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유일한 기회 (1)
그로부터 일각(*15분쯤) 뒤, 늙은 태감은 어린 태감들과 시위들을 이끌고 어딘가를 향해 다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황궁의 어느 곁채에서는 태감 하나가 기다란 의자에 누워 설탕에 절인 과일과 함께 차를 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춘궁부회(春宮浮繪)>라는 이름의 춘화첩이 들려있었다.
이때 밖에서 ‘똑똑’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요.”
밖에 있던 태감이 이렇게 대답하며 옆에 있던 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어린 태감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오, 이 공공! 어쩐 일이오?”
방 안에 있던 태감은 그가 들어온 것을 보고 급히 의자에서 내려와 맞이했다. 그들 두 사람은 원덕제를 오래 모신 환관이었는데, 그보다는 이 공공이 훨씬 더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한(韓) 공공, 폐하께서 공공이 오랜 세월 시중을 든 것을 떠올리시고는, 특별히 상을 내리라 분부했소. 자네도 알다시피, 폐하께서 이렇게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실 때는 감히 잠시도 지체할 수 없지. 그래서 내가 직접 전해주기 위해 왔소.”
“오, 폐하께서 아직도 이 늙은이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어서 들어오시오, 이 공공. 무슨 상을 내리셨으려나?”
태감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 공공 곁에 서 있던 어린 태감은 나무로 된 받침대를 들고 있었는데, 위에는 붉은 비단이 덮였고 그 밑에 불쑥 솟아 있는 것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공공은 웃으며 약간 비켜선 뒤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내리신 물건이니, 한 공공이 직접 열어 보시지요.”
한씨 성의 늙은 태감은 이 공공을 보며 잠시 눈썹을 찡그리더니, 곧 웃음을 띠고는 앞으로 나섰다.
붉은 비단을 열어젖힌 순간, 그의 오른손이 크게 떨렸다. 그 안에 놓인 것은 흰 비단 끈과 술주전자였다.
붉은 비단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한씨 성의 태감은 이미 얼굴에 핏기가 가신 상태였다. 이제 그의 오른손은 물론이고 어느새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이 공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곧 시위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꿇어앉았다.
이 공공은 그를 바라보며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공공, 폐하께서 자네가 오랜 세월 시중을 든 점을 참작하시어, 흰 비단 하나와 독주를 내리셨소. 그러니 편하신 대로 고르시오. 왜 이런 상을 받게 되었는지는 스스로가 더 잘 알겠지.”
“허윽……. 허……!”
바닥에 주저앉은 태감은 어린 태감이 든 쟁반을 보며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아닐세! 나는 폐하를 뵈어야겠소! 폐하를 뵙게 해주시오! 나는 죽기 싫소, 죽기 싫어…… 제발 폐하께 한마디만 전해 주시오! 이렇게 부탁하겠소! 오랜 세월 함께 일한 정을 봐서라도 제발…….”
그는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기어가 이 공공의 다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상대방은 가볍게 그의 팔을 피했다. 한씨 성의 태감은 온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공공은 혹여 그것이 옷에 묻어 성상의 눈을 더럽힐까 꺼렸다.
“한 공공, 폐하가 어떤 분이신지 이미 잘 아시지 않소?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한 것이오? 보아하니 공공 스스로는 비단 끈을 쓰지는 않을 듯싶구려. 여봐라, 한 공공께 술을 드려라!”
무공이 뛰어난 시위들이 방 안으로 들어와, 독수리가 병아리를 잡아채듯 태감을 바닥에 눌러 앉혔다. 그러자 시위 하나가 그의 아래턱을 쥐어 강제로 입을 열었다.
다른 시위 한 명은 술주전자를 가져와 곧바로 그의 입에 입구를 대고 술을 쏟아부었다.
“으…… 우억…… 읍…….”
한 태감은 손발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를 붙잡고 있는 시위들의 힘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독주를 입안에 모두 부은 시위는 그가 행여나 토를 할까 봐, 턱을 닫은 후 다시 열지 못하도록 막았다.
태감의 발버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고, 태감은 호흡을 몇 번 내쉰 뒤 결국 숨이 끊어졌다.
시위들은 그제야 태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쿠르릉……!
돌연 번개가 번쩍이며 바닥에 누운 태감의 얼굴을 밝게 비추자, 입가에 낀 보랏빛 거품과 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두 눈은 여전히 부릅뜬 채였다.
벌써 여러 날째 하늘은 음침하니 어두웠으나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오늘 밤 울려 퍼진 이 소리는 사람들이 며칠 만에 들은 천둥소리였다.
밤에 별안간 시작된 벼락 떨어지는 소리로 인해 잠에서 깬 도성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그중에는 오왕과 진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공공이 어서방에 돌아왔을 때, 황제는 침상에 누워 얇은 비단 이불을 덮고 있었고 궁녀 하나가 그의 이마를 문지르는 중이었다.
어서방에 들어온 늙은 태감은 발걸음 소리를 낮추고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서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한백산(韓柏山)을 잘 처리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황제는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휘휘 저어 곁에 있던 궁녀를 멀리 물러나도록 했다.
