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설서인(說書人)
왕립은 회색 장삼을 입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길을 홀로 걷고 있었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길을 오가는 행인들은 거의 없었다.
“어후…… 후우……!”
왕립은 이른 아침의 바람에 의해 찬 기운이 불어 닥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몸이 더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추위가 느껴졌다. 특히 봄비가 그친 후의 새벽 거리는 더 했다.
그는 손에 술병을 쥐고서 비틀거리다가, 술병이 텅 빈 것을 보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술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멀지 않은 땅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쨍그랑!
맑은소리와 함께 술병이 완전히 깨졌고, 왕립은 계속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계연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 근처에 떨어진 도자기 파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비틀대며 걷는 왕립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생각했던 상황과 왕립의 지금 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완아(婉兒)……. 완아야……!”
왕립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옷깃을 꼭 쥐고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도성을 떠나 동쪽의 유주(幽州) 성숙부(成肅府) 부성에 머물고 있었다.
왕립은 매번 새로운 지방에 갈 때마다 민가에 머물렀다. 주인집에서 세 낸 곁방을 장기 임대하는 것이 객잔에 머무는 곳보다 훨씬 쌌기 때문이다.
“아……. 으흠, 왕 선생님. 이제 오십니까?”
집 안에 있던 주인은 기지개를 피며 밖으로 나오다가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왕립을 향해 인사했다.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왕립은 살짝 기울어진 몸으로 주인집 사내를 향해 공수한 다음, 자신이 세 든 곁채로 향했다. 문을 여는 동시에 왕립은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으나, 문고리를 잡아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어이쿠, 왕 선생님. 술을 얼마나 드신 겁니까!”
주인 남자는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한 다음 침상에 눕혀 주었다.
“감, 감사하오…….”
왕립은 침상에 쓰러진 채 어물어물 공수한 후, 이불을 끌어당겨 덮은 다음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쯧쯧쯧……!”
주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뒤쪽의 건물 안에서 주인 여자가 옷을 갖춰 입고 나오다가, 남편이 곁채에서 나오는 걸 보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또 술을 많이 드신 건가요?”
“많이 드셨소,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드시더군.”
“왕 선생님도 처음 왔을 때는 안 그랬는데, 이제 매일 저 모양이시네요.”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있겠소? 때맞춰 방값만 내면 되지.”
두 사람은 이렇게 속닥이며 몸을 씻으러 갔다.
* * *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가 되자 왕립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태양혈 부근을 문지르며 침상에서 일어난 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왕립은 약간 창백한 안색으로 이불을 걷고서 침상에서 내려왔다. 방문을 열자 석양빛이 그의 눈을 찔러왔고, 한쪽에 있던 주방에서는 음식 만드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왕 선생님, 일어나셨군요?”
옷을 널고 있던 주인 여자는 왕립이 나온 걸 보고 웃으며 물었다.
“류(劉)씨 아주머니, 지금 시각이 어찌 됩니까?”
“저희도 해시계를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유시(*酉時: 오후 5시에서 7시)가 다 되었을 겁니다. 마침 일어나셨으니 잘됐네요. 오늘 생선 요리를…….”
“유시라고요? 서둘러야겠군!”
왕립은 시간을 듣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몇 차례 착착 때리고는 방으로 돌아가 물건을 싸기 시작했다. 종이부채, 성목(*醒木: 설화자(說話者)가 책상을 두들겨 청중의 주의를 끄는 데 쓰는 나무토막), 서책…… 그는 이것들을 모두 보따리 안에 넣은 후, 짐을 들고 다시 황급히 문을 나섰다.
“어어……. 왕 선생님, 식사는 하지 않으세요?”
“예예, 어서 가볼 데가 있어서요!”
왕립은 황급히 집을 나와 밖으로 나왔다. 오늘 그는 커다란 주루(酒樓)에서 이야기하기로 예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한 부잣집 자제가 춘위(*春闈: 회시(會試)를 뜻함)에 붙어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기 때문인데, 오늘이 바로 그 집안에서 주루 전체를 빌려 연회를 여는 날이었다.
만약 지금이 유시라면 연회는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다. 연회 시작 후에도 설서인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계약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돈을 못 받는 건 당연하고, 예약금도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받은 예약금을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다.
거리는 어느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고, 왕립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의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가 번화한 대로에 있는 중태루(衆泰樓)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턱까지 오른 상태였다.
“헉…… 허억…… 허억……!”
이때 중태루 밖에서는 누군가 서서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나잇대가 다양하고 잘 차려입은 이들이 줄지어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주루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공수하는 것을 보니, 밖에 서 있는 것이 그 집안의 가주인 듯했다.
“고(高) 노야, 정말 축하드립니다!”
“고 공자께서 어린 나이에 참 대단한 실력을 지녔군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노야께서는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영랑(*令郞: 상대방의 아들)께서 과거에 합격하셨으니, 이제는 백성이 아니라 관료 집안이 되겠네요!”
“아하하하……!”
“고 노야, 고 공자, 앞으로도 저희 같은 궁핍한 백성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왕(王) 노야께서 궁핍한 백성이면 저희 고씨 집안은 저잣거리의 잡상인이겠습니다!
“왕 백부님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하하하……!”
