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죽음이 가까워진 황제
응약리는 그래도 강신으로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소씨 집안과의 일을 마무리 짓고 며칠 뒤 먼저 떠나갔다. 응풍은 그러고도 2주 정도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어서, 계연이 할 수 없이 쫓아 보냈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다시 한번 가을에 접어들었다. 계연은 어느새 경기부에서 홀로 머문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계연은 조정의 상황을 좀 더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도성은 이제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의 알력 다툼이나 은밀히 오가는 계략들은 계연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간 계연이 가장 많이 한 일은 도성의 기원(棋院) 곳곳을 한가로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한 차례 저승에 들러 백약과 주염생을 한 번 보고 오기도 했다.
그 외에 언급할 만한 일은 윤청의 과거 시험 결과였다.
몇 달 전 봄, 살구꽃이 만개하던 시기에 열린 춘위(*春闈: 회시(會試)를 일컫는 말)의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일찍이 주에서 열리는 해시(解試)를 통과한 윤청은 다음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어, 이번 회시와 전시에 참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얻은 성적은 그다지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일갑(一甲)의 장원, 방안, 탐화 자리는 당연히 얻지 못했고, 이갑(二甲)의 뒷부분에 이름을 올린 정도였다. 그의 부친인 윤재성이 세운 업적이 너무나 휘황찬란했기 때문에, 그의 성적은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떨어져 보였다.
그러나 이 일에는 분명 숨겨진 내막이 있었다. 다른 이들의 실력이 어떤지는 계연도 잘 모르지만, 윤청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원(*解元: 해시의 장원), 회원(*會元: 회시의 장원), 장원(*壯元: 전시의 장원)이 모두 되려면 얼마간의 운이 필요하기는 했으니, 그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시의 일갑 세 자리 정도는 윤청의 실력으로 충분히 노려볼 만했고, 가능성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윤청의 이름은 이갑의 끄트머리에 있어, 겨우 삼갑(三甲)을 면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계연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었다.
누군가 윤청에게 손을 썼을 가능성은 아주 적었다. 비록 윤재성이 많은 이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사고 있다 해도, 그런 일까지 저지를 정도로 간이 큰 이는 없었다. 그러니 윤청은 일부러 이갑 끄트머리에 머무른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계연은 심지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일단 관리가 되는 요건을 충족시킬 정도로만 성적을 받고, 인맥을 이용해 적당한 위치까지 올라간 다음 능력을 발휘할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리 눈에 띄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윤재성은 그를 존경하는 이가 많듯, 미움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러나 윤재성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업무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그는 뼛속까지 문인 기질이 박힌 자였다. 오히려 사고가 치밀하고 융통성이 있는 윤청이야말로 그들이 더욱 경계해야 하는 자였다. 다만 윤청을 아주 잘 아는 몇몇을 빼면, 그런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날은 완주에서 여러 해 동안 전심전력으로 정사를 돌보아 온 윤재성이 황제를 알현하고 보고를 올리러 도성에 드는 날이었다.
윤재성을 포함한 모든 대신이 이미 알다시피, 지금의 황제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윤재성을 존경하거나 꺼리거나 상관없이 조정의 모든 문무 대신과 황족들이 인정하는 사실 하나는, 그가 대정국의 충신이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관리라는 점이었다.
황제의 건강이 나빠진 후로, 그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불안함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들 중 원덕제의 신임과 총애를 동시에 받는 관리는 한 손으로 꼽고도 남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윤재성이고, 다음으로 총애를 받는 자는 황제에게 한 번이나마 진정한 선연(仙緣)을 찾아준 태상사 언상이었다.
완주 지주 윤재성이 이번에 다급히 도성으로 향한 것에는,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이 시각, 황궁 깊은 곳 천자의 침전 밖에서는 태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천자의 침상 곁에 다다르자, 휘장 안쪽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고했다.
“폐하, 완주 지주 윤재성이 도성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궁 밖에서 폐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윤, 윤 애경이 왔다고? 얼마 만에 온 것이냐?”
태감은 천자를 오래 모셨기에, 그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황명이 하달된 후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났습니다. 완주 운파부와 도성의 거리가 그렇게나 먼데 벌써 도착하시다니, 윤 대인은 역시 충군애국(忠君愛國)의 표본이신 듯합니다. 대인께서는 십여 일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려와, 중간에 말 몇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흐음……. 알겠다. 그를 들라 하라.”
요즘은 황제의 침전 근처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태감은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윤재성을 이끌고 황제의 침상 곁으로 돌아왔다.
“완주 지주 윤재성, 폐하를 뵈옵니다!”
윤재성이 공손하게 장읍례를 올렸다.
“윤 애경……. 좀 더 가까이 오게. 짐, 짐이 한 번 얼굴을 봐야겠으니…….”
윤재성은 곁에 서 있던 태감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다지 주저하지 않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황제가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약간 숙였다. 태감은 황제가 누운 침상에 다가가 휘장 한쪽을 열어젖혔다.
