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49화 (249/892)

249화. 흰옷을 입은 신녀(神女)

배불리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데다, 반나절이 넘도록 잠을 자고 온 왕립은 이때 정신이 아주 또렷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자신이 넘쳤다.

이 <백록연>은 오롯이 그 왕립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는 도성과 일부 부성의 사적인 자리에서 단 몇 번 이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른 설서인들이 손님 중에 섞여 ‘이야기를 훔치는’ 것도 철저히 방비해왔다.

그래서 그는 이 자리의 누구도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백록연>은 항상 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또한 실제로도 ‘신인이 꿈을 통해 알려준’ 이야기였으므로 왕립은 유난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파앗!”

그는 손안의 부채를 활짝 편 뒤, 성목을 들어 탁자를 세게 때렸다.

“탁!”

낭랑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인들이 곧 악기를 타기 시작했다. 금과 비파 소리와 섞인 왕립의 목소리에는 얼마간의 아련함이 섞여 있었다.

“순승(順承)연간(年間)에 대정국의 한 외진 현성(縣城)에는 주(周)씨 성을 가진 서생이 하나 있었지요…….”

왕립의 이야기 기술은 확실히 남달랐다. 현악기 소리와 함께 그의 성대모사 솜씨가 더해지자, 손님들은 자신들이 마치 이야기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왕립은 서생의 의기(意氣) 넘치는 말투를 그대로 표현했으며, 집안 어른의 목소리며 여인의 교태 섞인 웃음소리까지 완벽하게 꾸며냈다.

손님들은 처음에 이것이 과거 시험에 참여해 공명(功名)을 얻은 서생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가 고씨 집안 공자의 급제를 축하하는 자리였으므로, 이 연회와 그런 주제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차 진행되면서, 겹겹이 가려진 장막이 열리듯 신비한 색채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계연은 정신을 집중해 듣다가, 가끔 다른 이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주루 내부에 빽빽이 들어앉은 손님들은 매우 집중한 얼굴로 손에 땀을 쥐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 중 젓가락을 손에 들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연은 설서인들의 이야기를 꽤 많이 들어봤다고 자부했는데, 그중에는 확실히 자신의 주의력을 단번에 사로잡은 대단한 이들이 몇몇 있기는 했다. 하지만 왕립처럼 대단한 설서인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지금 왕립의 입담은 진왕부의 연회 자리에서보다 훨씬 더 재기 넘쳤다. 비록 계연이 이물전신의 술법으로 이 이야기를 알려주긴 했지만, 왕립이 가진 재능도 그사이 좀 더 발전한 것 같았다.

“우오오~!”

괴이한 데다 공허한 듯한 사슴 요괴의 울음소리가 병풍 뒤에서 들려오자, 손님들은 옷자락을 부여잡거나 주먹을 꼭 쥐며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떨치려 했다.

왕립이 내는 사슴 소리는 병풍 뒤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그가 사슴 요괴로 변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실감 났다.

끼익…… 쿵!

쿠당탕!

주루의 창문 몇 개가 바람에 의해 활짝 열렸다.

휘오오…… 휘이잉……!

차디찬 밤바람이 중태루 2층의 창문을 통해 불어 들어와 손님들을 추위에 떨게 했다.

이에 고씨 집안의 하인들이 나서서 급히 창문을 닫아걸었다. 그런데도 이야기로 인해 머리털이 쭈뼛 섰던 소름 돋는 느낌은 손님들 사이에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때 병풍 안 등불에 비친 그림자가 부채를 든 선생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아마 사람들은 놀라 단번에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왕립의 이야기 솜씨는 무척 뛰어났지만, 몇 군데 이야기가 변한 곳이 있었다. 그때 계연은 담담한 눈빛으로 흘끗 창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한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고, 원래 비어 있던 한쪽 자리에는 어느새 여인이 한 명 앉아있었다. 옅은 화장을 하고 흰옷을 입은 여인은 병풍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이하네. 신령한 빛은 없지만, 향불의 힘이 감돌다니, 저 사람은 신녀(神女)인가?’

계연은 전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탁!

그때 돌연 성목 소리가 나자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

“이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차 한 잔 마신 다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왕립의 말을 듣고 청중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자 고 노야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일단 식사도 좀 하시고 술도 좀 드십시오. 새로 올라온 요리를 맛도 못 보지 않았습니까! 자자, 어서 드세요!”

손님들은 조금 전까지 이야기에 너무나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이야기가 잠시 멈추자, 손님들은 그제야 다시 식사를 들며 조금 전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들의 감상을 나누었다.

이에 계연도 젓가락을 들어 새로 올라온 찹쌀 완자를 잡아 옆에 놓인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이야, 도성에서 이름난 설서 선생은 역시 다르군!”

“그러게나 말일세! 방금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온몸에 닭살이 돋았지 뭔가?”

“나도 그랬다네!”

“정말 대단했어.”

“저 왕 선생은 입담은 물론이고 성대모사 실력도 뛰어나더군. 나도 이전에 여러 소리를 내는 설서 선생을 한두 번 보았는데, 모두 저 선생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어.”