“음, 사람을 시켜 책상 위에 있는 밀지(密旨)를 각각 전균극(錢均克)과 유한(兪寒)에게 보내라. 그리고 해야 할 일만 하되,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 없다 전해라.”
태감은 어서방 책상 위에 놓인 비단으로 감싼 성지 두 개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하지만 그는 감히 황제의 생각을 추측할 수 없었으므로, 허리를 굽혀 절한 뒤 성지를 들고 나왔다.
경기부의 가장 큰 역관의 별채 안에서, 윤재성은 계연과 그의 둘째 아들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위무외의 아들인 위원생의 천재적인 총명함과는 달리, 이제 세 살이 된 윤재성의 둘째 아들은 좀 더 평범한 아이에 가까웠다. 똑똑하긴 했으나 그 나이대의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아이의 아명(兒名)조차 흔하디흔한 ‘호아(虎兒)’였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계연과 윤재성은 마침 대화를 멈추었다. 방금 윤재성과 한 내기 때문인지, 계연은 천둥소리를 듣고 무언가 감응을 받았다. 이에 창밖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접어 점을 쳐본 그는,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내기에서 좀 더 유리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윤재성은 계연이 눈썹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그가 무언가를 눈치챘음을 알았다.
“왜 그러세요? 무언가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설마 제 아들의 아명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계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호아와는 무관한 일이에요. 우리 둘의 내기와 관련이 있는 일이었어요. 윤 훈장님도 곧 알게 될 거예요.”
다음 날은 본래 조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원덕제의 건강 문제로 결국 취소되었다.
그날 오후, 오왕부에 있던 양경은 대경실색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정말, 정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오왕은 대청에 앉아 이리저리 초조하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세한 땀방울이 차올라 평소의 냉정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하, 부디 진정하십시오!”
“맞습니다, 지금은 절대 눈에 띄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왕은 자신의 저택에 모인 대신과 막료들에게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백산이 어젯밤 실수로 우물에 빠졌다고 하오. 그러나 본왕은 그가 사실 독주를 마시고 죽은 것을 알고 있소. 이는 부황께서 그자가 본왕과 관련되어 있음을 아시고 죽인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본왕이 어찌 침착할 수 있겠소, 부황의 성정에……!”
대청에 모인 이들은 모두 오왕이 무척 신임하는 심복들이었다. 오왕은 황망히 이렇게 말을 잇다가 돌연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안 됩니다! 전하, 절대로 안 됩니다!”
오왕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이 든 대신 하나가 일어나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오왕의 말뜻을 알아듣고 모두 그를 말리려 했다.
“전하, 장(章)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품기 좋은 때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전하. 황상께서 이미 그 일을 알게 되셨으니, 이번에 움직인다면 성공할 확률이 무척 희박합니다!”
“하!”
오왕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성공할 확률이 낮다 해도 어쨌든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소. 부황은 이미 본왕이 심어둔 눈들을 끊어내기 시작했소. 본왕이 들고 일어날 힘조차 잃기 전에, 모든 것이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오? 만약 궁중에 심어둔 자들이 없었다면, 지금도 나는 한백산의 죽음의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후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어찌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한번 해볼 만한 힘이 있지 않소…….”
“맞습니다. 전하께서 거사를 일으키려 하신다면, 저희는 모두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제 뜻도 그러합니다!”
몇몇 무신들이 들고일어나 이렇게 소리쳤다.
“전하! 소신의 말씀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조금 전 오왕을 말렸던 문하성의 그 노신(老臣)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사위가 일제히 조용해졌다. 초조한 오왕은 애써 노기를 억누르려 했으나 안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왕 전하, 한 공공과 비교했을 때 궁중에 있는 다른 이들은 얼마나 깊이 숨어 있습니까?”
오왕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하, 소신이 무엄하게도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한백산이 죽은 것은 폐하께서 일부러 전하께 경고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한 공공의 모든 행적을 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면, 전하께서 심어놓은 다른 이들도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오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는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전하, 우선 침착하시고 절대로 이 시기에 거사를 일으켜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번 일만 조용히 넘길 수 있다면, 저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기회라니?”
“말을 좀 명확하게 해주시오!”
노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재촉하듯이 되물었고, 그 중 좀 더 총명한 이들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나 노신은 그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정중하게 오왕을 향해 읍한 뒤 이렇게 말했다.
“오왕 전하, 지금 저희에게는 단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바로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헛된 생각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전하!”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이 앞으로 나와 노신의 말에 찬성을 표했다. 오왕도 결코 아둔한 자가 아니었지만, 당사자로서 도저히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기가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도 저자의 말이 옳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아무래도 불안감과 초조함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왕은 자기 자신을 다그쳐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좋소! 그럼 본왕은 기다리겠소.”
이날 오후 진왕부에서는 심복들과 함께 있던 진왕이 지난 밤 궁중에서 한백산이 ‘실족사’한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만 진왕 쪽에서는 사실 한백산이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황궁에 심어둔 자가 없다고 해서 상황을 추측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목서를 비롯한 진왕 본인도 한백산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왕이 다급히 심복들을 왕부로 소집하였다는 소식을 받기도 했다. 비록 그자들이 모두 비밀리에 저택을 나섰다지만, 그래도 진왕이 심어둔 정탐꾼들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