황제의 용안은 살이 빠져 홀쭉했고 안색이 아주 나빴다. 그 모습을 본 윤재성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황제를 본 것이 장원이 되던 때가 아니던가. 기억에 남아있던 모습과 지금 황제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서,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멍하니 있던 것은 아주 잠시뿐이었고, 윤재성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폐하!”
윤재성을 살피던 황제는 다른 대신들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윤재성에게서는 전보다 더욱 광채가 나는 듯했는데, 그로 인해 침전 안의 다른 곳이 그와 대비되어 어둡게 느껴질 정도였다.
“윤 애경, 짐이 들은 소문이 하나 있소. 시정의, 유학자…… 적, 적지 않은 이들이 윤 애경이 호연정기를 가지고 있다며, 그야말로…… 대정국을 짊어질 동량(棟梁)이라고 하더이다…….”
“소신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황제가 웃었고, 태감 몇 명이 다가와 황제를 부축해 등 뒤에 베개를 댄 다음 침상에 앉도록 도왔다.
“의자를 내려라.”
태감이 작은 의자를 하나 옮겨왔고, 윤재성은 감사를 표한 뒤 자리에 앉았다.
“하하하……. 원래는 짐도 그, 그것이 시정의 소문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오늘 애경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구려!”
“황공하옵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로 황공하겠지만, 애경은 아닐 테지! 하하하…….”
그러자 윤재성은 정말로 당황하여, 다급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당치 않사옵니다!”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삼성육부(*三省六部: 문하성‧중서성‧상서성의 3성과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의 6부를 지칭함)의 고관들, 대부분은…… 짐과 이미 한 차례 대면했소. 윤 애경은 비록 일개 지주일 뿐이나, 조정에서는 누구도 애경을 무시하지 않지. 오늘 짐이 경에게 물으려 했던 것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다른 질문을 하고 싶어지는군.”
윤재성은 황제를 향해 다시 한번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무엇이든 하문하시옵소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윤재성, 자네는 진왕과 오왕 중, 누가 더 대업을 맡을 만하다고 보는가?”
마침 차를 받쳐 들고 오던 태감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쟁반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했다.
황제의 물음을 들은 태감은 손을 떨었고, 윤재성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주제를 자신이 어찌 감히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이에 윤재성은 곧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침상 앞에 무릎을 꿇은 뒤, 두 손을 높이 모아들며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소신은 도성과 멀리 떨어진 지방의 일개 지주로서, 조정의 일은 잘 알지 못합니다. 두 분 황자 전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자격으로 보나 이 일에 대한 이해도로 보나, 소신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적당한 자가 아니옵니다. 대정국의 미래를 정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폐하뿐이십니다. 폐하께서 어떤 분을 태자로 세우시든, 소신은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윤재성은 다급히 이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제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윤재성은, 감히 고개를 들어 원덕제의 용안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황제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윤재성이 황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윤 애경, 그만 일어나 자리에 앉으시오. 차를 내려라.”
“감사합니다, 폐하!”
윤재성이 몸을 일으키자, 곁에 있던 태감이 재빨리 차를 올렸다.
“감사하오, 공공!”
“아닙니다, 윤 대인.”
황제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윤재성이 차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윤재성은 속으로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방금의 질문으로 보건대, 오늘 일은 이대로 어물쩍 넘어가기는 힘들 듯했다. 게다가 그는 스스로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비록 진왕이 그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었고 자신도 감사하는 마음을 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진영에 섰다는 뜻은 아니었다.
윤재성이 차를 마시기를 기다린 후, 황제는 숨을 고른 뒤 다시 이렇게 물었다.
“윤 애경, 짐이 왜 자네를 아끼는지 아는가?”
윤재성도 속으로는 자신이 충신인 동시에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고 자부했지만,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신 잘 모르오나, 분명 폐하께서 품은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윤 애경은 기개가 있고 충심이 깊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고리타분하지 않지. 완주의 일은, 조정의 그 누구도 경처럼 해내지 못했을 것이오. 다른 이였다면 탐관오리와 어울리거나, 아무런 요령도 없이 무작정 뛰어들었을 것이오. 그랬다면 완주 전체를 깨끗이 손볼 수는 없었겠지…….”
황제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경은 불과 2년 만에 완주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소. 봄 여름에 걷은 세수(稅收)만 해도 예전 완주의 1년 치 세수의 2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게다가 완주의 백성 모두 근면하고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경의 공이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소.”
윤재성은 찻잔을 내려놓고 공수하며 대답했다.
“폐하의 크나큰 승은으로 인해 오늘날의 완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천자께서 직접 제게 완주의 탐관오리를 색출하라 명하신 것을 완주에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소신은 그저 폐하의 명을 따른 것뿐이옵니다!”
“하하하……. 윤 애경은 아부도 참 잘하는군(*拍馬屁: 말 엉덩이를 두드리다).”
“폐하, 엄밀히 따지자면 용의 엉덩이지요!”
윤재성이 웃으며 덧붙이자 황제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주변에 서 있던 태감들은 몰래 식은땀을 닦았고, 어떤 이들은 조심스레 가슴을 두드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