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법천상지의 환영(幻影)
(*法天象地(법천상지): 천지의 힘을 빌려 자신의 능력을 공간 내에서 허용되는 최고치에 도달하게 하는 술법. 서유기(西遊記)에서는 머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두 발로 땅을 디디는 거인처럼 묘사됨)
계연은 더는 이에 관해 설명하지 않고, 탁자 위의 서책을 다시 소매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가 도사연을 향해 말했다.
“낭자, 당신과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첫째로는 내가 아직 의혹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이곳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예요.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창기 노릇은 그만하고, 적당한 이유를 찾아 속량(*贖良: 돈이나 다른 대가를 내고 자유를 얻다)한 다음 대정국을 떠나도록 하세요.”
“예, 예?”
도사연은 무심코 대답했다가 다시 놀란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뇨, 안 돼요!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만약 선생님께서 그 선검을 빌려주신다면, 제가 남주에 갔다가 다시 돌려 드릴게요!”
계연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예와 두광통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두광통은 즉시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네가 정녕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것이냐? 계 선생님, 그렇다면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는 게 어떨지요? 선생께서 나서실 필요 없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도사연은 두광통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앉은 다음, 두 손을 꼭 쥐고서 전전긍긍하는 표정으로 계연과 그의 등 뒤의 선검을 바라보았다. 강신은 계연의 동의 없이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계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강신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광통과 도사연 모두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곧이어 두광통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고, 도사연은 대경실색한 모습이었다.
“허엇!”
수신이 이렇게 기합을 넣자, 온몸에서 신령한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소매 안의 손에는 검은 비늘이 차례로 돋아나고 있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손을 뻗어 여우 요괴의 목을 틀어쥐었다.
도사연은 본래 몸을 피하려 했으나, 돌연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허윽……!”
목을 단단히 틀어 잡힌 도사연은 힘껏 발버둥 쳤다. 그러자 온몸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을 조르는 검은 손에는 신령스러운 빛과 함께 살기와 요기가 위험하게 솟구치고 있어, 그녀는 더는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실은 두광통도 속으로 조금 놀라고 있었다.
‘이 요괴가 왜 이리 쉽게 잡히지?’
곧이어 두 사람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 한 명은 고개를 돌리고 다른 한 명은 힘겹게 목을 돌려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탁자 위에 있던 물기가 작은 글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정(定)’ 자였다.
정신법을 저 요괴에게 쓰기까지 계연은 그다지 큰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방금 선검에 의해 심신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아마 효과가 있을 거라고 여겼고, 역시 그의 예상대로 저 요괴를 잠시간 붙들어 둘 수 있었다.
두광통은 있는 힘껏 요괴의 목을 죄고 있는 동안, 서서히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법력을 운용해 가늘고 하얀 목을 비틀어 쥐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쥔 듯 상대에게 자신의 힘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억…… 강신 나리……. 조금만, 저, 이러다 죽을 것 같아요……. 계 선생님…….”
두광통이 들이는 힘에 비해 여우 요괴는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목 위의 얼굴은 피가 몰려 새빨개졌으며, 두 손으로는 두광통의 팔을 힘껏 떼어내려는 동시에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계 선생님, 강신께 어서 풀어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계 선생님, 제가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다가는 홍수 낭자가 목이 졸려 죽겠어요!”
왕립은 옆에서 조급한 얼굴로 계연에게 공수하며 애걸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온화하던 계연은 이때 굳은 결심을 한 듯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연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껴, 눈썹을 찡그리며 보통 사람처럼 발버둥 치는 도사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광통은 음산한 표정으로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고, 요기와 법력이 용솟음치며 그의 팔이 검은빛으로 물들어갔다.
“계 선생님…… 살, 살려주세요…….”
콰직……!
두광통의 오른손에서 무언가 덜컥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여우 요괴의 애원하던 소리가 뚝 그쳤다. 이에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손안의 시체를 바닥에 던졌다.
“허억……. 죽었어! 사람이 죽었어!”
왕립은 놀라 허둥지둥하며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계 선생님, 이게…….”
두광통은 의혹에 찬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고, 장예는 일어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얼굴 가죽을 벗기세요.”
“예!”
두광통은 무릎을 꿇고 앉아 손가락 두 개를 여인의 뺨 가장자리에 댔다.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 거죽을 반 촌(寸) 정도 뚫었고, 그는 법력을 운용해 그것을 살짝 들춰냈다.
푸슛-!
어떤 기운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순식간에 방안에 악취가 가득 찼다.
두광통은 손안에 든 얼굴 가죽을 노려보다가 다시 누워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가죽은 바로 홍수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땅에 누워있는 시체는 부패한 여성의 시신으로,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악취가 코를 찌를 지경이었다.
“읍……우욱…….”
방금 ‘사람이 죽은’ 일로 놀라 쓰러진 왕립은 이 상황을 보고서 참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다. 그러자 저녁에 먹고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들이 그대로 밀려 나왔다. 토를 다 한 후, 그는 창가로 달려가 다급히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계연은 자신의 태양혈 부근을 문지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법안을 가장 크게 뜨는 동시에 대량의 법력을 운용했다. 그리고 의식 세계를 끌어내어 그것을 현실 세계에 투영하지는 않고 널리 퍼뜨렸다. 그런 상태로 바닥의 시신과 두광통이 든 얼굴 가죽을 훑은 다음, 사방 곳곳을 살펴보았다.
