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힘으로 힘을 상대하다
약 반 시진(*1시간) 전, 비적 떼들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드디어 남왕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적 대부분은 급히 배를 채우고는 각자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계연이 파자를 이끌고 오던 때, 남왕채의 한 별채 안에서는 여섯 명의 두목이 몇몇 수하들과 함께 모여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양고기, 탕 요리, 불에 구운 전병과 술이 차려진 한 상을 앞에 놓고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며 술을 마셨다.
“에잇, 그 여인들을 데려왔으면 오늘 밤은 큰 호사를 누렸을 텐데! 하필 운이 없어 오늘 그런 것을 마주치다니!”
셋째 두목의 불평을 듣고 상석에 앉은 첫째 두목이 이렇게 물었다.
“셋째, 도대체 무슨 삿된 것을 마주친 거야?”
그곳에 함께 있었던 다섯째 두목이 술을 한 입 마시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 그때 셋째 형님께서 저와 둘째 형님을 불러서 가보니 시신들의 목에 하나같이 물린 자국이 있었어요. 상처에는 모두 깊은 구멍 두 개가 나 있었는데, 보아하니 목의 혈관을 곧바로 뚫고 들어갈 정도의 깊이였어요.”
“맞습니다, 게다가 형제들 모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어요. 형제들의 시신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습니다. 시체들의 몸에는 그것에게 꽉 잡힌 듯한 흔적도 남아있었고, 주위의 땅바닥에는 몸부림친 흔적도 있었어요. 어쨌든 무언가 힘이 굉장히 센 것에 의해 땅바닥에 눌린 후, 살아있는 채로 목이 뜯긴 겁니다.”
그렇게 말한 셋째 두목은 끝에 한 마디를 더했다.
“시체들에는 모두 피가 없었어요. 즉, 죽을 때까지 피가 빨린 겁니다.”
“허……!”
이에 적지 않은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듣기만 해도 사악하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그냥 후퇴한 겁니다. 미인도 좋고 돈도 좋지만, 그걸 누릴 목숨이 먼저 붙어있어야 하니까요!”
그러자 첫째 두목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형제들과 건배했다.
“네 말이 옳다. 자자, 마시자!”
“건배!”
이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소두목 하나가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찬 바람이 불어닥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멀리 가기가 쉽지 않아, 그는 별채 정문을 나서서 처마 밑을 돌아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지를 풀어 내리고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소두목은 소변을 처리한 후 몸을 부르르 떨며 이렇게 혼잣말했다.
“휴……. 3월이라 그런지 아직 춥군.”
그때 번쩍하며 번개가 내리쳤고 뒤이어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번개가 짧게 산채를 비추던 찰나, 바지춤을 정리하던 소두목은 먼 곳의 한 천막 바깥에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붙잡힌 사람은 두 발을 공중에서 휘적거리며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이에 소두목은 당황하기도 하고 약간 두렵기도 했다.
‘저쪽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시 한번 ‘우르릉!’하며 번개가 쳤다. 소두목이 몸을 돌린 찰나, 옆쪽 지면 아래에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형체의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왔다.
“뭐야?”
푸욱!
뾰족한 손톱이 달린 두 손이 지면에서부터 솟구쳐 나와 그의 발을 붙잡았다.
“억……! 으윽……!”
날카로운 비명은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뚝 끊겼다. 하지만 그래도 소두목이 낸 기척은 작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산채 안에서 먹고 마시던 두목들은 즉시 동작을 멈췄다. 다른 소두목들은 듣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무공이 얕지 않은 그들은 두려움이 섞인 비명을 똑똑히 들었다.
“조용히!”
첫째 두목이 이렇게 소리치자 실내는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그러자 바깥의 비바람 소리와 간혹 울리는 천둥소리만이 들려왔다. 이 기묘한 정적에 그들은 정체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너, 너, 그리고 너. 나가서 살펴봐라!”