“음, 그리고 저 <백록연>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 정말 왕 선생이 만든 이야기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한 젊은 공자가 흥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저 선생께서 한 선인이 꿈에서 알려준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가 전에 왕 선생에 대해 들은 바로는, 저분이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각종 신기한 이야기를 수집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분도 기인(奇人)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계연은 그저 식사에만 몰두하며 가끔 다른 이들의 말에 동의를 표하다가, 때때로 병풍 쪽을 살폈다. 병풍 안쪽 등불에 비치는 그림자로 보니, 왕립은 이때 차를 마시며 갈증을 풀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비파를 타던 여인이 서서 부채를 들고 그에게 부쳐주었다.

왕립은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차를 마신 뒤에는 눈을 감고 잠시 쉬었다. 몇 분 뒤 다시 눈을 뜬 그는 곁에서 바람을 부쳐주던 여인에게 공수하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낭자도 어서 가서 좀 쉬시지요, 곧 다시 비파를 연주해야 하지 않습니까.”

“네!”

여인은 부채를 내려놓고 병풍을 돌아 나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다른 연주자가 다가오더니 뭐라고 속삭이다가, 병풍을 가리키고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계연은 손님들이 더는 식사를 들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곧 왕립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람과 함께 등장한 흰옷을 입은 여인도 왕립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계연이 앉은 식탁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여전히 식사를 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거칠고 소박한 식사만 하다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도저히 젓가락을 멈출 수가 없었다.

탁!

성목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왕립이 몸을 일으키며 종이부채를 좌르르 폈다. 뒤이어 힘 있는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손님들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집중해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전에는 흰 사슴 요괴가 백씨 성을 가진 묘령의 여인으로 둔갑해 주씨 집안의 공자와 만난 것까지 이야기했었지요…….”

왕립은 전에 끊긴 부분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어느새 일정 부분에 이르러, 공명을 얻고자 힘써 학문을 닦는 이야기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제는 점차 신비로운 색채와 함께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룬 부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귀신이며 요괴, 이매(魑魅)가 등장하기도 했고,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왕립의 손을 거친 이야기는 더욱더 다채롭고 긴장감이 넘쳤다.

계연도 속으로 왕립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는 요기(妖氣)에 의해 주 서생의 양기가 허약해져 밤길에 악귀를 만난 것이지만, 왕립의 손을 거친 이야기는 악귀를 만난 주 서생을 사슴 낭자가 구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계연조차 지난 생 흥미로운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이곳에 자리한 손님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백록 낭자가 성황신께 부탁하러 죽은 남편을 따라 저승에 들어갔다가, 그녀의 혼백이 감옥에 갇힌 대목에서는 많은 여인들이 눈물을 보였다.

“그때부터, 백록 낭자는 주 노야와 함께 저승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매년 주 노야의 기일이 되면, 저승의 감옥에서 채찍형을 받게 되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진정한 사랑은 보기 드물건만, 이들 인간과 요괴의 깊은 사랑은 저승에서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사랑을 위해 백록 낭자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생각하면, 탄식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왕립은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은 뒤, 무겁게 성목을 내리쳤다.

“우오오~!”

뒤이어 아련한 사슴 울음소리가 병풍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자 손님들은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닌 끓어오르는 벅찬 감정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팔과 허벅지를 문지르며 오소소 돋아난 닭살을 잠재우려 애썼다.

짝짝짝짝!

“훌륭하군!”

“대단한 입담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짝짝짝!

“맞소,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소!”

“왕 선생께서 대단한 재능을 지니셨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손님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손뼉을 치며, 왕립의 입담에 갈채를 보냈다.

총 4회로 나뉜 이야기는 거의 네 시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하인들이 자리에 남은 병풍 두 개를 거두어 가자, 비지땀을 흘리는 왕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 노야와 고 공자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 깊은 밤까지 수고해주신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이에 왕립도 그들에게 인사하며 각종 겸양의 말을 늘어놓았다.

계연도 이야기가 끝난 후 박수갈채를 보내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주의력은 창가 근처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 앉은 여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왕립을 주시하는 것을 보며, 계연은 소매 속에 있는 두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이잉……!

이전에 닫아걸었던 창문이 다시 한번 활짝 열리며, 더욱 거세고 삿된 기운을 담은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바람은 마치 소용돌이치듯 내부를 감돌며, 등불을 이리저리 위태롭게 흔들었다.

이에 중태루 안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고, 손님들은 기민하게 불길한 변화를 알아채고 불안에 떨었다. 고 노야는 하인들에게 서둘러 창문을 닫으라 명했지만, 어떻게 해도 창문을 닫아걸 수가 없었다.

곧 바람이 점점 더 커지면서 등갓 아래에 있는 촛불이 차례로 꺼졌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노야……!”

사람들은 몹시 놀라며 당황해했다. 대청 중앙에 서 있던 왕립은 얼떨떨하고 어지러운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람이 돌연 멈추며 닫히지 않던 창문에 가해지던 알 수 없는 힘도 사라졌다. 그러자 창문을 닫으려 애쓰던 하인들은 그 반동 때문에 뒤로 철퍼덕 넘어졌다.

이에 흰 옷을 입은 여인은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시 두 손을 움직였으나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이를 본 계연은 피식 웃으며 식탁에서 검지를 뗐다. 식탁에 놓인 잔 옆에는 황주(黃酒)를 이용해 적은 ‘정풍(*定風: 바람을 가라앉히다)’이라는 두 글자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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