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결과
30장 밖에 떨어진 거대한 구덩이 안에 있던 우두머리는 역사가 떠나던 그 순간 바로 땅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오늘 같은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 그는 본능적으로 땅 밑으로 숨어들었고, 등을 돌리고 뛰어가는 금갑 역사를 쫓아가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일 상대에게 한 번 더 붙잡히게 된다면, 주먹 몇 번 맞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시체들의 우두머리가 보기에 자신은 이미 곤경에서 벗어난 듯했다. 금갑 역사는 구덩이 쪽으로 다시 다가오지 않고서 가옥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역사의 눈빛에 멸시가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때 사람들은 싸움이 잠시 소강된 것을 느끼고, 두려움과 넋이 나간 상태에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후…… 후우……. 우리, 아직 살아있는 거죠?”
“윽…….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말은? 말은 어쩌지요?”
“아이고, 이 상황에 무슨 말을 신경 쓰고 있어! 목숨이 중하지!”
“불이 전부 꺼졌어요!”
“얼른 붙입시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어요. 살릴 수 있어요!”
사람들은 긴장과 초조함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안쪽에 있던 모닥불에 다시 불길이 타올랐고 실내가 천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바깥의 금갑 역사가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따뜻한 모닥불과 그것이 내뿜는 빛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안온함은 또 다른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계속 광풍이 불어와 체온이 떨어진 이들이 많았으므로, 적지 않은 이들이 추위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잠시 불을 쬔 후 몸이 따뜻해지자, 황지선을 비롯한 무인들은 다시 평정심을 회복하고 굳게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구멍 뚫린 창호지를 통해 바깥의 상황을 내다보았다.
우르릉…… 쾅! 우르릉…….
번개가 여러 번 하늘에서 떨어지며 지면을 환히 비추었다.
그러자 황지선과 그의 일행들은 마침내 문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에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갑 신인이 자신들의 시선을 조금 가로막고 있긴 했지만, 그 구덩이의 크기가 무척 크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고 깊이는 채 가늠할 수도 없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한명의 일행들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황지선을 비롯한 무인들은 조금 전까지 여러 번 느꼈던 지면의 진동과 눈앞의 상황을 종합하여 저 구덩이가 금갑 역사와 괴물이 싸우던 중 만들어진 것임을 눈치챘다.
“저기 신장(神將) 어르신, 저 괴물을 물리친 것입니까?”
황지선이 넌지시 이렇게 물었지만, 금갑 역사는 가옥에 등을 돌린 채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문 앞의 머리 없는 시체를 보고서, 비록 머리통은 사라졌지만 두 손에 길게 자라난 손톱을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대략 백 장(*약 300m) 정도 떨어진 지면 아래에서, 시체 우두머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모든 주의력은 멀리 땅 위에 서 있는 금갑 역사에게 온통 쏠려 있었다.
이런 신체적 고통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이어서, 하마터면 이 정도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을 뻔했다. 그는 원래 통각(痛覺)이 없어서 손발이 잘리더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해야 했지만, 금갑 역사의 공격에는 이상하게도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즉 역사가 운용하는 것이 괴력뿐만 아니라 무언가 신묘한 힘이 섞여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아마도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갑 역사는 이때 그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시체는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철저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조금 전의 경험으로, 그는 자신이 금갑 역사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참이었다. 다만 참아지지 않는 분노와 짙은 패배감 때문에 여태 도망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최소한 저 가옥 안의 사람들이라도 모두 죽이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저 멀리 하늘에서 돌연 두려움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 으아악……!”
비명이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파자였는데, 이때도 그는 떠날 때처럼 계연의 손에 달랑 들린 채였다. 공중에 떠 있는 그는 공포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목청이 찢어질 듯이 소리를 질렀다.
계연은 이에 조금 어이가 없는 상태였다. 이 남왕채의 유일한 생존자는 담도 콩알만 하면서 또 호기심은 무척 컸다. 분명히 무서우면 눈을 감으라고 말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도중에 눈을 뜨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놀라 손발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남왕채로 향할 때 지면을 이용했기에 망정이지, 이 상태 그대로였다면 공중에서 길을 제대로 짚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을 상공에 도착해 땅으로 하강하면서, 계연도 마침내 그 커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뿐만이 아니라, 금갑 역사가 소환되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기까지 그것들이 왔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아! 으악!
“입 좀 다무세요.”
다행히 계연의 한마디가 현재 느끼는 공포보다 더욱 위력이 컸던 듯, 파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계연은 파자를 데리고 가볍게 가옥 앞에 내려섰다. 이때 안쪽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문 앞으로 몰려와 있었고, 황지선이 다급히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계 선생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계 선생님, 다친 데는 없으세요?”
“선생님 오셨군요!”
“잘됐어요, 잘됐어! 선생께서 돌아오시다니!”
