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50화 (250/892)

250화. 백록연

흰옷을 입은 여인은 귀신들의 술법을 닦다가 신도(神道)를 걷게 된 것 같았다. 어풍술에 대한 이해나 통제력도 부족했고, 저 자신의 도행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니 계연 앞에서 바람을 부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여인은 잠시 긴장했다가 어떤 위험도 발견하지 못하자 곧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바람이 멎자 놀란 손님들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고, 주루의 점원들과 고씨 집안의 하인들은 서둘러 꺼진 등불을 다시 켰다. 다른 이들은 창문에 달린 멀쩡한 걸쇠를 확인하며, 도대체 왜 바람에 창문이 열렸는지 의혹에 찬 얼굴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으니, 이번 연회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충분히 즐겼다고 할 수 있었다.

손님들은 고 노야에게 인사한 후 차례로 자리를 빠져나갔지만, 아직 연회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주루 안에는 금과 비파 소리가 끊기지 않았고, 여전히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남은 이는 모두 술을 좋아하는 이들로, 방금까지 이야기에 몰두하느라 술을 마시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술판을 벌이려는 것이었다.

왕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어지러움을 느끼며 이마를 문질러댔다. 방금 찬 바람이 불어 닥쳤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그였다.

“왕 선생, 노야께서 사례금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이때 고씨 집안의 관사가 다가와, 탁자를 정리하는 왕립에게 오늘 일한 것에 대한 보수를 주겠다고 말했다.

“예, 지금 가겠습니다!”

왕립은 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자신의 보따리를 들고 관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과연 흰옷을 입은 여인도 왕립의 뒤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연은 앞에 놓인 술잔을 모두 비운 다음, 식탁 위에 적은 글자를 지우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계연은 바로 내려가지 않고, 고씨 집안의 사람들이 앉은 식탁으로 가서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고 공자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고 공자, 공자님 댁에서 절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날 테니, 고 노야께 대신 인사 전해주세요!”

고 노야는 나이가 있어 본래 늦게까지 깨어 있지 못하는 데다가, 오늘 연회에서 술을 많이 마셨으므로 이미 저택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 노야와 나이대가 비슷한 손님들은 거의 다 돌아간 상황이었다.

고 공자는 계연을 알지 못했지만, ‘고 노야께 인사 전해달라’는 말을 남긴 데다 계연의 풍모가 남달랐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인사했다.

“예. 살펴 들어가세요, 계 노야!”

몸을 막 돌리려던 계연은 ‘계 노야(*老爺: 옛날, 윗사람·관리·고용주 등에 대한 일반적인 경칭)’라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계 노야라니! 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고 공자는 비록 뛰어난 학식을 가졌겠지만, 서생다운 태도는 아직 갖추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고씨 집안과 가까운 집안이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들만 봐도 전부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고 공자는 당연히 계연을 자신의 아버지가 아는 어떤 부호라고 생각해, 습관적으로 계 노야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계연은 머리를 저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공자께서 이번에 회시에 급제하셨으니, 아마 완주로 부임하게 될 거예요. 길도 멀고 기후도 이곳과는 다르니, 준비를 잘 하셔야 합니다. 길 떠나기 전에는 조상들께 향을 꼭 올리시고, 이곳 고향의 흙도 조금 담아서 가져가세요.”

“완주요?”

고 공자는 잠깐 의아했다가 곧 그 연유를 깨닫게 되었다. 재작년 연말부터 작년 초까지 일어난 ‘핏빛 비단’ 사건은 조정을 비롯한 대정국 전체에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었다. 이 일로 유주에서도 많은 소문이 돌았으나, 거리가 있어 적지 않은 탐관오리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만 알 뿐 사안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완주에는 아직도 수많은 관리가 필요한 듯했다.

‘완주는 살기 좋은 지방이지. 내 포부를 펼칠 좋은 기회이기도 해!’

“계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고 공자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공수했다. 이번에 고 공자는 계연을 노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고 공자는 그가 아래로 내려간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의 부친이 아는 이 중에 저렇게 돈 냄새가 나지 않는 분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 선생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명사(名士)의 느낌이 났다.

‘돌아가면 부친께 한번 여쭤봐야겠다. 저분을 집에 초대하자고 해봐야지.’

이때 고씨 집안의 관사는 아래층에서 중태루의 저울을 빌려, 왕립 앞에서 은자의 무게를 재고 있었다. 은 두 덩이 중 하나는 5냥(兩), 다른 하나는 1냥이었다.

“두 은자의 무게가 서로 다르니, 왕 선생님께서 잘 받아두십시오. 5냥은 오늘 보수이고, 1냥은 노야께서 선생께 수고비로 전달하라고 따로 분부하신 겁니다.”

왕립은 정중한 모습으로 공수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은자를 손에 받은 뒤,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연달아 감사 인사를 표하고서 중태루를 떠나갔다.

왕립이 떠나자 흰옷을 입은 여인도 뒤이어 나갔다. 그녀가 고씨 집안 관사의 곁을 지나던 순간, 관사는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드는 듯하여 부르르 몸을 떨며 중얼댔다.

“어휴……. 밤이라 그런가 춥군!”

그러다가 계연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관사는 그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계연도 그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성큼성큼 중태루를 나섰다.

* * *

비록 아직 야경꾼이 돌아다닐 시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미 해시(*亥時: 밤 9시~11시)의 끝자락에 가까워지는 시각이었다. 성안 백성 대부분은 모두 곤히 잠든 시간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행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왕립은 중태루를 나와 다급히 성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휘이이…… 휘이잉!

