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금갑을 입은 역사(力士)
계연의 정신력은 강했지만, 이렇게 상상력과 섬세한 공정이 동시에 필요한 작업을 처음 하다 보니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대략 90장째의 종이 인형이 완성되려던 때, 종이를 자르며 구결을 외우던 계연이 ‘아차’ 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종이는 아직 완전히 잘리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종이 인형의 형태는 정해졌으나 정신이 불완전한 상태였다.
화르르!
계연이 들고 있던 종이를 비롯해 소쿠리 안에 들어있던 89장의 종이 인형들에 불이 붙더니 삽시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호운은 깜짝 놀랐다.
“아, 내가 급했군!”
계연이 이렇게 탄식하며 손을 털자 탁자 위의 모든 재가 날아가 버렸다.
그때 마침내 질문할 기회를 잡은 호운이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방금 외우신 그건 무슨 술법인가요? 이 종이 인형으로 도대체 무얼 하려고 하시는 건데요? 보아하니 모두 싸움을 하는 듯한 동작이던데, 이걸로 그림자놀이라도 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왜 모두 재로 타버렸죠?”
“말이 많구나.”
계연은 이렇게 일갈하고는 다시 두 번째 시도를 시작했다. 이때는 일의 효율이 좀 더 높아져서, 108개의 종이 인형을 오려내기까지 채 두 시진(*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술법을 완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따르다 보니, 계연은 자연스레 이 술법의 정수(精髓)를 깨우치게 되었다.
사실 계연은 도행이 부족했던 두장생과 그의 사부가 알지 못했던 이 술법의 치명적인 오류들을 몇 가지 고친 후였다. 칙령을 이용해 이 술법에 더욱 깊이 파고들자 몇 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장생과 세상을 떠난 그의 사부의 창의성, 이 술법의 대략적인 윤곽은 매우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연의 손을 거치고 난 술법은 질적으로 크게 변했다고 할 수 있었다.
두장생과 그의 사부가 그들의 극한을 쏟아부어 이 술법을 완성했다고 해서 계연의 능력이 그들과 비슷하리란 법은 없었다. 계연은 계속해서 종이 인형을 오리면서 조금도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황혼이 시작될 무렵, 계연은 드디어 가위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단번에 324개의 종이 인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계연은 스스로 뒷자리 두 숫자는 ‘보진(補眞)’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의(眞意)를 보충한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재치와 낭만을 더해 ‘보정(*補幀: 중국어로는 보진과 발음이 같음. 정(幀)은 그림이나 족자를 셀 때 쓰이는 말로, 우리말로는 폭이라고 불림)’이라고도 불렀다.
법력은 둘째치고 뒤로 갈수록 심력의 소모가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연결되어야 하기에, 계연은 멈추지 못하고 324개나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한계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더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지금까지 오려낸 종이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연은 종이 인형의 개수가 3의 배수에 달하자 과감히 손을 털었다.
3백여 장의 종이 인형이 층층이 계연의 손바닥 위에 쌓이자, 자세는 모두 다르나 그 머리 형태만은 똑같은 모든 종이 인형이 드러났다.
계연의 곁에 앉은 호운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쪽을 집중하여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이럴 때가 다 있구나.’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계연은 잘라낸 종이들을 손바닥 사이에 넣고 두 손을 마주 대었다.
한순간 호운의 눈에는 계 선생님의 손바닥에서 황색 빛무리가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빛이 나는 미세한 가루들이 계 선생님의 손가락 틈에서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계연의 두 손바닥 사이에 있던 종이들의 부피가 줄어들었다. 이제 계연의 모습은 마치 합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온몸이 탁자 위에 올라온 채로 코가 자신의 손바닥에 닿을 듯한 여우를 보며 계연은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어! 한 장밖에 안 남았어요! 그 종이들이 다 어디로 갔죠?”
호운은 탁자 위아래를 살펴보더니 다시 계연의 손바닥을 보며 물었다.
“계 선생님, 그 종이 인형들이 모두 한 장으로 합쳐진 거죠?”
“하하, 맞혔구나.”
종이 인형이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자 계연은 기분이 좋아졌다.
종이 인형의 얼굴은 얼핏 보통 종이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옅은 윤곽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계 선생님, 이게 무슨 술법인가요? 어디에 쓸 수 있나요?”
호운은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계연의 어깨에 앉은 종이학과 그의 손안에 들린 신기한 종이 인형을 번갈아 바라보며, 계 선생님은 어쩌면 종이를 갖고 노는 것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술법이 완성되려면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있었다. 계연은 종이 인형의 머리 부분에 손끝을 대고서, 손톱과 맞닿은 부분에서 피 한 방울을 짜냈다.
그는 그렇게 솟아난 핏방울을 노란 종이 위에 떨어뜨린 다음 이렇게 대답했다.
“별로 큰 쓸모는 없고, 힘이 좀 셀 뿐이야.”
“힘이요? 종이 인형이요?”
호운은 계 선생님의 피 한 방울을 흡수하고도 전혀 색이 변하지 않은 종이 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래, 차이가 크기는 하지만 이 술법은 일종의 부적과 비슷한 원리란다. 만든 이가 소환하기만 하면 금갑(*金甲: 금속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역사(力士)가 모습을 드러내지.”
이렇게 말한 계연은 여우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잘 보렴.”
계연은 종이 인형을 눈앞에 들고서 그 안에 법력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앞으로 종이 인형을 던져 땅으로 떨어뜨렸다.
