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빚쟁이
“언 대인,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계 선생님, 정말로 선생님이시군요! 언, 언상이 계 선생님과 두 분을 뵙습니다!”
언상은 술 취한 자를 부축하며 최대한 그럴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무척 기뻤지만, 그것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음? 왜 안 가는 겁니까? 집에 왔나? 그럼 갑시다, 자…… 술 마시러 가야지…….”
계연은 언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부축하고 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관기(官氣)가 느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반 백성은 아닌 듯했다.
“이 대인께서는 힘든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언상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계 선생님, 천하에서 제일 맡기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것도 순위를 정할 수가 있나요?”
계연은 궁금해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언상은 손가락으로 옆 사람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천하에서 제일 맡기 어려운 일은, 바로 경기부 부윤(府尹)입니다.”
대정국의 두 직할부 관아에서 가장 높은 관원은 다른 지방처럼 지부(知府)가 아닌 부윤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지부보다 품계가 하나 높고, 지주(知州)와 같은 종4품이었다.
응씨 남매는 속세의 일을 잘 모르거나 아직 그 뜻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계연은 바로 알아듣고서 술 취한 남자를 한 번 더 살폈다.
천자의 발아래에서 관아를 지휘하는 것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고관대작을 건드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황족들과 엮일 수도 있었다.
“그럼 언 대인,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계연은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언상에게 공수한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언상은 입을 들썩이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덕제는 아직도 신선을 구하고 영약을 찾는 일에 기력을 크게 소모하고 있었다. 조금 무도한 말을 하자면, 언상은 사실 황제가 진정한 고인을 찾지 못하기를 바랐다.
지금 도성의 형세로 봤을 때, 자신이 열성을 다해 신선을 찾으러 다닌다면 원덕제가 아직 죽지 않았을지라도 스스로가 먼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선인(仙人)들의 일은 그와 같은 일개 범인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선생님을 잠시 불러 세운다 해도 진짜로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계연과 응씨 남매는 주루 입구에 다다랐다. 응풍은 고개를 돌려 언상과 경기부 부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 숙부님, 저 흠천감 사람은 꽤 시원한 구석이 있군요. 선생님이 선인인 것을 알면서도 들러붙지 않네요.”
“하하, 그렇죠. 응풍 전하보다도 더 도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지요.”
계연의 농담을 듣고 응풍은 조금 겸연쩍은 듯 웃었고, 응약리는 그것을 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곧이어 계연은 두 사람을 데리고 주루로 들어갔다.
“세 분 손님, 어서 오세요! 혹시 자리를 예약하셨나요?”
원래 2층 별실로 향하려던 계연은 점소이의 물음에 생각을 바꿨다.
“네.”
계연은 고개를 들어 위층의 어느 한 곳을 살피며 대답했다.
“2층 동북쪽에 있는 별실이요.”
“네?”
점소이는 그의 말에 놀라 이렇게 되물었다.
“어, 손님께서 잘못 기억하신 게 아닌가요? 그곳에는 이미 손님이 있거든요.”
계연은 주루 안으로 들어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로 그 소 공자가 예약한 겁니다. 그분이 먼저 왔고, 저희는 공자의 손님이지요.”
“아하, 그러셨군요. 진작 말씀하지 그러셨어요,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계연은 점소이를 따라 함께 계단으로 향했고, 응풍과 응약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곧 계연의 뒤를 따라갔다.
2층 동북쪽에 있는 별실 안에서, 소릉(蕭凌)은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잔을 들고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한쪽에는 술과 요리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문방사우와 함께 막 완성한 그림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던 때에, 돌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 손님이 오셨습니다.”
소릉은 잔을 내려놓고 의혹에 찬 얼굴로 곁에 앉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누구라더냐?”
그러자 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계연이 안으로 들어와 소릉과 단목완을 향해 공수했다.
“접니다. 소 공자, 단 낭자 안녕하세요!”
소릉은 계연을 알지 못했으므로,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계연의 말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의 곁에 앉은 단목완도 한 손으로 탁자 아래에서 소릉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겉으로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소릉이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잘못 아신 모양입니다. 이 여인은 육(陸)씨 입니다.”
밖에 서 있던 점소이는 이런 상황을 보고서,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막 뭐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 응약리는 그의 눈앞에 손을 뻗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자 점소이의 머리가 혼몽해지더니, 점소이는 곧 아래층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계연은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응풍과 응약리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고는, 문틀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 부분에서 한 줄기 은은한 법광(法光)이 번쩍였다.
소릉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방 안에 들어온 세 사람을 주시했다. 그는 이들이 무공을 익힌 이들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소릉은 딱딱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으며, 탁자 아래의 손으로는 쇄은자(*碎銀子: 은자를 잘게 부순 것) 세 개를 꼭 쥐고 있었다.
“계 숙부님, 저자가 숙부님께 빚을 진 사람입니까? 정말 재미있네요. 게다가 저 두 사람은…….”
‘범인(凡人)일 뿐인데!’
