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유일한 기회 (2)
“이 공께서 하신 말씀은, 한백산이 실은 오왕 전하가 폐하의 곁에 심어둔 자라는 말씀입니까?”
초씨 집안 가주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오왕 전하는 정말 담이 크시군요. 감히 천자의 측근에게까지 손을 뻗치다니요.”
“내 큰형님은 항상 그러했지.”
진왕은 약간 다른 생각에 잠겨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모인 이들 중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왕 전하 쪽에서는 분명 불안에 떨고 있을 게 아닙니까? 어쩌면 무언가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오왕 전하의 손은 금군과 장건영(章建營), 남군(南軍)에까지 뻗어 있으니 만약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면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이목서는 고개를 저은 뒤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한백산을 제거하셨다면, 모든 것은 이미 폐하의 손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오왕께서 금군과 엮여있다는 것을 이미 아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은 얼마나 강하게 그들을 처벌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경고만 하고 끝내실 참인지, 아니면 아예 뿌리를 뽑으실 것인지…….”
그러자 초씨 집안 가주는 이목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왕 전하께서 거사를 일으키셔도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성격으로 볼 때, 궁지에 몰리면 죽음을 각오하고 한번 싸워보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목서는 막 그에게 대답하려 하려다가, 진왕이 지금까지 다른 데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하,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 기색입니까?”
진왕은 자신의 스승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좋은 소식이지요…….”
진왕은 미소를 순간적으로 거두면서 이렇게 물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황께서는 아직도 보위를 큰형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실까요?”
“그런……!”
“혹여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습니까?”
진왕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마침 그해에 상서로운 징조가 내려앉았던 화원이었다.
“하하, 그냥 그렇다고 가정을 하는 겁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막다른 구석에 내몰렸었지만, 이번 일로 작은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어 진왕은 몸을 돌려 이목서에게 말했다.
“스승님, 제 생각에 형님은 분명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만약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거든, 우리가 나서서 등을 밀어주면 되지요!”
“전하…….”
“스승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번 한 번뿐입니다. 유일한 기회입니다. 담력과 지모(智謀)로는 저도 형님에게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이목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과 우려를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전하……. 만약 그 추측이 잘못되었다면, 저희는…….”
그의 말을 듣고 초씨 집안 가주와 참사를 비롯한 이들의 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진왕마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진왕은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쥐며 이렇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운을 걸고 하는 큰 도박입니다. 부디 저를 믿어 주십시오!”
우르릉……!
돌연 천둥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번개가 내리치며 진왕의 창백한 얼굴을 밝게 비췄다.
솨아아……!
빗방울이 점차 거세지더니, 어젯밤부터 시작되었던 비의 조짐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며 쏟아 내렸다. 길조가 내렸던 화원의 화초들도 세차게 두드리는 빗방울을 맞고 몸을 숙였다.
옛말에 가을비가 내리면 추워진다더니, 과연 비가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경기부 백성들은 기온이 떨어진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언제나 그의 적수라는 말처럼, 오왕은 결코 진왕을 얕보지 않았다. 비록 황제의 건강이 나빠진 후로 진왕은 줄곧 조용히 몸을 사려왔지만, 그런데도 오왕은 셋째 아우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왕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왕이 조정에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애쓰는 것과 반대로, 진왕은 대부분의 인력과 시간을 자신의 큰형을 경계하는 데에 썼다. 왜냐면 조정 대신들을 포섭하는 데에 있어 그는 오왕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진왕은 눈에 띄는 어떠한 특별한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황위 다툼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에게 오는 법이다. 비록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쥔 것은 아니었지만, 진왕은 참모들과 분석한 결과에 따라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뒤이어 진왕은 비밀리에 명령을 하달하여, 무공이 뛰어나고 신체가 민첩한 고수들을 비를 방패 삼아 은밀히 왕부에서 내보냈다.
그는 오왕의 곁에 있는 이들을 뒤흔드는 것 말고도,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확실히 없애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의 목표는 오왕을 조급하게 만들어 모반을 일으킬 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오왕이 자신의 원래 추측대로 일을 벌인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나서서 등을 밀어줄 생각이었다.
깊은 밤이 되어도 장대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진왕부 대문 앞에서 진왕 양호와 소사 이목서는 우산을 든 하인이 따르는 가운데 함께 마차에 올랐다.
“황궁으로 가자.”
진왕은 이목서를 부축해 마차에 함께 자리를 잡은 다음, 마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뒤로 시위들이 따르는 가운데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시각, 원덕제는 어서방에서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적힌 잡서를 읽는 중이었다.
비록 눈이 책을 향해 있기는 했지만, 황제는 사실 조정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왕이 벌인 일에 원덕제는 큰 실망을 느꼈다. 그래서 원래는 중양절이 지나면 황위를 물려줄 것을 선포하려 했지만, 잠시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때 태감이 들어와 낮은 소리로 이렇게 고했다.