계연이 의식 세계를 끌어내던 순간 여전히 그는 탁자 앞에 서 있었지만, 두광통은 마치 계연의 형체가 무한대로 커지는 것처럼 느꼈다.
계연이 하늘을 떠받치는 거인처럼 지상에 우뚝 서서, 한 쌍의 법안으로 달과 별처럼 세상을 내려 살피는 듯한 착각이 두광통에게 일었다.
몇 초 후, 계연은 동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사연, 그 이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네…….”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심력(心力)의 소모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원래 상태로 돌아온 후 천천히 호흡을 뱉었다.
“후우…….”
방금 계연이 무의식적으로 동쪽을 살폈다고는 하나, 그의 시선이 세상 어디에나 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요괴의 대략적인 위치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 찰나가 너무나 짧고 모호했을 뿐이었다.
그 시각, 아득히 먼 동쪽 어딘가에서는 희박한 연기가 때때로 꿈틀대며 넓게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종 여우의 형상이 되기도 했다. 바로 그때, 여우 한 마리가 그 희미한 안개 속에서 형상을 갖추고 뛰쳐나오더니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느낌은 여우에게 아주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던 그 순간, 요괴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선 거인 한 사람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푸른 장포에 두 팔을 등에 지고서, 회백색의 담담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 찰나, 여우 요괴는 심장이 돌연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런 감각이 씻은 듯이 종적을 감추며, 조금 전의 일이 모두 자신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계연……. 과연 대단하구나. 보아하니 정말로 진선(眞仙)의 수준에 이른 고인이군. 이번에 그에게 한 방 먹이기는 했는데, 어째 느낌이 안 좋단 말이지……. 휴! 그가 가진 넝쿨검은 정말 예뻤어. 손에 넣을 방법이 없으니 아쉽네……. 그나저나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던 그 술법은 그렇다 쳐도, 조금 전 그것은 뭐였지?’
대수선 위에 있던 계연은 자신이 요괴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그 요괴를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보니 자신은 여전히 상대방을 낮잡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 요괴가 도망친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계연은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내가 나 자신의 사소한 재주만 믿고, 대단한 상대를 얕보았구나…….”
‘사소한 재주라니?’
두광통은 그의 말을 듣고 제 가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계 선생님이 가진 것이 사소한 재주라면,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물 안의 미꾸라지? 감히 계 선생님의 눈앞에서 도망치다니, 저 요괴는 확실히 실력이 있는 자였구나.’
비록 요괴가 눈앞에서 도망쳤지만, 두광통은 여전히 계연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계 선생님의 구신술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리 생소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그 능력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은, 그야말로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게 바로 진선의 능력이겠지? 용왕께서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으시려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두광통은 아무리 진선의 수준에 오른 고인들이라고 해도 계 선생님 정도의 능력을 지니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다른 생각에 잠기며 늦게나마 두려움을 느꼈다.
‘이 정도 능력을 갖춘 계 선생님의 앞에서 도망쳤다면, 그 요물은 엄청난 실력을 갖춘 자가 분명해. 만약 이 자리에 계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고, 내가 저것과 단독으로 마주쳤다면……?’
계연은 강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서, 방금 일어난 일에 조금 겸연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더욱 골치 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읍……. 허억…… 허억……. 계, 계 선생님. 이 시신은 어쩌죠? 홍수, 홍수 낭자는 죽은 건가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토를 하던 왕립은 여전히 홍수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약간 낙담한 기색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게, 이 시신이 진짜 홍수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네.”
장예는 시신의 곁에 서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도대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에 계연은 손가락을 접으며 점을 쳐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홍수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이 시신은 성 밖의 난장강(*亂葬崗: 연고 없는 무덤이 널린 묘지)에서 온 것이네요. 다만 오늘 밤 이 홍수는 이미 죽었으니…….”
계연은 고민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곧 있으면 포주가 올 텐데요.”
“예? 그럼 어쩌지요? 사람을 죽였으니 분명 우리를 관아에 고발할 거예요!”
왕립은 정신이 번쩍 든 듯 당황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이 자리에 신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마음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장예는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이렇게 반박한 뒤, 경외감을 담은 눈빛으로 계연의 옆에 공손하게 서 있는 수신을 바라본 다음 다시 계 선생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홍수의 일은 어쩌면 좋지요? 진짜 홍수는 어디에 있나요?”
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시신은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는 게 좋겠어요. 진짜 홍수는 소씨 집안 공자를 찾아가 보면 알겠지요. 그러니 오늘 밤은…… 홍수를 속량하는 게 좋겠어요. 장예 낭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예? 홍수를 속량한다고요?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장예는 원래 계 선생님이 그녀에게 시체를 갖다 놓으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계 선생은 돌연 강신의 손에서 얼굴 가죽을 받아 들었다. 이에 장예는 순간 불길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