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저승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빌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저 자신을 비웃는 듯한 기운이 조금 어려 있었다.
“저희 아홉 명이 낙하산장에서 처음 만났던 때는 아직 초봄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젊은 소협(少俠)들은 어른들을 따라 낙하산장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의 그들은 모두 의기가 흘러넘쳤으므로, 알게 된 지 2, 3일 만에 깊은 정을 나누며 더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그러다 우연히 계주에 사람을 공격하는 흉악한 호랑이가 있는데, 관부에서도 속수무책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자신의 무공에 자신 있던 아홉 명의 젊은이들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영안현으로 향했다.
육승풍은 비록 다른 여덟 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중요한 옛일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회상하기 시작하며 점차 더 많은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느 지점에 이르자, 여덟 명 중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술술 입 밖으로 나왔다.
계연은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가 자기가 아홉 명의 이름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육승풍이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육승풍도 다른 여덟 사람을 정말로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계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육승풍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고, 버려진 산신당에서 계연을 만났을 때까지만 이야기했다. 그다음 이야기는 계연도 알기 때문이었다.
산신당에서 계연을 만났던 일까지 이야기한 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 선생님, 만약 그때 저희가 영안현에 오지 않고, 호랑이를 잡으려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을까요?”
계연은 손가락으로 죽간으로 변한 옥간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육 대협으로 말하자면, 얼마간의 경험만 부족하게 되었을 뿐 대략적인 인생의 궤도는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들은 두형과 낙응상, 조룡과 연비 이 네 사람이니까요.”
계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때 육승풍을 포함한 다섯 사람은 몹시 놀라기만 했을 뿐,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다친 네 사람은 상처를 크게 입었을수록, 후에 받은 영향도 더욱 컸다.
결국에 팔을 잘라내게 된 두형은 말할 것도 없고, 낙응상도 원래는 티 없는 피부를 가진 여협(女俠)이었으나 그 일로 목 근처에서부터 가슴을 지나 복부에 이르기까지 깊은 흉터가 남았다. 거의 외모가 망가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이었다. 이런 봉건사회에서는 강호라고 해도 남성이 주로 이끌어가는 사회였기 때문에, 여협들은 결국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 게다가 대체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욱 아름다움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몸에 그리 큰 흉터가 남은 낙응상이 그 일로 받은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을 터였다.
곤봉을 휘두르던 조룡은 호랑이 꼬리에 맞아 심각한 내상을 입었었다. 하지만 그간 조룡에 관한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연비도 날카로운 발톱에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요물을 상대하며 생사기로에 놓인 경험을 얻게 된 그는 상처가 나은 후 무공의 수련에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네 사람만이 그 일로 인해 진정으로 일생 전반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육승풍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는 아마 계연 본인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 곤란한 시기에 아무도 그를 업고 내려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연의 말을 듣고 육승풍은 다시 한번 자조하듯 웃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계연은 그의 세파에 찌들어 낙심한 듯한 모습을 보고, 분명 그를 뒤늦게 후회하게 만든 어떤 일들을 겪었으리라 짐작했다. 사람은 보통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를 바꾸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육 대협, 고민이 있으면 제게 털어놓으세요. 강호의 협객이라고 하여 지나간 세월을 슬퍼하고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계연은 이렇게 말한 후 주방으로 가서 도자기로 된 사발을 두 개 들고 나왔다. 계연은 그것을 탁자 위에 놓은 후, 술 단지 윗부분을 가볍게 쳐 봉니(*封泥: 진흙을 말려 입구를 밀봉한 것)를 뜯어냈다.
그러고는 술 향기를 맡아본 다음 두 사발에 술을 따랐다.
술에서는 곡주(穀酒)나 과주(果酒)의 향기가 아닌 은은한 약재 냄새가 났다.
육승풍은 빼지 않고 사발을 들어 계연에게 공손히 부딪힌 후, 한입에 술을 모두 비웠다. 술맛을 천천히 음미하던 그의 두 눈이 점점 붉어졌다.
“계 선생님, 사실 제가 두형을 만났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육승풍은 고개를 들어 회백색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선생께서는 정말 신선이십니까?”
오래전 계연은 비록 그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그 이상 신묘한 술법을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다. 고인은 분명 고인이었으나, 절이나 사당에도 그 정도로 대단한 법사들은 간혹 있었다.
점차 나이가 들고 식견이 늘면서, 육승풍은 그와 비슷한 고인들에 대해 얼마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실제보다 더 과장된 소문이 났기 때문에, 과거 계 선생님에 관해 가졌던 경외심은 점점 더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얼마 전 두형을 다시 만났을 때, 그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듣고서 그제야 계 선생님이 얼마나 신비로운 인물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육 대협께서 이번에 오신 것이 저를 만나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신선을 만나기 위해서인가요?”
계연은 이렇게 물은 뒤 다시 도소주를 한 입 마셨다. 술은 그리 독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쓴맛이 길게 남았다.
“계 선생님, 제가 들은 바로 선인(仙人)들은 신묘한 법력을 지녔고 오랜 세월 동안 속세를 소요(逍遙)하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구름을 타고 날며 저승에도 갈 수 있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보아하니 신선을 만나러 온 모양이군.’
