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255화 (255/892)

255화. 선검에 홀린 여우

계연은 탁자에 놓인 서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소매에서 책을 꺼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저 책을 손에 드느냐 탁자에 두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계연은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홍수 낭자, 숙수강의 신께서는 정말로 당신을 모르는 듯한데요. 그는 감히 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 말을 듣고 두광통은 그제야 이 배 안에 요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분노에 찬 얼굴로 홍수를 노려보았다.

별실 안에는 장예도 있었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귀신인 데다 신도(神道)를 닦는 이들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에 두광통은 그녀는 분명 계 선생님이 말한 요물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왕립은 한 번 보자마자 그저 범인(凡人)임을 알아볼 수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기운을 알아볼 수 없는 이 여인뿐이었다.

‘감히 이 요물이 나를 음해하다니!’

숙수의 신 주위에는 어느새 흐릿한 요기와 함께 신령의 기운이 퍼져 나갔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새파랗게 물들었고, 강렬한 분노로 인한 열기가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감히 계연에게 이 억울함을 풀어낼 수는 없었으므로, 저 여인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려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계 선생께서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저 요물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홍수는 이제 종전의 침착함을 잃고, 조심스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도 더는 감히 귀찮다는 듯 늘어져 있을 수 없었다.

“계 선생님……. 소녀, 방금은 그저 농을 던진 것입니다……. 강신 나리, 부디 용서해 주세요…….”

두광통은 물의 신이었지만, 지금 그의 두 눈에서는 타오르는 불길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홍수는 사실 이 강신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그가 뿜어내는 압박감이 너무 컸다.

“음……. 당신도 이 세상에 사는 감정을 가진 중생 중 하나이니, 감정이 있다면 농담을 할 수도 있지요.”

계연은 다시 한번 책장을 넘긴 뒤 홍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말했다.

“홍수 낭자께서 만약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계속 이리저리 대답을 피해 보세요. 그럴 수 있다면요.”

그의 말은 언뜻 정중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홍수에게 너는 어떻게 해도 독 안에 든 쥐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강신 두광통을 향해 공수하며 그를 탁자 옆의 방석으로 이끌었다.

“강신님,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실은 강신께서 저 요물과 어떤 관련도 없다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거든요. 어서 앉으세요.”

두광통은 그의 말을 듣고 크게 안심했고, 연거푸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 앉았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연은 홍수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정국에 온 지 얼마나 되었죠?”

“2년입니다.”

“대수선에 숨어들어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나요?”

홍수는 긴장한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제가 아니라 하여도 믿지 않으시겠지요…….”

홍수는 이렇게 말한 뒤 계연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어 낼 수 없었고, 시종일관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는 두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하니, 그럼 이 기루에서 수행을 쌓기가 불편했을 텐데 대정국에는 무슨 일로 온 건가요?”

계연은 이 요괴가 단순히 재미있어서 이곳에 머무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여우 요괴는 비록 기운을 제법 억누르고 있긴 했지만, 그중에는 얼마간의 살기(煞氣)가 느껴졌다. 그러니 절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요괴는 아니었다.

“선생님, 소문에 따르면 대정국에 매우 신비로운 신선이 한 분 계시다고 하던데요. 그분의 신통함과 법력은 무궁무진하게 넓고 깊지만, 그분을 직접 만난 이들은 아주 적다고 들었습니다. 그 신선께는 아주 신통한 선검이 한 자루 있다고도요…….”

잠시 말을 멈춘 홍수는 눈빛을 반짝이며 계연에게 물었다.

“그 신선이 바로 선생님이시죠?”

“하! 계 선생님께서 네게 질문을 했는데, 네까짓 게 감히 반문한다는 말이냐?”

강신은 콧방귀를 끼며 이렇게 말한 뒤, 자신의 기운을 끌어올려 요물을 억눌렀다. 만약 오늘 계 선생님께서 이 요물을 처리하려 하신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나설 생각이었다.

저 요물이 자신을 음해했기 때문도 있지만, 이는 사실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대정국에서 어느 정도 위명이 있고 용왕과 같은 수족에 속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한 가지 사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바로 계 선생님의 신통함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사실 그분의 ‘도(道)’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이었다.

이번 일로 계 선생님과 좋은 연을 맺을 수 있다면, 아주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선인지로(*仙人指路: 선인이 전해주는 지혜 또는 도움)’를 얻게 될 수도 있었다. 비록 통천강의 강신인 응신 정도는 아닐지라도, 수행에 있어 커다란 이점을 얻을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기세를 끌어모아 압박하는데도 요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직 계연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계연은 웃으며 여우 요괴를 바라보았다.

“신통함과 법력이 무궁무진하다? 세상에 그런 수선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적어도 저는 아직 그런 이를 만나보지 못했는데요!”

그의 말은 사실상 반 정도는 요물의 말에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말투는 비록 풍자하는 듯 들렸지만, 다르게 보면 그가 지금까지 만났던 수선자들은 모두 ‘그저 그랬다’는 뜻이었다. 신통함과 법력에 한계가 있는 자들 뿐이라는 소리였다.

홍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초조한 듯한 기색으로 물었다.