“어서 들어오세요!”
계연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그를 더없이 환영해주었다. 계연을 보고서야 마침내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고서 안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하고 대답한 뒤, 근처에 놓인 머리 없는 시체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파자의 옷깃을 놓아준 다음 그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금갑 역사는 계연이 아직 땅에 내려서기도 전부터 이미 계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계연이 땅에 내려서자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역사는 황지선도, 대들보 위의 종이학도 보지 않고 계연을 향해 공수한 뒤 읍을 했다.
“잘했다. 내 생각보다 더 잘했구나.”
계연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웃으며 이렇게 칭찬했다. 역사는 당연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비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오세요!”
이에 계연은 손을 내저으며 바깥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이요.”
그렇게 말하고서 계연은 시취(屍臭)가 나는 방향을 따라 가옥 밖의 우물 근처로 걸어간 뒤, 마을 밖 어느 방향을 향해 법안을 열고 관찰했다. 그러자 혼탁하고 어두운 기운이 그 구역에 은은히 감도는 것이 보였다.
땅 밑의 시체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기척을 숨겼지만, 속으로는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계연이 돌아온 순간,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그는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 금갑 역사가 ‘주인’이라 부르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람을 몰고 나타난 이 신비한 인물은 금갑 역사가 ‘주인님’이라 부르는 바로 그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개 범인(凡人)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발가락으로 생각해보아도 결코 범인(凡人)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저자가 법력과 기운을 완벽하게 숨겼거나, 혹은 자신의 도행으로는 저자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 없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금갑 역사의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듯한 안하무인한 눈빛에 비하면, 계연의 시선에는 목적이 뚜렷했다. 이미 저 시체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꿰뚫고 있는 것이었다.
땅 밑에 숨어들어 모든 기척을 숨긴 그는 당연히 땅 위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까닭 모르게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그 시각, 계연은 흰옷을 입고서 가옥 근처의 우물 앞에 서 있었다. 금갑 역사도 계연을 따라 움직이며 계연의 등 뒤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앞에 선 이는 자그마하고 뒤에 선 사람은 체격이 우람했지만, 조금 전의 상황을 겪고 난 이들은 왜인지 역사보다 작은 계연 쪽이 더욱 위엄있게 느껴졌다.
오늘 밤 계연이 처리한 시체들은, 남왕채가 자리한 산봉우리가 넝쿨검에 의해 반 넘게 무너져내린 것까지 포함하면 총 아홉 구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소매 안에 들어있는 시체까지 포함하면 열 구였다.
이 존재들은 무척 피에 굶주려있고, 괴력을 지닌 데다 피부도 단단했다. 뿐만이 아니라, 영지도 지니고 있고 땅 밑으로 숨어들 수도 있어 계연이 아는 지난 생의 ‘강시(僵尸)’들보다 훨씬 대단했다.
게다가 이 시체들은 마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체의 정기와 피를 갈망하는 존재들이었다. 즉, 그들은 계연이 무척 혐오하는 소수의 존재에 속했다.
시체의 우두머리가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있다 해도, 멀리 떨어진 계연은 여전히 코를 찌르는 듯한 시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는 우두머리에게서 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가 먹어 치운 수많은 피해자에게서 나는 냄새이기도 했다.
“네가 저 괴이한 시체들의 우두머리군?”
계연이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물었지만, 그의 깊은 목소리는 멀리까지 퍼져나가 가옥 안의 사람들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마을 밖 땅 밑에 숨어있는 시체에게는 이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시체 우두머리는 숨어있는 것이 더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기운을 끌어모았다. 당장 더욱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왜인지 결코 도망치면 안 된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계연은 시체가 숨어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왜 그것이 아직도 도망치지 않고 있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마침내 그 이유가 될 만한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째는 저 시체가 믿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고, 둘째는 감히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두 번째 이유가 사실일 가능성이 좀 더 컸다. 이왕 그렇다면 계연도 더는 많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척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3초 안에 나와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척 평온했지만, 결코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그는 3초를 얼마나 빨리 셀 건지도 말하지 않았고,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도 땅 밑에 숨어있는 시체는 물론, 황지선과 한명을 비롯한 사람들조차 시체가 3초 안에 나오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계연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금갑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의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계연은 제대로 3초를 세지도 않고, 거의 바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넝쿨검이 빛을 번쩍이며 계연의 왼손 안에 나타났다.
선검이 나타난 그 순간, 땅 밑의 시체는 극한의 추위를 느끼는 동시에 온몸의 장기가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허겁지겁 지면 위로 올라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가 흙 부스러기와 진흙을 묻히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왔습니다! 나왔어요!”
그는 이제야 진정으로 계연을 마주 본 것이었다. 계연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흰옷을 입고 왼손에는 검을 쥔 채였고, 뒤로는 금갑 역사가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