밤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왕립은 옷깃을 꼭 모아 쥐며 더욱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교차로에 다다른 왕립은 집에 가는 길과 또 다른 방향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집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

“왕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때 맑고 고운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오자, 왕립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어느새 하늘하늘한 흰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왕립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를 따라오는 다른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여인은 왕립에게 가볍게 만복례(*萬福禮: 두 손을 가볍게 쥐고 가슴 앞에서 아래위로 흔들면서 가볍게 머리를 숙여 절함)를 한 뒤 웃으며 말했다.

“일찍이 왕 선생님의 <백록연>이 신비롭고 애절한 이야기라고 들은 적이 있었지요. 오늘 밤 1회는 놓쳤지만, 나머지 3회라도 듣게 되어 정말 행운이었어요.”

‘들은 적이 있다니?’

왕립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성숙부에서 한 번도 <백록연>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거지? 다른 지방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나?’

“아, 과찬이십니다. 이리 늦은 시각에 길도 어두우니, 낭자께서 혼자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예,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가 이 밤에 혼자 걷기에는 아무래도 겁이 나네요. 혹 왕 선생님께서 저를 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그…… 아무래도 남녀가 유별한데…….”

“설마 지금 저 혼자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세요?”

흰옷을 입은 여인은 이렇게 묻더니, 왕립이 재차 망설이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 선생님, 저를 따라오시면 단목완(段沐婉)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완아 말입니까? 그녀를 아세요? 자자, 그럼 어서 갑시다!”

왕립은 그 말을 듣더니 더는 망설이지 않고 여인을 따라 걸어갔다.

멀리 뒤쪽에서 그를 따라가고 있던 계연은 이 모습을 보며 의아한 듯 생각에 잠겼다.

‘단목완은 또 누구지? 저 여인이 가진 향불의 힘이 불안정한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군.’

계연은 지면을 접듯이 천천히 걸어 왕립과 여인을 따라갔다.

왕립은 일개 범부로서 어찌 된 상황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계연은 그들의 변화를 거의 즉시 눈치챌 수 있었다. 이때 여인과 왕립의 걸음 속도는 보통 사람이 뛰는 것보다도 빨랐다.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밤, 앞서가는 두 사람과 그들을 쫓는 한 사람은 점점 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이들은 마침내 성벽 부근에 이르렀다. 여인은 왕립을 잡고 하늘을 걷듯이 성벽을 올라가 성숙부 부성을 빠져나왔다.

왕립은 미혹술(迷惑術)에 당해 조금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이 여전히 성안의 거리를 따라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계연은 제비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성벽을 뛰어넘은 다음 땅으로 착지했다. 그런 뒤 두 사람을 뒤따라가며 도대체 저 여인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지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부성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여인은 정확한 목적지는 정해 놓지 않았던 듯 점차 속도를 늦췄다.

“왕 선생님. 제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선생께서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완아가 낭자께 물어보라 했습니까?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물어보십시오.”

왕립은 시시때때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여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 살폈다.

여인은 차가운 얼굴로 뒤돌아서서 왕립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백록연>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그리고 이야기에 나오는 백록 낭자는 정말로 저승에 갇혀 매년 형벌을 받고 있나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만나 본 적도 없고요. 완아는요? 완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왕립은 미혹술에 당해서 그런지 더욱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

“왕립! 내가 지금 네게 묻고 있지 않으냐! 너를 이리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감히 내 앞에서 모르는 척하지 마라!”

“예? 낭자께서 저를 오랫동안 찾으셨다고요?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완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인은 냉소를 지으며 왕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왕립은 비틀대며 땅에 주저앉았고,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이마를 문지르며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이게…… 여긴 어디입니까? 저, 제가 지금 꿈을 꾸는 것입니까?”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황무지였고 성곽이며 거리, 길가의 건물들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왕립, 너 같은 일개 범부가 <백록연> 같은 이야기를 어디에서 알게 되었는지 당장 말해라. 도대체 그 일을 어떻게…… 게다가 그렇게 자세하게 말이야!”

왕립은 이때 당황한 얼굴로 팔을 문지르고 있었다. 방금 그는 자신을 꼬집어 보았다가 너무 아파 꿈이 아닌 것을 알게 된 참이었다. 그는 속으로 아무래도 자신이 요괴를 만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낭, 낭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저는 미리 말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인(神人)께서 꿈을 통해 제게 알려주신 이야기라고요. 그 후에 제 각색을 거쳐 좀 더 매끄럽게 다듬은 게 바로 <백록연>입니다.”

“신인? 하하, 도대체 어느 선인이 꿈을 통해 요물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를 고작 네게 전해준다는 말이냐?”

왕립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이렇게 답했다.

“사, 사실은 신인께서 남기신 ‘백록연’이라는 세 글자에 제가 손을 대자, 꿈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이물전신(以物傳神)의 술법이라니!’

이를 듣자 여인은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동시에 화도 났다.

“그럼 백록 낭자가 감옥에 갇혀 채찍형을 받는 것이, 정말로 고작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냐? 그 망할 놈의 주염생이 감히 낭자를 끌고 저승으로 들어가다니! 저승의 채찍을 맞으면 혼백이 모두 날아가 산산이 흩어지는 고통일 텐데!”

여인의 두 눈에 차가운 푸른 빛이 번뜩이더니, 창백한 얼굴을 왕립 가까이 들이밀고서 한 손으로 그의 목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손톱이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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