“계 선생님, 제가 대정국에 온 것은 사실 어떤 화를 피하기 위해서예요. 이곳에서 어떤 소란도 일으킬 생각이 없습니다……. 혹 선생님의 선검을, 제가 한 번만 볼 수 있을까요?”

강신 두광통은 놀란 얼굴로 여우 요괴를 향해 마치 별 멍청이를 다 본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이자는 아무래도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말에도 두서가 없는 데다 이렇게 갑자기 또 선검을 보여 달라 하다니, 그 검에 베일 게 무섭지도 않은가?

계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등 뒤의 넝쿨검이 계연의 앞으로 날아와 세로로 길게 몸체를 세우고는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검집은 소박하지만, 비취 같은 초록빛이 감도는 넝쿨이 감겨 있었다. 영험한 와중에 소박하고 은은한 우아함이 느껴졌다. 검의나 검기도 내뿜지 않는 지금의 넝쿨검은 무시무시한 병기(兵器)라기보다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영험한 넝쿨이 만 장(丈)의 날카로움을 숨기다(灵韵青藤, 藏锋万丈)…….”

홍수는 검집 위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그러자 검집에서부터 끝을 알 수 없는 검의가 느껴졌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사물은 극단으로 치달으면 그 반대 방향으로 전환된다)이라는 말처럼, 이는 필시 선검이 분명했다. 넝쿨검에서는 조금의 날카로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검이 검집을 나오는 순간 펼쳐질 끝없는 기세를 연상할 수 있었다.

이 순간, 숙수강의 신조차 멍하니 선검을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계 선생님의 넝쿨검이구나!’

홍수는 그대로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선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검이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넝쿨검을 만지려 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선검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솨앗!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흰 빛이 선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빛은 점차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빛이 은하수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을 주변의 모든 이는 느낄 수 있었다.

“아앗!”

비명을 지르며 몇 장(丈) 밖으로 튕겨 나간 홍수는, 별실의 문에 온몸을 부딪쳤다.

“켁…… 콜록콜록…….”

그녀는 손발을 덜덜 떨며 연달아 기침을 내뱉었다. 이렇게 해야 가슴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넝쿨검은 여전히 탁자 위 상공에 떠 있는 채였다.

방금 그것은 넝쿨검이 스스로 반응한 것이었다. 계연도 이 여우 요괴가 이토록 담이 클 줄은 차마 몰랐다.

‘감히 넝쿨검에 손을 대려 하다니…….’

넝쿨검은 영혼이 있는 선검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성격도 있었다. 그래서 때로 넝쿨검은 성질을 부리며 제 성질을 참지 못하기도 했다. 저렇게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넝쿨검의 일격을 받았으니, 아마 꽤 아플 것이다.

“쯧쯧쯧……. 자업자득이지!”

장예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던 그녀는 옆에 있던 왕립이 요괴의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화가 나는 동시에 기가 막혔다.

숙수강의 신도 차가운 눈빛으로 손발을 덜덜 떠는 요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달아 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방금 당한 공격이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선검의 경고였을 뿐, 만약 계 선생님이 선검에게 무어라 명했다면 저 요괴는 아마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두광통은 이제 저 요괴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선검의 주인이 겉으로 아무리 온화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선검도 그렇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살육을 위한 병기가 어찌 온화한 성격을 지녔겠는가?

한편 왕립은 홍수의 상태를 마음 아파하면서도, 왜 여태까지 누구도 별실에 들어오지 않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소란이 결코 작지 않았을 텐데, 대수선의 다른 이들은 마치 아무도 이를 듣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던 왕립은 계 선생님이 어떤 술법을 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홍수는 선검의 경고로 다쳐 고통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지가 멀쩡하고 어떤 실질적인 상처도 입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가 무척 어렵고 손발에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후에야 서서히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렇게 ‘마음이 아픈’ 상태는 드물게 겪어본 일이라서, 그녀의 마음에는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한편 계연은 저 여우 요괴가 이렇게나 빨리 다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속으로 몹시 놀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상태가 심각해서 자신이 나서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는데, 이렇게 빨리 회복할 줄은 몰랐다.

선검의 경고를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이렇게 빨리 회복하다니, 정말 대단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정말 예쁘다…….”

홍수는 조심스럽게 탁자 가까이 다가와 계연의 등 뒤로 돌아간 넝쿨검을 바라보았다. 이때 선검은 이미 희미해진 상태였는데, 그녀는 심신(心神)이 넝쿨검에 끌려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허상을 볼 수가 있었다.

“나도 선검이 한 자루 있었으면…….”

홍수의 한탄을 듣고, 이제는 계연마저 이 요괴의 뇌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요괴를 주시하자, 홍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긴장한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계 선생님, 제 이름은 도사연(塗思烟)이라 하고, 서역(西域) 남주(嵐州)에 있는 천창산(淺蒼山)의 옥호동천(玉狐洞天)에서 왔습니다. 전에는 선인(仙人)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고, 정말, 정말로 도를 거스르는 짓은 한 적이 없습니다…… 최소한 대정국에 온 후로는요!”

“서역 남주? 도사연? 도산(*塗山: 중국 상고(上古)시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씨족들의 성씨)사연이 아니고요?”

여우의 성이 도씨였으므로, 계연은 혹시나 하여 이렇게 물어보았다.

“예?”

도사연은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이렇게 되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