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대정 밖을 거닐다
오후에 나눈 대화를 통해 계연은 옥회산의 많은 진인(眞人)들이 더는 이전처럼 산에만 머물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용왕 응굉이 옥회산과의 오래된 원한을 내려놓았으니, 더는 꺼릴 것이 없기도 했다.
게다가 천기각의 점괘로 인해, 옥회산에서는 마침 이 시기가 운을 타기에 좋은 때라고 여겼다. 이에 많은 수선자가 산을 나서거나 문하의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그들은 대정국에 국한하지 않고 운주(雲洲) 전체를 유람했다. 실력을 닦는 동시에 자질이 뛰어난 이들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계연이 생각하던 바에 따르면, 운주의 형세는 대정국을 제외하면 모두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요괴, 마귀, 선인, 신령, 사람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대정국에서 연이어 발생한 일들로 인해 계연은 운주 전체에 뿌연 흙먼지가 덮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대정국만 제외한 지역 전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옥회산의 배 진인이 천기각에서 심혈을 쏟아부어 다른 수선자들과 함께 점을 친 일로 계연은 좀 더 다른 시각을 얻게 되었다.
이곳은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므로, 천하의 각기 다른 존재들이 아무리 무위(無爲)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욕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흉악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을 진데, 은원(恩怨)과 애증(愛憎)은 사람에게만 있고 신선이라고 없겠는가? 이렇게 광활한 땅에 혼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다른 주(洲)는 운주보다 더 복잡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계연은 자신이 바둑을 두는 자로서 대국조차 읽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러니 바둑판을 통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실의에 잠기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추(*門樞: 문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물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계연이 방문을 열었다.
바깥의 달빛이 점차 문틈을 통해 새어 들어오다가, 계연의 얼굴을 비추고는 방 안을 모두 환하게 비추었다.
계연의 모호한 시야에 정원의 화초들이 얕게 쌓인 눈을 힘겹게 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계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느끼고, 침상 곁에 기대 있는 넝쿨검이 비스듬히 날아왔다.
선검은 이전처럼 조용히 계연의 뒤에 서지 않고, 곧바로 그의 눈앞으로 날아갔다.
선검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계연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우웅……!
그러자 넝쿨검이 약하게 떨리며 검집과 손잡이 위의 넝쿨이 물을 머금은 듯이 짙푸르게 변했다. 선검에게서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동시에 새해의 기운을 흡수해 봄의 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검은 이것으로 주인의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듯했다.
“3척(*약 90cm)의 푸른 검 끝에는 살기가 숨겨져 있지만, 동시에 생기를 품고 있구나. 마치 음양(陰陽)이 맞닿아 있고, 바둑돌에도 흑백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계연은 검을 쥐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살짝 돌려 검집의 날카로운 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검집이 아무런 잎도 달려 있지 않은 꽃 가지에 닿은 순간, 마치 수면에 닿은 것처럼 형체 없는 파문이 일었다. 그러자 넝쿨검이 가진 봄의 생기에 의해 가지에는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단 몇 초 만에 꽃봉오리 세 개가 여물더니, 곧이어 꽃망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만물에는 스스로 더 진보하려는 욕구가 있어. 이 마른 나뭇가지조차 봄기운을 재빨리 흡수하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추운 겨울에는 꽃을 피울 수 없으니,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다투듯 피어나는 거지. 이렇게 홀로 아름다움을 뽐내더라도 결국 덧없이 사라질 뿐이야.”
계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자조하듯 웃었다.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너무 적어. 알지도 못하는데 어찌 돌을 놓을 것이며, 돌을 놓지 않으면 또 어찌 대국을 이어야 하지?”
계연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은 일종의 자기 위로였다. 많은 사람 눈에 그는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인이었으나, 실은 그도 두려움과 좌절을 느꼈다. 어떤 것들은 차마 혼잣말로도 중얼거릴 수 없었다.
대정국 밖의 세계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그간 대정국의 형세가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실은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지난 생 어렸을 때는 나도 높은 목표와 꿈이 있었지만, 자라며 사회생활을 거쳐 그것이 점차 깎여 나갔지. 지금 이 상황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거야!’
최근 대정국의 국운(國運)은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계연의 도행도 다른 이들이 보는 것만큼 진선(眞仙)의 수준에는 다다르지는 못했으나, 십여 년간의 수행 끝에 독특하고 신통한 술법 몇 가지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넝쿨검도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의 능력이면 어디서 곤란에 처하진 않을 듯했다.
‘너무 큰 부담을 갖거나 결과를 얻으려 하지 말고, 일단 한번 부딪혀보자. 여러 나라의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기만 해도 좋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계연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려 계연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관화가 이미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상의의의 방 안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원래는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계연이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은 이미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닭이 홰치는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어느새 밤이 지난 것이다.
계연이 장검을 손에 들고 화원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관화는 다급히 공수했다.
“계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좋은 아침이구나!”
계연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방으로 돌아갔다. 관화가 확실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 보다는 확실히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계연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 관화는 호기심에 화원 가까이 걸어갔다.
“사형, 뭐 해요?”
상의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관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서 와서 봐봐, 여기에 꽃이 피려고 해.”
상의의는 그의 말을 듣고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과연 가지에 잎이 무성하고 꽃봉오리가 몇 개 달린 것이 보였다.
이런 일은 옥회산에서는 그다지 기이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특별한 환경이 아닌 데다, 이 꽃은 겨울에 피는 것도 아니었으니 누군가 도술을 부린 것이었다.
“계 선생님이 하신 거야.”
관화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구나.”
