는 죽간을 들고서 희끄무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계 선생의 모습은 그의 기억 속의 계 선생님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고, 또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서둘러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읍했다.

“계 선생님, 저 승풍이 왔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계연을 바라본 그의 두 눈에 감격이 차올랐다.

“계 선생님,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전의 그는 풍류를 즐기던 군자 같은 모습의 소협이었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모진 풍파를 겪은 흔적이 얼굴에 가득 드러나 보였다.

육승풍은 몸에 어떤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으로 땅에 내려놓았던 것을 다시 집었다. 그것은 ‘도소(*屠蘇: 술에 담가 연초(年初)에 마시는 약의 이름)’라는 글씨가 쓰인 종이가 붙은 술 단지였다.

계연은 법안을 열어 육승풍의 몸에 흐르는 기운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 의기양양함은 오간 데 없고, 고작 30을 넘은 나이에 이미 무기력하고 생기를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계연은 자신도 모르게 감개무량하여 입을 열었다.

“안개비 속 강호를 10년간 떠돌다가, 반평생의 의기(意氣)를 도소에 씻어 내리는구나. 육 소협, 저희가 벌써 1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군요. 어서 와서 앉으세요.”

육승풍은 그 말을 듣고 세월의 흐름에 잠시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대문을 잘 닫고서, 무언가를 손에 들고 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선생님께서 술을 좋아한다고 들어서…… 이 술을 가져왔습니다. 무슨 옥액경장(*玉液瓊漿: 전설 속 신선이 마신다는 미주(美酒))은 아니지만, 생전에 제 부친께서 직접 담근 것입니다.”

육승풍은 이렇게 말하며 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이에 계연도 말을 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저 읽던 죽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 선생님은 혹 저희 아홉 명을 아직 기억하십니까?”

육승풍이 돌연 이렇게 묻자, 계연은 여전히 죽간을 손에 쥔 채 차례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연비(燕飛), 육승풍(陸乘風), 낙응상(洛凝霜), 두형(杜衡), 왕극(王克), 조룡(趙龍), 난영극(蘭寧克), 포동(包棟), 동필성(董必成). 여러분들의 목소리도 저는 계속 기억하고 있어요.”

육승풍은 다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그제야 계 선생님이 맹인(盲人)임을 떠올렸다.

“계 선생님은 정말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저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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