계연은 속으로 이렇게 탄식한 후, 육승풍의 기운을 보며 손가락으로 잠시 그의 운을 헤아려보았다. 곧이어 그는 육승풍에게 있었던 일들을 대략적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거안소각은 예전에 육 대협께서 저 대신 금액을 내어 사셨었지요. 그러니 제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저도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육승풍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 계연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회백색의 두 눈으로 그를 담담히 쳐다보며 말했다.
“영당께서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또 육 대협께서 마음에 깊은 비애를 품고 있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저는 무슨 진선(眞仙)도 아닌 데다가 설령 진선이라 하더라도, 영존(*令尊: 상대의 아버지)과 영당(*令堂: 상대의 어머니)을 다시 살아 돌아오게 만들 수는 없어요.”
이에 육승풍은 오늘 처음으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계 선생님께서 오해하셨군요. 저는 그리 말도 안 되는 과욕을 부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선법(仙法)을 부리거나, 제 부모님께서 살아 돌아오시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다만, 이 세상에 정말로 저승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제 부모님께서 정말 그곳에 계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부모님께서 세상을 떠나면 꿈을 빌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던데, 저는 한 번도 그분들을 꿈에서 뵌 적이없습니다…….”
그간 육승풍은 명성이 널리 퍼져 의기양양했고, 오만하기도 했고,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또한,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부친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운각(雲閣)의 하늘도 마치 단번에 무너진 것 같았다. 육씨 가문의 사람들은 연이어 닥쳐오는 사건과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육승풍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눈부신 세월은 마치 공중누각과 같아, 진정한 실력으로 얻지 못한 강호의 명성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부친의 비호(庇護)가 사라지자 얼마간은 부친의 오랜 벗들이 그들을 도와주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각종 치욕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닥쳐왔다.
지난날의 복수를 하러 온 자들이나, 강호에서의 운각의 지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육씨 집안에 전해지는 권법(*拳法: 주먹을 주로 사용하는 맨손 무공)과 장법(*掌法: 손바닥을 주로 사용하는 맨손 무공), 그리고 조공(*爪功: 날카롭게 단련한 손톱으로 상해를 입히는 맨손 무공)에 도전장을 내고 강호에서의 명성을 올려보려는 협객들도 많았다.
무림과 강호는 매우 냉엄한 세계여서, 무림 세력들은 관아에서의 보호를 잘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부친의 무공과 능력 없이 무사히 운각과 가족을 지키려면 그는 더 많은 울분과 체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육승풍도 그러했으니, 현재 운각을 떠받치고 있는 그의 형인 육승운(陸乘雲)은 그보다 더했을 것이다.
다른 점은 육승운의 성격이 그보다 더욱 강인하여 모든 압력을 그대로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승풍은 그러지 못하여, 현실 앞에 쉽게 무너졌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육승풍은 열심히 무공을 수련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는 이미 종일 술이나 퍼마시는 한심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예전, 명성이 드높았던 운각 소군자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었던 모친마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육승풍은 더욱더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자신의 무공이 충분히 뛰어나지 못한 것과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것 모두 그를 분노하게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을 증오했다. 이에 그의 형을 부러워하기도, 심지어는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육승운은 그토록 강인하여,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못난 동생을 포용할 정도였다. 그는 이를 깨물고 피를 삼키며 운각을 지탱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육승풍은 그런 압박을 견디지 못했고, 남에게 떳떳하게 내보일 체면도 없었다. 무공도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으므로, 형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는 항상 높은 목표를 바라며 고고하기만 하던 그에게 있어 깊은 절망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모친의 죽음까지 겹쳐지자, 그 절망마저 산산이 부서졌고 남은 것은 오직 완전한 붕괴였다.
이런 일들을 육승풍은 모두 계 선생님께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선생의 희끄무레한 두 눈이 자신의 속을 꿰뚫어 모든 것을 알아본 것처럼 느껴졌다.
“계 선생님, 사람이 죽으면 정말로 귀신이 됩니까? 제 부모님께서 제가 폐인이 된 것을 보고 경멸하시면 어쩌지요? 만약 선생께서 정말 신선이시라면, 부모님을 뵐 수 있도록 저를 저승에 데리고 가 주실 수 있습니까?”
이런 황당한 요구를 육승풍은 그간 얼마나 많은 신당과 절을 방문하여 법사들에게 물어왔는지 다 세지도 못할 정도였다. 비록 현실 가능성이 작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다시 한번 물었다.
사발 안의 술을 마신 후 나무 그늘로 걸어간 계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육 대협께서는 그간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아주 많았지요. 하지만 이는 모두 과거일 뿐이에요. 태양은 항상 존재하고 있어요. 어두울 때도 잠시 구름에 의해 가려진 것일 뿐이고, 구름은 언젠가 반드시 흩어지는 때가 와요. 그때는 햇빛이 다시 한번 대지를 비출 거예요.”
계연은 뒤돌아서 육승풍을 바라보았다.
“영존과 영당의 음수(*陰壽: 저승에서의 수명)가 아직 다하지 않았을 테니, 제가 대협을 데리고 가서 그분들을 만나게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