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두 번째 내기
오왕의 두 심복은 서신을 읽더니 안색이 변했다.
“어찌 이런 일이…….”
“정말 의외군요. 윤재성은 제위 다툼에 끼어들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하하,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윤재성은 사실 관리가 되기도 전에 이미 진왕에게 포섭당했다 하니…….”
오왕은 바깥의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정이 되었다. 그는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성의껏 윤재성을 구슬리려 노력해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가 했던 모든 일이 윤재성에게는 아주 우스웠을 것이다. 진왕도 분명 그 일에 대해 알 것이고, 그렇다면 부황께서도 알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흥……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겠군.’
오왕은 셋째가 어떻게 자신을 조롱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부황이 어서방 책상 뒤에 앉아 냉담한 눈빛으로 그 일에 대해 보고받는 것이 상상되기도 했다.
오왕 양경은 자신의 부황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자신이 그와 같은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었으니, 자신은 부황에게 아주 크게 점수를 깎였을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셋째가 요즘 조용하더라니…… 윤재성이 입궁하기만을 기다렸던 모양이지!’
“윤재성은 정말로 깊이 숨긴 한 수요. 본왕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오왕은 주먹을 꽉 쥐고서 깊게 심호흡한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오. 본왕도 셋째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윤재성 하나에 의지해서는 부황께 그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소. 부황의 성격은 본왕이 가장 잘 아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일개 지주가 황제의 신임을 조금 받는다 하여, 감히 성상의 결정을 좌우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이 일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왕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대신 중에서 본왕을 지지하는 이들이 셋째를 지지하는 쪽보다 월등히 많소. 많은 이들이 보기에, 본왕을 지지하는 것이 승산이 더 크다는 뜻이지. 승상 몇 분도 모두 적장자가 제위를 잇는 것을 지지하고 있소. 어찌 되었든 아직은 본왕의 승산이 크다는 뜻이오.”
이렇게 말한 오왕은 웃음을 거두며 두 심복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조정의 많은 대신이 본왕을 지지하고, 아무리 이쪽의 승산이 크다 여겨도 위험성이 있는 것은 변하지 않소. 음험한 셋째의 성격으로 볼 때, 셋째가 무슨 수단을 써서 부황의 마음을 바꾸기라도 한다면, 부황이 셋째에게 전위 조서를 내리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되면, 황자인 나의 신분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나, 나를 지지했던 대신들은 후에 진왕에 의해 정리될 것이오.”
오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벽에 걸린 보검(寶劍)을 바라보았다.
“만일을 위해, 그래도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소?”
오왕은 목소리를 낮추며 병부 대신과 상서성 관원을 바라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감히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원덕제의 건강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그 후 일주일 동안 세 차례나 조회에 참석했다.
윤재성은 비록 완주 지주의 신분이었으나, 조회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황제가 후사(後事)를 안배해놓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더욱이 황제가 그동안 절대 손에 놓지 않던 권력을 각 부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옥에 갇힌 이들 중 황제가 이름을 기억하는 자들은 모두 중형(重刑)을 선고받거나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후에 제위를 잇는 황자가 대사면(大赦免)을 내리기라도 하면, 자신이 눈엣가시로 여겼던 이들이 모두 풀려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는 상서성과 이부(吏部)에 윤재성의 공적을 평가하라는 명령을 내려 윤재성을 도성에 불러들여 승진시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황제는 후계에 대한 일은 단 한 글자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황자들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고, 조회에서는 그들을 못 본 체했다. 황자들 중 누군가 나서서 주청을 올려야 겨우 대꾸를 해주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왕과 오왕 두 황자들은 마음을 바싹 졸이고 있었다.
계연은 결코 변태는 아니었지만, 목적이 있어 도성에 왔으니 그간 진왕부와 오왕부를 각각 한 번씩 들어가 보고 왔다. 하지만 자세한 것을 찾아보지는 않았고, 황궁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윤재성이 도성에 도착한 후 두 황자들은 누가 제위를 이을 것이냐에 대해 모두 매우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에 그들은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뒷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비록 한 어미에게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은 같은 피를 이어받은 형제가 확실했다.
윤재성은 의심을 피하고자 그동안 조회에 들고 각 부의 공무를 처리하는 것 외에는 역관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오왕과 진왕은 몇 번이고 그와 접촉하려 했으나, 윤재성은 문을 닫아걸고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밤이었다.
경기부에서 가장 큰 역관에서 윤재성은 단독으로 별채를 쓰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병졸과 시위들이 교대로 이곳을 지키고 있었고, 안에서는 하인과 관사들이 시중을 들었다. 이날 밤 그는 방안에서 한참 글을 쓰고 있었다.
