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버려진 마을
대략 석 달 후, 회색 옷을 입은 계연은 홀로 황야의 수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여정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에 계연은 제주를 통해 대정국의 국경을 넘었다. 그 후로 계연은 속도를 조금 줄인 상태였다.
대정국의 정북방에는 두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하나는 연추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연량국이었고, 지금 계연이 있는 이곳은 조월국(祖越國)이었다. 조월국은 대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지역이 적지 않았고, 자연히 두 나라 사이에는 빈번한 마찰이 일어났다.
하지만 계연은 일단 변경의 수비가 삼엄한 지역을 지나면 조월국 국경 안쪽은 황폐한 지역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번 마을을 떠난 후 아주 오랫동안 인가(人家)나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계연은 황야의 수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적지 않은 곳이 모두 잡초로 뒤덮였으나, 길의 너비로 보건대 일부러 낸 도로인 것으로 보였다. 다만 행인이 아무도 없을 뿐이었다.
그때 계연은 길 한쪽에 있는 수풀이 좀 더 우거진 곳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이상하다고 여기고는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계연이 손을 뻗어 버석한 잎들을 거둬내자, 그 뒤에는 입었던 옷의 흔적이 남은 백골 두 구가 드러났다.
“다행히 내가 음식과 물이 필요가 없어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여기서 굶어 죽기 딱 좋겠네.”
저승에서 데려간 혼백이 되었든, 떠돌아다니는 넋이 되었든, 이 두 구의 백골에는 더는 어떤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이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도 알 수 없었으므로, 계연은 탄식을 한 번 뱉은 뒤 이곳을 떠났다.
다시 반나절이 지나고, 계연의 흐릿한 시야에 마침내 건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자 그는 저도 모르게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계연은 눈썹을 찡그렸다.
계연이 본 것은 그다지 작다고 할 수 없는 마을이었는데, 사람이나 불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는 거리가 멀어 그렇겠거니 하고 여겼지만, 거리가 가까워지고 코로 한껏 냄새를 맡아봐도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려진 것 같네.’
계연은 마을로 들어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적지 않은 가옥들이 부서져 있었고, 마을 앞뒤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개나 닭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하나 없었다.
마을 안을 거닐어도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계연은 더는 마을 깊이 들어가지 않고 왔던 길을 돌아와 커다란 저택 앞에 다다랐다.
이 가옥은 앞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우물 안에는 다행히 물이 있는 데다, 밧줄과 물통도 남아있었다. 게다가 건물도 그리 손상이 심하지 않아 바람과 비를 막기에 적당해 보였다.
끼익…… 끼익…….
그는 손을 바꿔 교대로 밧줄을 잡아당기며 우물물을 퍼 올렸다. 냄새를 맡아보니 별 이상이 없었고 다행히 어떤 불결한 기운도 없었다.
계연은 손으로 재차 물을 퍼서 꿀꺽꿀꺽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휴…… 여기는 대체……?”
한숨을 돌린 계연은 수십 미터 밖에 떨어진 작고 부서진 신당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마을에 세워진 토지 신당이었는데, 신령에게서 나는 빛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계연은 굳이 구신술을 이용해 토지신을 소환하려 하지 않았다.
황량한 곳에서는 해가 더 빨리 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연이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인데, 사위가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의 부서진 가옥에서 땔감을 주워 왔다. 오늘 밤은 이 마을에서 묵을 예정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지붕이 온전히 남아있는 곳이 좋을 듯했다. 왜냐하면 내일이 경칩(*驚蟄: 24절기 중 하나로 양력으로는 3월 5일경)인 데다 하늘을 보아하니 밤에 비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는 가져가기 좋은 기물은 하나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아궁이의 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청에 모닥불을 만들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이 마을을 지나던 누군가가 여기에 묵었던 듯했다.
주방의 지붕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으므로, 계연도 대청에 모닥불을 피웠다. 문짝은 창호지가 다 떨어져 나간 상태였지만, 그래도 문을 닫을 수는 있었다.
계연은 남아있는 걸상을 하나 찾아내서 모닥불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장작으로 가져온 나뭇가지에 말린 전병을 끼운 다음, 걸상 다리에 난 구멍에 꽂고 다른 한쪽은 모닥불 옆에다 들고 구웠다.
전병이 적당히 구워져 부드러워질 때까지, 계연은 서책을 손에 들고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서책은 오랫동안 읽지 않은 <외도전>이었는데, 비록 책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간 계속 수행을 닦다 보니 오늘은 이 책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졌다.
천둥소리가 울리자 계연은 고개를 들어 문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번개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내려꽂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올해 처음 치는 번개겠지?”