두 사람은 도행과 지식이 충분치 않아 잠시 꽃을 살펴본 뒤 금세 잊어버렸다. 만약 옥회산의 고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꽃이 나무의 영기를 자극해 피워낸 것이 아니라 봄기운에 의해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봄기운은 새해 본연의 기운이 아니라, 넝쿨검이 틔운 짙푸른 봄기운이었다. 게다가 계연이 하룻밤 새 얻은 깨달음이 담겨있기도 하여, 예전 진왕부에서 틔운 꽃송이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계연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위무외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자신이 이곳에 머무르면 위씨 가문의 범인(凡人)들부터 수선자들까지 모두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계연은 사실 새해를 어떻게 보내던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정도 이들과 시간을 보낸 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이날은 맑은 겨울 날씨였기 때문에, 태양이 일정한 각도에 오르자 햇빛이 위씨 가문 전체를 고르게 비췄다.
계연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씨 가문의 하인 두 명이 그가 머물던 방을 청소하기 위해 객사 근처에 나타났다.
“어어, 이것 좀 봐. 장미가 꽃을 피우려 하네!”
“어라! 정말이네!”
나무통과 걸레 등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은 회랑을 나와 화원 가까이 다가간 다음 자세히 살펴보았다.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꽃망울은 이미 꽤 벌어진 상태여서 곧 만개할 것만 같았다.
계연은 누군가에게 굳이 알리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첫째로는 위무외를 비롯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곧 대정을 떠날 수도 있다는 뜻을 이미 내비쳤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신의 행적을 뒤쫓기 어려운 편이 그에게 있어 좋은 점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곳에 일부러 들러 자신이 먼 길을 떠난다고 알리는 것이 약간 꾸며낸 듯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길을 떠나기 전 집에는 한 번 들를 생각이었다.
정월 초이튿날 오후, 계연은 이미 집에 돌아와 방 안에 놓인 책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비록 누군가에게 특별히 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거안소각에는 서신을 하나 남기고 갈 예정이었다.
글을 다 쓴 계연은 붓을 내려놓고서, 종이를 든 뒤 몇 번 털었다. 그러자 그 위에 흡수된 먹이 육안에 보이는 속도로 말라 갔다.
“흠, 이 정도면 되었겠지!”
계연이 남긴 것은 수십 자로 된 법령(法令)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계연을 찾아온다면 법령이 스스로 움직일 터였다. 이 서신을 보면 계연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대략 북쪽에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연은 서신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본 뒤 이물전신(以物傳神)의 술법은 쓰지 않고, 서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에 서신 위를 문진(文鎭)으로 고정해 두었다.
이 일을 마치고서 계연은 방에 있던 오래된 자물쇠 몇 개를 가지고 나와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잠갔다.
솨아…… 솨아아……!
정원에 있던 대추나무 잎들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계연은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넌 움직일 수도 없잖아. 초목(草木) 정괴들이 본래 형태를 벗어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야. 집 잘 지키고 있으렴.”
계연은 거안소각을 나서 대문을 자물쇠로 잠갔다. 그리고 일부러 우산을 손에 들고 보따리를 진 채 천우방 골목을 따라 밖으로 걸어갔다.
비록 계연이 최근 영안현에서의 존재감이 희미하긴 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존경하는 계 선생님의 존재를 절대 잊지 않았다. 그래서 계연은 매번 먼 길을 나설 때마다, 일부러 대로를 걸으며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이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천우방의 이웃들은 계연을 만나자 모두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계연이 우산과 보따리를 든 것을 보고는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고, 계연은 당연하게도 멀리 유람을 떠난다고 대답해 주었다.
계연이 천우방을 나오자 맞은편 길가에서 손기 노점이 여전히 영업 중인 것이 보였다. 손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근면해서, 새해 초이튿날인데도 나와서 장사를 한 듯했다.
그러나 계연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손수생(孫樹生)은 마침 노점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식탁의 의자 등을 정리해 수레의 앞에 쌓아 놓은 것을 보니 장사를 마무리한 것 같았다.
손수생은 손기의 작은아들로, 제 아비의 몸이 쇠약해진 후로 부친에게서 노점을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손기처럼 계연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계연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대번에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계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국수 드시러 오셨나요?”
손기의 가족들은 모두 계연이 혼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계연은 거의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노점에 와서 식사하고 갈 때가 많다는 것도 알았다.
비록 최근 계연의 발걸음이 뜸해지기는 했지만, 손기는 손수생에게 만약 계 선생님께서 오지 않으시더라도 항상 내장과 국수 한 그릇 분량을 남겨두라고 당부했었다.
“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보아하니 막 정리 중이신 것 같은데 아직 국수가 남았나요?”
계연은 그를 향해 공수한 뒤 이렇게 물었다.
손수생은 막 접으려던 작은 식탁을 내려놓고서, 어깨에 걸린 행주로 손을 닦은 뒤 웃으며 대답했다.
“있습니다! 양 내장하고 국수 모두 한 그릇 분량씩 남았어요. 불도 아직 안 껐는걸요. 드시고 싶으시면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그는 그제야 계연이 우산을 들고 등에 보따리를 진 것을 알아차린 듯이 이렇게 물었다.
“어디 먼 길 떠나시나요?”
“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멀리 가보려고요. 고맙지만 오늘은 안 먹을게요. 저 대신 손 어르신께 안부 전해 주세요.”
“네, 꼭 전해 드릴게요. 조심하세요, 선생님.”
계연은 이렇게 대답한 뒤 성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일부러 하늘을 날지 않고, 성 밖을 나서자마자 축지법을 쓰며 걸었다. 그는 이렇게 쭉 북쪽을 향해 걸으면서, 계주를 지나 제주(齊州)에 도착한 뒤 대정 국경을 나설 계획이었다.
이렇게 그는 꽤 오랜 시일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