“역사(力士)는 모습을 드러내라.”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종이가 아직 땅에 닿지 않았음에도 반짝이는 누런 연기가 모여들더니 그 안에서 어렴풋한 인영(人影)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빛을 내뿜는 연기가 사라지자 그 안에서 체격이 우람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금속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서 같은 재질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는데, 그의 몸 앞뒤로는 황색 비단 끈이 휘날리고 있었고 그의 키는 계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다. 역사의 얼굴에는 불그스름하고 곱슬곱슬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어, 계연이 그의 곁에 서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연기 속에서 나타난 거한(巨漢)은 계연을 향해 손을 모아쥐고 허리를 구부린 뒤, 낮고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여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계연의 뒤로 몸을 숨기더니 앞발을 뻗어 역사 쪽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물었다.
“계, 계 선생님……. 저건 종이로 만든 사람인가요? 사, 살아 움직이다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어. 내가 말했다시피 힘도 좋고 말도 잘 듣지만, 조금 멍청해. 그래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람이 있단다.”
계연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금갑을 입은 역사(力士)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더니 기립한 자세를 유지했다.
호운은 호흡을 진정시키고 계연의 몸 뒤편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거대한 역사(力士)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호운은 앞발을 뻗어 갑옷을 두드려 보았다.
딩딩……!
마치 합금(合金)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이건 종이가 아니지요?”
“네 생각엔 어떤 것 같니?”
호운은 고개를 들어 역사(力士)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여전히 어떤 동작도 취하지 않았고 호운을 마주 쳐다보지도 않았다.
‘와, 너무 멋있어!’
“정말 위풍당당하지 않니?”
계연이 호운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렇게 묻자, 여우는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머리도 정말 크네요. 육 산군도 한 방에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아요.”
호운은 금갑을 입은 역사(力士)를 보다가 다시 계연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계 선생님조차 이렇게 큰 몸집의 역사(力士)는 이기지 못할 거라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역사(力士)를 불러낸 것이 계 선생님이니 역시 계 선생님이 더 세다고 결론지었다.
그러자 계연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육 산군이 이 역사(力士)의 내력만 알게 되면 그리 고명한 수단을 쓸 필요도 없을걸. 간단한 장난 한 번으로도 저 역사(力士)를 쩔쩔매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계연은 눈썹을 문지르며 피곤한 눈을 풀어주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두장생과 그의 사부의 미미한 도행으로 이것을 6장이나 만들어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사용한 것은 계연이 손을 보기 전의 술법이었다. 비록 108장의 종이일 뿐이지만, 그 한 장 한 장에는 그들의 피땀이 배어 있던 것이다.
탁자 위의 종이와 공구들을 정리한 다음, 계연은 다시 소쿠리를 들고 방 안으로 향했다.
호운은 가만히 서 있는 역사(力士)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계연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계 선생님, 이 술법을 금갑 역사 부적(金甲力士神符)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계연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 있는 거대한 역사를 바라보며 여우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불러도 되겠다. 아니면 황건(黃巾) 역사라고 불러도 되고…….”
여우는 문밖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어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거한이 입고 있는 갑옷의 앞뒤로 황색 천이 달린 것이 보였다.
“왜 홍건(紅巾)이 아니에요? 저는 빨간색이 좋아요. 제 털 색깔처럼요. 얼마나 예쁜데요!”
이렇게 말하며 호운은 바깥의 거한을 향해 자신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호운의 온몸은 다른 색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불타는 듯한 붉은 털로 뒤덮여 있어 확실히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금갑을 입은 거한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전방의 텅 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계연은 호운의 우스갯소리를 귀찮아하지 않고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황색은 현묘한 색이야. 이 노란 종이들도 보통 종이가 아니라 아주 조금이지만 땅의 영기를 담고 있어. 그러니 땅의 순박하고 장엄한 기운을 가진 데다 그 성격과 형체를 마음껏 빚을 수도 있지. 땅으로부터 힘이 생겨난다는 말처럼, 역사는 저 대지(大地)에 묶여 있는 존재야. 법력만 고갈되지 않는다면 역사의 힘은 무궁무진하단다.”
그러자 금갑을 입은 역사(力士)는 마치 계연에게서 모종의 명을 받은 것처럼 천천히 주먹을 모아쥐더니, 돌연 아무것도 없는 전방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펑!
금갑 역사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자 주위의 기류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솨아아…… 솨아아……!
그 공기의 흐름으로 인해 만들어진 바람이 대추나무의 가지 하나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러자 나뭇잎 위에 얇게 쌓여있던 눈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호운은 멍하니 넋을 잃고서 그 장면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동시에, 호운은 계 선생님이 방금 한 말에서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럼 저 역사(力士)의 두 발이 공중에 뜨게 되면 몹시 약해지겠네요?”
호운이 무심코 물은 한마디에 계연도 잠시 당황했다. 계연은 여전히 바깥의 역사를 주시하고 있는 여우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 그대로야. 역사(力士)의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술법을 펼친 사람이 소환할 때 주었던 법력밖에 남지 않게 되어 역사(力士)는 모든 힘을 잃게 될 거야. 그러면 자연히 힘도 약해지고 그것을 오래 쓸 수도 없겠지. 그게 이 술법의 약점이야.”
계연은 말을 잠시 멈추더니 소쿠리를 내려놓고서 다시 문가로 돌아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역사(力士)가 땅을 밟고 서 있다면, 그를 들어 올리기 쉽지 않을걸. 음, 이 일은 아무한테나 가서 발설하면 안 된다. 알겠니?”
호운은 누구의 접근도 허락지 않는 무서운 기세의 역사(力士)를 쳐다보며, 계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붉은 여우는 자신이 저 역사(力士)를 위풍당당하게 부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으므로, 계 선생님이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더라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