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무자천서(無字天書)
우패천은 연비가 묵는 방의 창문을 모두 닫고서 걸쇠를 걸었다. 그런 후에는 방에서 나와 문을 닫은 뒤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안쪽의 자물쇠가 스르르 움직여 문을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는 비록 남도현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의 ‘순박한 민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빼고 객잔의 복도는 무척 고요했다.
우패천은 멀리 계연의 방을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문을 두드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고, 잠시 후 커다란 소가 코를 고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계연은 자신의 침상 위에 누워 눈을 감고서 여러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소 요괴의 언행을 보니 그의 본성이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자의 내력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듯했다. 요괴가 되던 순간부터 좋은 심성을 가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았던가, 아니면 처음부터 집에서 기르던 소가 요괴가 된 경우였다.
다음 날 아침, 연비는 쿡쿡 찌르는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객잔에서 벌어진 일을 추격하러 갔다가 밤에 잔뜩 술을 들이마신 일까지 말이다.
“어휴……. 어젯밤에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연비는 이렇게 자책하며 두통을 가라앉히고자 관자놀이를 이리저리 주물렀다. 비록 자신의 주량이 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젯밤처럼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똑똑똑……. 똑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곧 우패천의 사람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 동생, 일어났는가? 이미 해가 중천이네, 계 선생님께서 곧 출타하신다더군.”
“일어났습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계 선생님이 출타한다는 말을 듣고 연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호흡을 조절한 다음 진기를 이용하여 숙취를 가라앉힌 다음, 이불을 젖히고 침상을 내려왔다.
옷은 어젯밤에 아예 벗지도 않았으므로, 그는 대야에 있는 물로 세수한 다음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우패천이 보였다.
“우…… 우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연비는 공수하며 이렇게 예를 올렸다. 어젯밤 그가 술에 취해 상대방을 ‘우 형’이라 불렀던 게 기억은 나지만, 이제 와 다시 그렇게 입을 떼기가 겸연쩍었다.
“에이, 연 동생 어찌 또 나를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는가! 어젯밤에는 거의 의형제를 맺을 뻔했는데 말이야. 그냥 우 형이나 형님이라고 부르게. 자, 어서 내려가지! 먹을 것을 좀 사 왔으니.”
두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자 게연은 이미 식탁에 앉아 죽을 먹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죽 한 솥과 반찬 몇 접시, 부드러운 전병이 놓여 있었다.
“계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연비는 더욱 공손한 태도로 계연에게 인사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어서 앉아서 식사들 하세요. 다 먹으면 저는 남도현을 떠나 북쪽으로 가려 합니다. 연 대협은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나요?”
연비는 계연의 말을 듣고 약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제였다면 계 선생님이 자신을 ‘연 대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겠지만, 오늘은 그 세 글자가 듣기에 무척 불편했다. 연비는 계 선생님이 자신을 연 대협이라 부르는 것에 어떤 조롱의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우패천이 자신을 ‘연 동생’이라 부르는 게 훨씬 편안했다.
그러나 그건 한순간에 지나간 일이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계 선생님이 떠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비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직은 없어요. 그냥 북쪽으로 가려고요.”
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니, 결코 선생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조금만 더 선생님과 함께 지내고 싶을 뿐입니다.”
계연은 한쪽에서 공손한 태도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우패천을 흘끗 바라본 뒤, 연비를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어서 앉아 죽이라도 좀 드세요. 저와 같이 가고 싶으면 물론 그렇게 하셔도 돼요. 제가 후에 사정이 생기면 대협께도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래! 자, 연 동생 어서 앉아서 죽 좀 드시게. 맛이 꽤 괜찮더군. 자, 내가 한 그릇 떠주지.”
우패천은 더없이 친근한 태도로 연비에게 죽을 한 그릇 가득 담아 건넸다.
“계 선생님, 이 반찬들은 입에 좀 맞으십니까? 제가 오늘 일찍 밖에 나가 사 온 것이거든요!”
계연은 우패천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맛이 좋네요.”
그의 웃음에 우패천은 마음을 놓고 죽을 한 입 먹은 다음 연비에게 말했다.