“폐하, 진왕 전하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음? 이리 늦은 시각에 말이냐? 무얼 하러 왔다더냐?”
“그것이, 폐하께 안부를 물으러 오셨다 합니다.”
황제가 눈썹을 찡그리며 서책을 내려놓자, 이 공공은 다급히 황제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여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러자 곁에 있던 궁녀는 황제의 등 뒤에 베개를 몇 개 받쳐 놓았다.
“들라 해라.”
태감은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진왕 양호를 이끌고 어서방으로 돌아왔다.
“소자 부황께 안부를 여쭈러 왔습니다!”
진왕은 안에 들자마자, 공손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일어나라.”
바닥에 앉아 있던 진왕은 고개를 들어 미소 짓더니 몸을 일으켰다.
“별일이로구나. 어쩐 일로 입궁하여 내 안부를 묻는 것이냐? 앉거라.”
황제는 농담을 던지듯 이렇게 물었다. 황자들은 각자의 왕부로 출궁한 뒤 누구도 저녁에는 안부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물론 황제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부황!”
곁에 있던 태감이 의자를 가져오자 진왕은 그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는 소자가 부황이 두려워 오지 못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래도 자주 안부를 여쭙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옛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목서는? 그자는 네 그림자 같은 존재인데, 어찌 함께 오지 않았지?”
“스승님께서는 마차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고작 소사가 감히 어서방에 들어 용안을 뵐 수 없다 하셨습니다.”
“하…….”
황제는 이렇게 웃은 뒤 연탑(*軟榻: 휴식을 취할 때 사용하던 좁고 긴 의자) 곁에 놓인 작은 탁자에서 말린 과일을 집어 진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궁녀가 재빨리 쟁반을 받쳐 들고 그것을 진왕에게 전달했다.
이에 진왕도 사양하지 않고 말린 과일 몇 점을 집어 먹었다. 그러고도 입에 쑤셔 넣고 남은 것은 다른 손으로 가득 쥐었다.
“어찌 그러느냐? 진왕부에는 먹을 게 없느냐?”
황제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진왕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부끄럽지만 이는 어서방에서 직접 부황께 하사받은 것이니, 제 왕부에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조금 가져가 스승님께도 맛보여 드리려 합니다.”
황제는 아래위로 진왕을 살펴보며 물었다.
“자주 안부를 여쭈러 오겠다니, 짐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이후에는 기회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냐?”
보통의 대신들이라면 그런 말을 듣고 놀라 안색이 창백해지며 다급히 변명해보려 하겠지만, 진왕은 오히려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슬픔에 잠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황께서 하신 말씀이, 실은 소자가 생각하던 바와 같습니다. 모두 제왕의 집안에는 정이 없다 하지만, 실은 어렸을 때 부황께서 소자를 높이 들어 올려 공중에 몇 번이고 띄워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노인으로서, 이토록 깊은 정이 느껴지는 진왕의 말을 듣고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황제는 보기 드물게도 진왕의 말을 끊지 않고 그가 추억에 잠겨 말을 잇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이가 드니 두려운 것도 많아져, 소자 오랫동안 부황의 곁에서 이리 많은 말을 해본 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진왕은 그가 왕부를 세우고 출궁한 뒤의 날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가 말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들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곧 씁쓸하기도 하고 애틋한 느낌이 들어, 자신이 앉은 연탑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와서 앉거라.”
진왕은 입을 몇 번 움직이다가, 곧 몸을 일으켰으나 차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어찌 그러느냐? 두려운 것이냐? 어릴 때는 내 옆에 곧잘 앉지 않았더냐!”
황제가 이렇게 말하자 진왕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손안에 쥐고 있던 말린 과일을 잘 갈무리한 후 연탑으로 걸어갔다. 푹신한 연탑은 오래전 기억 속의 느낌과 똑같았다.
그들은 마땅히 나눌 만한 화제가 없어, 진왕이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심지어 임 귀비를 불러들이기도 했다.
어느새 시각이 꽤 늦어졌고,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위 쟁탈에 관련된 화제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조정과 관련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부황,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시지요. 소자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진왕은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호아(浩兒), 네가 매일 와서 이렇게 오래 떠들면 부황께서 얼마나 피곤해하시겠느냐!”
임 귀비는 눈썹을 찡그리며 아들을 꾸짖었다.
“하하, 짐은 괜찮소. 오고 싶으면 오거라!”
진왕은 웃으며 임 귀비와 부황에게 두 손을 모아 읍했다.
“안심하십시오, 어마마마. 소자는 그저 안부를 여쭐 뿐이옵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호아! 어찌 그런 말을!”
임 귀비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즉시 노기 어린 얼굴로 아들을 꾸짖은 다음, 황제를 향해 죄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황상, 호아가 일부러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저 아이는…….”
“되었소, 되었소. 짐은 괜찮소.”
황제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오늘 밤 기분이 꽤 좋았고 어차피 진왕의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