고씨 집안의 사람들은 활짝 웃으며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공수하며 인사를 나누는데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혼례식보다도 더 화기애애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왕립은 멀지 않은 담장에 기대서서 안심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연회는 아직 시작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옷차림을 다시 정돈한 뒤, 등 뒤에 진 보따리로 얼굴과 목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중태루로 향했다.
채 가까이 가기도 전에 왕립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서 공수하며 인사했다.
“고 노야, 고 공자, 정말 축하드립니다! 제가 늦게 온 것은 아니지요?”
기운 넘치는 표정으로 비단옷을 입고 있는 노인이 바로 고 노야였고, 그 옆의 훤칠하고 키가 큰 젊은이가 바로 고 공자였다. 왕립을 본 두 사람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왕 선생님께서 딱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연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랫사람들에게 선생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라 일러두었으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고 노야!”
왕립은 다시 한번 공수한 뒤 서둘러 주루로 들어갔다. 그는 너무나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상태였으므로, 고 노야의 말에 속으로 무척 기뻤다.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식사하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왕립 같은 설서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외로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으므로, 설서인들은 이야기 시작 전에 모두 먼저 식사를 했다.
그가 주루에 들어서자마자 종업원이 그를 이끌고 2층의 별실로 데려갔다. 음식들은 이미 식탁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보아하니 이곳에서 식사하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악기를 다루는 여인들이 이미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왕립이 조금 늦게 도착한 듯했다.
“왕 선생님, 이곳에서 식사하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종업원은 다시 바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왕립은 약간 어색하게 안에 앉은 이들에게 인사한 후, 자신의 자리에 앉아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배고프고 갈증이 났던 그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던 주위의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웃음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중태루에 모여들던 손님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고 공자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고, 너무 오랫동안 웃느라 얼굴 근육이 저릿하던 고 노야도 막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고 노야, 영랑께서 춘위에 급제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으로 막 들어서려던 고 노야와 그의 하인은 고개를 돌렸다. 밖에는 푸른 장포를 입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는데, 머리에 묵옥 비녀를 하나 꽂은 것 빼고는 옥패 같은 장신구조차 없었다. 온화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공수하는 남자에게서는 소박한 가운데에서도 비범한 기운이 느껴졌다.
“예……. 선생께서는 누구십니까?”
이에 고 노야가 이렇게 물었다.
“아, 제 이름은 계연이라 하는데 원래는 중태루에 식사하러 왔다가, 오늘 고 공자의 급제를 축하하며 주루를 빌린 것을 보고 인사 올린 거예요.”
계연은 주루에 붙은 빨간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종이 위에는 고씨 집안에서 오늘 고 공자의 급제를 위해 주루를 빌렸다며, 손님들에게 올리는 사과와 함께 다음에 다시 와 달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고 노야도 공수하며 계연에게 인사했다.
“아, 그렇군요. 축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연은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주루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괜찮으시다면 저희 연회에 참석했다 가시지요.”
고 노야는 계씨 성을 가진 이 선생의 분위기가 남다른 것을 보고 이렇게 불러 세웠다. 어쨌든 고작 밥 한 끼일 뿐이었다.
계연은 몸을 돌려 잠시 생각하다가, 곧 미소를 얼굴에 드리우고 다시 한번 공수했다.
“비록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도 중태루의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은 들었었어요.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들어가시지요!”
고 노야는 계연과 함께 주루로 들어갔다.
이렇게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니 고 노야도 기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모르는 사이였으므로 계연에게 2층의 약간 외진 자리를 내주었다.
이에 대해 계연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공짜로 남의 밥을 얻어먹는 상황에, 그가 자리에 대해 투덜댈 자격은 없었다. 그가 앉은 탁자에 자리한 이들은 서로 모르는 이들이었고, 그들은 서로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이어서 향긋하고 김이 폴폴 오르는 음식이 상으로 올라왔고,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저희 고씨 집안이 문곡성(文曲星)의 보살핌으로 나라의 녹을 먹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의 연회를 위해 특별히 도성에서 이름난 설서 선생인 왕립 선생을 모셔 왔습니다! 잠시 후 왕 선생께서 여러분께 이야기를 들려드릴 것입니다.”
“오, 정말 기대되는군!”
“도성에 이름난 자라고?”
“우리가 못 들어본 이야기를 하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일세!”
“왕립? 그러고 보니 내 도성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소. 듣기로 성대모사도 할 줄 알고, 아주 대단하다던데!”
“정말인가?”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나!”
계연은 주루 안 손님들의 대화에서 잔뜩 기대에 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앞쪽에서는 하인 하나가 성목이 놓인 탁자를 들고 와 주루 중앙의 빈자리에 내려놓았다. 또 다른 하인은 병풍 두 개를 들고 온 다음 앞뒤로 중앙의 탁자를 감쌌다.
왕립은 손에 흰 종이부채를 들고, 한쪽에 마련된 별실에서 나와 병풍 뒤편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품에 비파와 금(琴)을 든 여인들이 병풍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 여러분, 오늘 고씨 집안의 경사를 맞아 제가 여러분 모두 절대로 들어보지 못했을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한 신인(神人)께서 제게 꿈을 통해 알려주신 아주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바로 <백록연>입니다!”
왕립의 말은 모든 손님의 흥미를 단번에 끌어 올렸다. 계연조차 흥미가 이는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도 왕립이 각색한 이야기를 무척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