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도대체 누구야!
문이 다시 닫히자, 홍수 낭자는 계연과 왕립에게 손수 차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두 분 나리, 방금 제가 오기 전까지는 어머니까지 총 세 분이 이 안에 계셨는데, 어찌 찻잔이 네 개인 것입니까? 소녀를 위해 남겨 주신 건가요?”
홍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과연 홍수 낭자군요.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계연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하자, 그의 희뿌연 눈이 홍수의 의혹에 찬 눈빛과 마주쳤다. 홍수는 계연의 눈을 본 후 잠시 놀라는 듯하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계연은 눈을 똑바로 뜨고서 홍수를 바라보았다.
“낭자, 오늘 단장이 아주 아름답군요!”
홍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대답했다.
“과찬이세요. 저 같은 기녀는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항상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서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홍수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홍수는 감사를 표하고는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차를 마셨다.
“소씨 집안 공자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왜 그들을 도와 사람을 바꿔치기했죠?”
잔을 든 홍수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은 다음 기쁘다는 듯 말했다.
“선생께서도 소 공자를 아시는군요! 그분은 이미 저를 찾지 않으신 지 오래되셨답니다. 아무리 도성이 이곳에서 멀다지만, 그래도…….”
“홍수 낭자, 제가 소 공자가 도성에 있다고 말했던가요?”
계연이 차가운 웃음을 짓자, 여인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제가 아는 소 공자는 그분뿐이시거든요. 그래서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하하……!”
계연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세간에 화피(*畵皮: 사람 가죽으로 만든 가면)라는 매우 드물고 진귀한 도술이 있어, 그 원리를 조금만 알아도 감쪽같이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지요. 한 번쯤 수련할 가치가 있을 만큼 신비롭기 그지없다던데, 오늘 직접 보니 과연 허언이 아니었네요.”
홍수는 있는 힘껏 찻잔을 쥐고서, 방금 말을 꺼낸 장예가 있는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계연을 보며 물었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홍수 낭자’는 마침내 이전의 가식을 벗어 던졌다.
계연은 여인의 반응을 보고서, 이자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손에 든 책을 놓고서 질문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언젠가 늙은 용에게 이끌려 그의 천 세(千歲)를 축하하는 수연(*壽宴: 생일 잔치)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연회가 끝나고 혼자 나룻배를 저으며 돌아가던 길에 커다란 대갓집의 배를 마주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이 마침 소씨 집안 부자(父子)였었고요.”
홍수를 포함하여 실내에 있던 이들은 모두 계연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왕립은 마치 신비로운 설화를 듣는 듯한 모습이었고, 장예는 ‘상급(上級) 수선자’들의 사정은 잘 알지 못했지만 천 세 기념 연회라는 말만 듣고도 이미 비범하다고 느꼈다. 인간, 요괴, 신령을 불문하고 누군가 천 살까지 살 수 있다면 그 도행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홍수 낭자는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실은 그의 말을 듣고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별실 안의 풍경은 얼핏 보면 화기애애했지만, 사실은 결코 평온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홍수를 놀라게 한 것은 계연이 용왕에게 이끌려 그의 수연에 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소씨 집안의 사정을 안다는 데에 있었다.
용왕의 생신 연회 이야기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 지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소씨 부자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저는 소씨 집안의 공자가 선미(船尾)에서 그의 부친과 말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원인은 청루의 한 여인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의 홍수는 분명 낭자가 아닌 진짜 홍수였겠지요.”
말이 이미 여기까지 나온 마당에서 홍수는 이제 전과 같은 태도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녀는 표정과 자세를 한껏 늘어트린 후 나른하게 대답했다.
“선생께서 그때의 홍수가 제가 아닌 것을 어찌 아십니까? 대수선에 와 보신 것도 아닐 텐데요. 설마, 오신 적이 있었나요? 그때는 어떤 아이가 선생의 시중을 들었었나요?”
홍수는 이렇게 말한 뒤 계연을 희롱하듯 웃었다.
계연은 웃으며 그녀의 물음에 따로 반박하지 않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때와 같은 사람인가요?”
계연이 이렇게 나오자 홍수는 잠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는 그의 물음에 가볍게 ‘네’라고 답하려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평온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음, 과연 아니군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짜 홍수는 이미 소 공자와 함께하고 있겠네요.”
그 당시 소 공자는 호쾌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신이 장원(壯元)에 오르고 말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운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운이 좋지 않았던 다른 모든 서생처럼, 그해에 하필 호연정기가 왕성하고 문기(文氣)가 넘치던 윤재성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소씨 집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소 공자가 홍수를 정실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홍수의 자리에 대체품을 채워 놓은 것만 봐도, 진짜 홍수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다는 소리였다.
“선장, 사실 제가 그 두 정인(情人)이 맺어지도록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것도 어찌 보면 공덕을 쌓은 셈이 아닙니까?”