똑똑똑!
“누구냐.”
그러자 힘 있고 온화한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
“저예요.”
윤재성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동작을 멈추고 붓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친히 문 앞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과연, 계연이 그를 향해 웃는 얼굴로 공수하며 인사했다.
“윤 훈장님, 잘 지내셨나요?”
“계 선생님? 경기부에 계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윤재성은 그에게 인사한 후 한쪽으로 비켜서며 안으로 들라 손짓했다. 조금 의아한 마음에 바깥을 한 번 살펴보았으나, 그는 곧 계 선생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시위와 하인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야말로 정상이었던 것이다.
계연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윤재성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완주에서 헤어진 후로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도성에는 저를 보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청이를 보러 오신 겁니까? 그 아이는 과거 시험에서 비록 이갑에 들었지만, 실은 실력을 숨긴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좋지요. 제 명성이 너무 크니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평소 조정에서는 말이 많지 않은 편인 윤재성은 이때 쉬지 않고 떠들며 계연이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았다.
‘뭐, 할 말이 있으면 다 해야지.’
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벗이 왜 이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윤재성의 말을 들으며 책상 앞으로 다가가 벗이 조금 전까지 쓰고 있던 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조정에 올리는 상소도, 공무와 관련된 급한 사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풍경화를 그리거나 시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가 적고 있던 것은 교육적인 목적의 글이었다.
“아, 그것은 제가 근래에 쓰고 있는 <무학(務學)>입니다. 만약 잘 된다면, 후일 천하의 후학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자 계연은 윤재성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책상을 돌아가 종이 몇 장을 들고 뒤적였다.
윤재성의 호연정기가 글자와 행간에서 드러나 유유히 빛을 발했다. 그것은 수선자들이 영기를 담아 글자를 쓴 것과 비슷하여, 계연도 또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종이들은 아직 책으로 엮이지 않아, 따지자면 아직 초고(草稿)일 뿐이었다. 종이에는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이 글이 추구하는 바는 문맹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군자육예(*君子六藝: 예(禮: 예절), 악(樂: 음악), 사(射: 궁술), 어(御: 마술(馬術)), 서(書: 서도), 수(數:수학))’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어,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즉, 윤재성은 유생들의 ‘정신’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갖춰야 할 기개를 좀 더 쉽고 명확하게 설명한 것이다.
“책상 앞에 서서 붓을 들어 글을 쓰는 것은, 마치 검을 들고 전쟁에 나가 적과 맞서 싸우는 것과 같군요! 정말 좋은 글입니다!”
계연의 말에 윤재성은 눈을 반짝 빛내며, 다시 한번 정중하게 두 손을 맞잡고 읍했다.
“역시 계 선생님이십니다. 좋은 비유군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토록 적절히 표현하시다니요!”
계연은 다시 몇 장을 읽어보다가 원래 위치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의 글을 읽은 계연은 오기 전보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자신의 이 친우는 아무래도 관리보다는 교육에 알맞은 인재인 것 같았다. 오래전 그가 이 길을 택했을 때 가졌던 초심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계연도 그간 윤재성에 대한 호칭을 바꾸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윤 훈장님, 임무는 막중한데 길은 아직도 머네요!”
“하하,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지 않습니까.”
계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고, 윤재성도 계연에게 차를 따른 뒤 다른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윤 훈장님, 대정국의 제위는 진왕과 오왕 중 누가 이을 것 같습니까?”
윤재성은 그의 말에 허를 찔린 듯, 곧 실소를 터뜨렸다.
“계 선생님도 그런 질문을 하시네요. 비록 선생님이 신묘하긴 하시지만, 이번만큼은 제가 더 명확한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도성에 도착한 바로 그날, 이미 누가 다음 대 황제가 될지 알게 되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디 내기나 한번 해볼까요?”
계연이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황궁의 어서방 안에서 원덕제는 기다란 의자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등잔의 불빛이 어서방을 밝게 비추었다. 나이 든 황제는 무척 드물게도 이 시간까지 서책을 읽던 중이었다.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간만에 정신이 또렷해 보였다.
잠시 후, 원덕제를 가장 오래 모시고 있는 늙은 태감 중 하나가 서신을 손에 든 채 어서방으로 들어왔다.
“폐하, 전(錢) 통령(統領)이 보내온 서신입니다.”
황제는 태감을 한 번 보았고, 이에 태감은 즉각 그의 뜻을 알아듣고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신을 펼쳐 황제의 눈앞에 갖다 대었다.
황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신을 읽더니, 태양혈 부근을 문질렀다.
“하! 하하…… 하하하하…….”
원덕제가 돌연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