셋째 두목이 문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비적들은 잠시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무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얼마간은 고요해 아무런 기척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세 사람의 비명이 아주 짧게 울려 퍼졌다.
“악!”
“어헉!”
“윽!”
콰당!
두목들이 앉은 건물의 한쪽 벽에 무언가가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안 되겠다. 일이 심상치 않군, 형제들 모두……!”
문이 나 있는 벽에 별안간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방 안의 불빛을 빌려 밖을 바라보니, 구멍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형체가 두세 명씩 서 있었다.
“누구냐?”
“바닥을 조심해!”
“아악!”
두목들은 각자 무공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와 동시에 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며 땅에 커다란 구멍 두 개가 났다. 그 안에서는 온몸이 갈색인 괴이한 사람 두 명이 솟아 나왔다.
그중 하나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소두목의 머리가 잘렸다.
신선한 피를 보고 흥분한 두 괴물은 단번에 머리 없는 시신에 올라타 피가 흐르는 목에 입을 대었다.
이 장면을 본 셋째 두목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제길, 그 삿된 것들이 산채까지 따라왔구나! 오늘 모두 목숨을 걸어야겠다!”
그의 고함에 바깥의 괴물들이 이끌려 하나둘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단 한 번의 도약에도 셋째 두목의 지척까지 다가올 수 있었다.
“다들 최선을 다해라!”
“죽여라!”
챙!
첫째 두목은 괴물 하나가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는 즉시 온몸의 진기를 운용하여 자신의 환수대도(環首大刀)를 휘둘렀다.
탁!
눈앞에 돌연 불꽃이 일더니 손이 저릿해졌다. 그의 검으로는 상대를 베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괴물을 멈추게 하지도 못했다.
쿠웅……!
첫째 두목이 괴물의 공격을 받고 부딪힌 순간, 등 뒤에서 한 쌍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목을 노린 커다란 입이 그를 덮쳐 왔다.
쾅……!
괴물은 그대로 첫째 두목을 끌어안고 건물의 뒷벽을 부수며 밖으로 나갔다. 그것만 봐도 괴물의 괴력을 알 수 있었다.
비 오는 산등성이 위에서 파자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계연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기가 남왕채입니다.”
사실 마을을 떠나 싸움이 벌어진 현장을 지나 비적들의 산채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척 짧았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난다면 거리가 너무 짧아 남왕채를 지나칠 위험이 있는 데다, 길을 아는 파자도 있었기 때문에 계연은 축지법으로 걸어왔다.
비록 파자는 직접 두 발로 뛸 필요가 없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받은 타격이 컸기 때문에 엄청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계연은 멀리 어두컴컴한 산채를 바라보며 법안을 열었다. 그곳은 비록 불의 기운이 왕성했지만, 살아있는 불길처럼 피어오르고 있지는 않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큰불이 꺼진 후 검은 연기가 하얗게 변해 피어오르는 것처럼, 이는 사실 불이 다 꺼진 후의 현상일 뿐이었다.
이에 계연은 다시 파자의 옷깃을 잡고 뛰어내렸다. 그는 공중에서 빗방울을 가볍게 밟아가며 수백 장(丈)의 거리를 뛰어넘어 곧바로 남왕채에 도착했다.
고요한 산채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말들이 있을 마구간에서조차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연의 법안으로 보면 이 산채에는 생기(生氣)는커녕 혼백의 기운조차 없었다. 보아하니 사람과 말 모두 온몸의 정기를 빨린 듯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도착하자 계연은 마침내 짙은 시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니네? 땅 밑에 있군?”
계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손을 한번 휘두르자, 넝쿨검이 빙빙 돌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꿀꺽……. 뭐, 뭐가 하나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파자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조마조마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계연이 돌연 괴력을 발휘해 그의 옷깃을 잡아 올렸다.
“으아아악!”
이어서 계연은 파자를 공중으로 던졌고, 파자가 하늘을 날아가는 동시에 지면이 연이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펑, 펑, 펑……!