홍수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농을 치듯 물었다. 그녀의 태도는 마치 계연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실은 눈앞의 이 장님 서생이 아주 위험한 자라고 결론 내린 뒤였다.
“그들을 도와줬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 대수선에 남아 있는 건가요? 당신 정도의 도행을 쌓은 요물은 대정국에서는 아주 드물 텐데요.”
“저는 그냥 이곳이 좋은 것뿐이에요. 숙수의 강신(江神)조차 저를 내버려 두는데, 선생께서 도대체 누구시길래 제게 이러시나요? 게다가 만약 선생이 저를 사로잡을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친근한 태도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겠지요.”
두 사람의 말에는 상대에 대한 탐색의 뜻이 담겨 있었다.
계연은 법안을 열어 아주 옅은 요기가 홍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뒤이어 희미한 하얀 여우의 형태로 변화했다.
홍수가 모든 가식을 내려놓자 그녀에게서 약간의 요기와 사람을 매혹하는 기운이 흘러나와, 옆에 있던 왕립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게끔 했다. 반면 장예는 정신을 집중하며 경계를 바짝 세운 상태였다. 이 요물은 자신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예는 계 선생님과 여우 요괴의 대화를 가만히 듣는 중이었다.
계연은 이 여우의 실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 요괴는 혼자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단독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넝쿨검을 쓸 필요도 없이 삼매진화 한 번이면 계연은 이 요괴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홍수에게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홍수의 말을 듣고 계연은 곧바로 다시 반문했다.
“숙수강의 신이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니까요?”
홍수는 왼손 검지로 머리카락을 비비 꼬면서, 식탁 위에 나른한 자세로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찻잔에 차를 따른 후, 곁눈질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으시면 강신을 불러서 물어보시든…….”
그녀가 이렇게 말하던 순간, 계연은 손가락에 찻물을 묻힌 다음, 다시 손가락을 구부려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톡!
찻물 한 방울이 창문을 뚫고 나가 수면에 떨어졌다. 그러자 수면에 특이한 문양의 파문이 일었다.
“숙수강의 신께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촤르르……!
대수선 밖의 수면에 생긴 옅은 파문이 점차 커지더니, 수면 아래에 어느새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욱! 촤르르……!
찻물 한 방울이 떨어진 곳에서 투명한 물기둥이 솟아올라 별실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것은 점차 사람의 형체를 갖추더니 순식간에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홍수가 하려던 나머지 말은 목구멍에 막혀 더는 나오지 않았다.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놀란 듯한 얼굴로 별실 안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설마…… 저 사람이 정말로 숙수강의 신이라고? 그러니까…… 방금 한 게 설마 구신술이었던 건가?’
장예는 맞은편에 앉은 여우 요괴의 목에서 땀방울이 송송 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숙수강의 강신은 별실 안의 상황을 살피며, 그중 앉아 있던 어떤 이를 발견한 후 속으로 몹시 놀랐다. 그리고 황망한 가운데 공수한 후, 정중한 태도로 지면과 허리가 수평이 될 때까지 깊이 숙였다.
“숙수강의 신 두광통(杜廣通),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숙수강은 이름을 떨칠 만큼 큰 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편에 속했고 유주에 있어 통천강과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래서 과연 계연의 예상대로, 이 물의 신도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계연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였음에도, 적절한 대답은 해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
“강의 신께서는 저를 아시나요?”
숙수강의 신은 두 손을 모으며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용왕과 막역한 사이이시지요. 소신(小神)이 실은 예전에 용왕의 수연에서 선생을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계연은 숙수강의 신을 바라보다가 다시 홍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순간, 계연은 상대의 기운이 어지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요괴는 침착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계연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숙수강의 강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오늘 하루 내내 온화한 표정이었던 계연은 돌연 냉정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두광통, 당신 간덩이가 부었군요! 감히 대정국 밖의 요물을 두둔하여, 숙수강에 몸을 숨기는 것을 허락해 주다니! 저자는 어떤 목적을 지니고 이곳에 온 것이며, 저 요괴를 숨겨준 당신은 또 어떤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겁니까? 설마하니 그 늙은 용이 당신한테 이렇게 하라고 명하던가요?”
통천강에서 고작 천 리(*약 40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응굉을 이렇게 대놓고 ‘늙은 용’이라고 칭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계연밖에 없을 것이었다.
숙수강의 강신 두광통은 계연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 황망해하다가, 바로 다음 순간 억울함이 치솟았다. 허리를 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그는 다시 황공해하며 연이어 계연을 향해 읍했다.
“계 선생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소신은 절대로 외부에서 온 요물을 숨겨준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용왕께서도 그런 명령을 내리신 적은 결코 없습니다. 이곳 숙수에는 안온하게 수행을 닦는 물요괴들만이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당장 그들을 모두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두광통이 무척 억울해하면서도 계연을 두려워하는 것을 왕립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계연의 한마디면 자신이 죽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고, 그보다 더 두려워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