응풍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렇게 물었다. 도성에 들어오기 전 그는 갖은 방법으로 계연을 귀찮게 하여 곧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낱 여우 요괴가 계 숙부님에게서 어떤 상해도 입지 않고 도망친 데 대해 경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군요! 제가 언제 그쪽에게 빚을 졌단 말입니까?”
소릉이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치자, 계연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십여 일 전에요.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황금 오백 냥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계연은 걸음을 옮겨 의자를 당겨 앉았다. 눈으로는 탁자 위에 놓인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풍과 응약리는 서로를 쳐다본 후 탁자로 걸어가 자신들도 자리에 앉았다. 응풍은 그 와중에 탁자 위에 놓인 요리들의 냄새를 맡기도 했다.
소릉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계연을 쳐다보았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계연이 이 중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모든 일을 완전히 은밀하게 처리한 게 아니라 치더라도, 이렇게 정확한 장소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했다.
그는 등불의 빛을 빌어 그제야 눈앞의 사람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상대방은 뜻밖에도 두 눈이 희끄무레한 회백색이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보게! 주인장!”
소릉이 몇 번이나 불렀으나, 밖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그는 몹시 놀란 기색을 감추며, 속으로는 상대방이 밖에 고수들을 매복해 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여러분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소릉은 이렇게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방금 여인의 원래 성 씨를 불렀다. 어쩌면 이미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상대방은 소릉 자신에 대해 뒤를 캐내다가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황금 오백 냥은 작은 액수가 아닙니다. 제가 그만한 액수를 빚졌다면 분명 기억할 것입니다.”
“기억을 못 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빚을 지던 시간에 당신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요.”
계연은 재미있다는 듯 이렇게 대답한 후, 소릉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유주 성숙부 숙수 기슭에 있는 대수선에서, 당신 옆에 앉은 단 낭자와 외모가 몹시 닮은 사람을 대신 속량해 주었거든요.”
계연의 말을 듣자마자 소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됩니다! 그쪽은…….”
소릉은 나머지 말을 의식적으로 집어삼키며 안색이 수차례 변하였다. 곁에 앉아 있던 단목완도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계연은 서두르지 않고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응풍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릉이 대답하지 않자, 계연을 잠시 바라본 후 자신이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관기(官氣)가 감도는 것을 보니 관료의 자제인 듯한데, 그 정도면 분명 자기 나름대로의 수단이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러나 대수선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홍수 낭자를 다른 이와 바꾸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이쯤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하하, 통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소릉은 차가운 미소를 얼굴에 드리운 채 딱 잡아뗐다. 그러면서 탁자 아래에서 손에 쥐고 있던 은자를 다시 안에 넣고, 은밀하게 소매 안에서 누런 부적 종이를 꺼냈다.
“참, 선생께서 제가 빚졌다 하신 황금 오백 냥은 지금 갚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그 정도 액수가 되는 은표(銀票)가 한 장 있거든요.”
소릉은 이렇게 대답한 뒤, 두 손에 진기(眞氣)를 폭발하여 별안간 탁자를 뒤엎었다. 그리고 즉시 누런 부적 종이를 찢었다.
“청부 대신(靑府大神)은 명에 따르십시오!”
슈욱-!
눈을 찌를 듯한 붉은빛이 소릉의 손안에서 폭발하는 동시에, 빛으로 이루어진 듯한 붉은 뱀이 하나씩 피어올랐다.
그러자 소릉은 단목완을 옆으로 안아 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만 갑시다.”
그 뒤, 그는 진기를 운용해 옆 창문을 향해 거세게 뛰어들었다.
쾅!
그러나 커다란 소리가 들린 뒤, 단목완을 안고 있던 소릉은 나무 벽에 튕겨 나왔다. 마치 철로 된 벽에 부딪혔던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나무 벽을 부순 뒤 단목완을 안고 함께 뛰어내려 도망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가려고? 어딜 가려고 하시나?”
소릉은 어지러운 머리를 힘껏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비록 내심 예상했었지만, 막상 뻣뻣해진 몸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엎은 탁자와 그 위에 차려진 요리와 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공중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술도 엎어지지 않았고 음식도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며, 그릇들은 단 하나도 깨지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이 나서서 소매를 한번 휘두르니, 술과 요리, 찻잔 등이 탁자와 함께 내려앉아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그때 응풍은 소릉이 찢었던 종이 부적을 손에 쥐고 있었다.
부적 위에는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복잡한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위에 ‘청부’라고 쓰인 두 글자였는데, 그 위에는 은은한 법광이 흐르고 있었다. 잠시 종이를 살펴보던 응풍은 두 손으로 계연에게 부적을 전달했다.
“계 숙부님도 보세요.”
계연도 부적을 받아 살펴보니, 그 위에 잔뜩 그려진 엉망진창의 붉은 선들이 있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법령(法令)처럼 보이는 글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또 법령과는 크게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비록 부적 위의 글자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방금 부적이 폭발하던 장면을 통해 그 용도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방금 있었던 일로, 소릉과 단목완이 절대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범인(凡人)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