남루한 옷을 입은 세 구의 시신들이 땅에서 솟구쳐 계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의 지면에서는 무언가가 다가와 두 손으로 계연의 발목을 잡아채려 했다.
이 괴이한 시신들의 속도는 무척 빨랐지만, 계연 앞에서는 그다지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계연은 마치 미끄덩한 얼음덩어리처럼 왼쪽으로 몸을 틀어 시체들의 공격을 피한 뒤, 영기를 끌어내 <철형전첩>의 장법을 한 시체를 향해 날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힘이 천 겹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은 단단한 피부를 때렸다. 그러자 시체는 마치 거대한 몸집을 가진 괴물에게 공격을 당한 것처럼 수 장(丈)의 거리를 날아가, 콰당탕 소리를 내며 산채의 건물을 관통한 뒤 또 다른 벽을 뚫고 나와 마침내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그것만으로도 계연이 사용한 장법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장법을 날린 뒤 계연은 알 수 없는 반발력을 느꼈고, 일부러 그 힘을 무력화하지 않고서 장법을 날린 방향과 반대로 쭉 밀려났다. 이에 그의 두 발이 땅바닥에 끌리면서 흙탕물이 사방에 솟구쳤다.
그때 또 다른 두 구의 시체가 잔상처럼 변하더니 계연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후……!”
이에 계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자 붉은색을 띤 회색 연기가 그의 입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시체 두 구를 향해 정통으로 날아갔다.
그 연기에는 희미한 광채가 감돌아, 어두컴컴한 사위를 밝게 비추었다.
화르르……!
곧이어 시체들의 몸에는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아,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목탄(木炭)이 된 것처럼 보였다. 시체들에서 치솟는 열기로 인해 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치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하얀 증기가 시체들 주위를 감돌았다.
풍덩!
시체들은 불에 타고 있는 와중에도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곁에 있는 물웅덩이를 향해 몸을 굴렸지만, 시체들을 태우는 불길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단 몇 초 만에 두 ‘목탄’들은 빛을 잃고 완전한 잿가루가 되어 물웅덩이에 스르르 퍼졌다.
계연이 가만히 서서 지면을 훑어보았지만, 조금 전 자신의 다리를 잡아채려 했던 시체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춘 듯했다.
이렇게 계연이 일부러 공격하기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지만, 지하에 있는 그것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시체들도 계연을 공격하러 오지 않았다. 계연은 이를 통해, 공격적인 성향과 피를 탐내는 본능 말고도 이것들에게는 얼마 정도의 영지(靈智)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시(僵尸) 인가? 토둔(*土遁: 도가(道家)의 술법인 오둔(五遁) 중 하나로, 땅속으로 숨어드는 술법)도 할 수 있네. 공격하기가 쉽지 않겠어.”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축지법으로 걸어가, 장법을 맞고 건물을 통과해 쓰러진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이때 그것은 막 정신을 차린 참이었는데, 계연은 구름처럼 가볍게 그 곁에 다가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 괴이한 시체가 계연의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명 더 있는 것 같은데……. 흠!”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계연은 정신을 집중해 산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으아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파자를 붙잡고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올라 산채 건물 중 한 곳의 지붕에 착지했다.
그때 하늘에서 넝쿨검의 검신(檢身)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한 줄기 은빛이 번뜩이며 선검이 검집에서 나오자, 모습을 드러낸 선검으로부터 아래쪽 산채까지 가느다란 직선이 이어졌다.
쿠궁……!
곧이어 선검의 검기(劍氣)에 의해 지면 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바로 다음 찰나, 굉음이 울렸다.
은빛의 검광이 산봉우리에서부터 아래쪽을 향해 길게 이어졌는데, 검기는 이미 이 산봉우리를 관통한 상태였다.
일순간, 산 전체가 흔들렸다.
쿠르릉-!
이를 본 파자는 두 다리가 풀렸고, 그를 붙잡고 있던 계연에 의해 겨우 땅바닥에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