마치 계연의 혼잣말에 응답하듯 천둥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하지만 계연은 곧바로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겼다. 그의 귀에 천둥과 바람 소리 외에도 발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를 비롯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계연은 별안간 이 상황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가 비 오는 밤에 황량한 곳에서 묵고 있으면 꼭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에 사람의 기운이 들어차는 것이니 그에게 있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던 중, 계연은 돌연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모닥불 앞에 놓인 전병을 바라보니 전병이 탄 것은 아니었다.
황폐한 마을 밖에서는 일고여덟 명의 사람들이 말 두 필을 이끌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말 두 필 중 한 마리는 등 위에 짐을 가득 지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의 등 위에는 8, 9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가 올라타 있었다. 아이는 아직 마을 입구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렇게 소리쳤다.
“어르신, 마을에 사람이 있어요! 제가 불빛을 봤어요, 마을 안에 사람이 있어요!”
그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린 사람들은 아이의 말처럼 마을에서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었고, 조금 전에는 다른 가옥들에 가로막혀 있어 잘 보이지 않았었다. 그들은 불빛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버려진 마을이 아니었네!”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야, 무언가 먹을 거라도 얻을 수 있겠지.”
“술이 있으면 좋겠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자.”
하지만 마을에 들어서서 황폐한 가옥들을 바라보자마자, 그들은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불빛이 나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나마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커다란 저택 밖에 도착하자, 안쪽 대청에 모닥불이 타고 있고 한 사람이 의자 위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에 탄 여자아이를 포함한 일행 여덟 명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들은 이 마을에는 누구도 살지 않으며, 불을 지핀 것은 자기들과 다름없는 행인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잇! 버려진 곳이었네.”
“저 사람은 혼자 여기까지 오는 데에 무섭지도 않았나?”
“집 안에 다른 일행이 있나 보지.”
“아니야, 저 사람 혼자 온 것 같은데?”
몇몇 이들은 계연이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몇 마디 의견을 나누었다. 그때 맨 앞에 서 있던 젊은 사내 하나가 수염이 하얗게 센 남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둘째 숙부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보아하니 이 부근에는 제대로 된 가옥이 없습니다. 저 행인이 있는 곳이 그나마 가장 온전히 보전된 건물이고 앞에는 우물도 있으니…… 저자에게 가서 한번…….”
둘째 숙부라고 불린 남자가 계연이 있는 방향을 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그들은 지금 계연이 있는 가옥과 10여 장(*약 30m)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다. 이렇게 어두컴컴한 시각에 버려진 마을에서 자신들의 일행을 마주쳤는데도 저 사람에게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서 쉬는 것이 낫겠다. 홀로 길을 나선 데다 이런 황폐한 마을에 묵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엮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둘째 숙부의 말에 다른 이들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말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마을이 그리 작지는 않으니, 조금 열악하다 하더라도 다른 적당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계연이 문가에 서서 대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저 무리는 이 가옥으로 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고, 이에 계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물기 가득한 공기 냄새를 맡으며 본래 하려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
쏴아아아……!
그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랑비라고 볼 수는 없는 위세였다.
“이런, 자자, 서둘러! 어서 저기로 가세! 옷이 젖으면 풍한에 걸릴지도 몰라!”
“서두르세,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뛰어!”
“말 잡아, 말!”
그들은 지금 아주 애매한 위치에 있었는데, 마을에 난 작은 길 양쪽에는 전부 무너진 가옥들뿐이어서 채 두 사람도 숨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은 말을 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빗속에서 다른 건물을 찾는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이에 이들은 결국 계연이 있는 널찍한 가옥으로 뛰어가게 된 것이다.
선두에 선 것은 그 어르신이라 불리는 남자와 체격이 건장한 사내 하나였다. 그들은 가옥을 향해 달리면서 계연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갑자기 비가 내려 그런데 거기서 함께 비를 좀 피해도 되겠소이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계연은 행동으로 제 뜻을 표현했다. 계연은 서둘러 가옥의 대문을 열어젖힌 다음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런 인적 드문 곳에서 비를 맞아 병이라도 걸리면 안 되니까요!”
“고맙소, 정말 고맙소이다!”
둘째 어르신이라 불리는 남자는 뛰어오는 동시에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와 몇몇 이들이 선두로 들어왔는데, 그 와중에도 비는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서둘러 계연이 머무는 가옥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말 한 마리까지 끌고 들어오자, 문가에 서 있던 계연은 그제야 문을 닫았다. 하지만 저 일행들의 의심과 경계를 풀어주기 위해,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은 남겨둔 채였다.
실내에 들어선 이들은 제자리에서 뛰기도 하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기도 하며 빗물을 털어냈다. 아직 습기가 옷 안쪽으로 침투하지 않은 틈을 타서 재빨리 물기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