“동생, 자네와 내가 참 마음이 잘 맞는 것 같군. 우리가 비록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내 자네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아. 하지만 일단은 죽 먼저 들고 나중에 가면서 얘기하세, 가면서…….”
마침 연비가 계연을 따라간다니, 우패천은 그들에게 들러붙을 핑계를 찾은 셈이었다.
죽을 먹던 도중에 연비는 계연이 어느새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곁눈질로 계연이 읽는 책을 슬쩍 바라보니, 종이 위에 글자가 하나도 없는 온통 하얀 백지였다.
우패천도 연비가 그 책을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달라붙어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계 선생님께서 보는 것은 선도(仙道)에서 전해지는 천록서(天籙書)일 것이네. 선도에서 전해지는 신묘한 술법들을 영험한 문자로 적은 것이지. 연 동생 자네는 물론이고, 나라고 해도 저 글자가 보이지 않네. 하지만 저 종이에는 정말로 글자가 적혀 있어. 분명 엄청난 내용일 테지.”
연비는 죽을 한 숟가락 삼키더니, 우패천을 향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우, 우 형님께서도 보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계 선생님께서 형님의 수행이 얕지 않다고 하셨는데…….”
“아이고, 연 동생. 자네가 뭘 몰라서 그러네. 나는 요괴들의 수행을 닦는 자이니, 선도를 닦는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지. 그러니 오묘한 이치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어.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저 책의 이름만 볼 수 있을 뿐이야. 만약 수행을 좀 더 쌓으면 그때는 나도 읽을 수 있겠지.”
계연은 흘끗 우패천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슨 신묘한 술법을 담은 책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외도전>이라는 책이에요.”
“아아…….”
우패천이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비가 이렇게 물었다.
“우 형님께서도 <외도전>을 아십니까?”
하지만 소 요괴는 곧바로 머리를 저었다.
“모르지…….”
우패천의 솔직함에 계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연비는 곧 눈썹을 찡그렸는데, 저 글자 없는 책을 본 이후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게 무슨 기억이었는지 확실치 않았던 연비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본 후에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맞아! 저건 무자천서(*無字天書: 고대 최고의 무공 비적을 일컫던 말로,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적힌 책이나, 특수한 조건에서만 글이 보이는 책을 가리킴)야!’
“계 선생님, 이 천록서는 무척 진귀하고 신비한 것이지요?”
그러자 계연은 손아귀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이 진귀한지 아닌지는 그 내용에 달려 있지요. 하지만 천록서는 그 내용을 읽기가 무척 까다로워요. 그래도 제가 보기에 최소한 적힌 내용이 쓸모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외도전>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별 쓸모가 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계연은 이런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여겼고, 최소한 수선자들이 쓴 책 중에서는 가장 오락성이 짙은 책이었다.
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매끄럽게 정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계 선생님, 예전에 제가 조월국의 중호도(中湖道)에 있는 위(衛)씨 집안에 무자천서가 한 권 있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전해져 내려온 지 몇 대가 지났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읽지 못했다 합니다. 이에 강호의 많은 인맥을 초대하고 도관의 도사들도 초청하여 연구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합니다.”
연비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어서 말했다.
“전에는 무자천서가 위씨 집안에서 그들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해,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강호에서도 그 말을 믿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계 선생님께서 읽고 계신 책을 보니, 어쩌면 그들이 정말로 그 무자천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도 그 책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무자천서라고?’
연비의 말에 계연은 당연히 큰 흥미를 보였다. 위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라 하니,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또 다른 천록서일 수도 있었다.
“연 대협은 위씨 가문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연비는 계연이 그 한마디를 묻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가면서 물어봐야 합니다. 게다가 제가 중호도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난 인물이라, 책을 한 번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연비는 속으로 남몰래 안심했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자신도 계 선생님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셈이었다.
“좋아요, 그럼 우선 밥 먼저 먹고 중호도로 갑시다.”
조월국의 국토 면적은 대정국의 면적 절반보다 조금 더 컸다. 행정 구역은 총 9개의 도(道)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름만 다를 뿐 대정국의 주부(州府)제도와 같았다.
계연 일행이 현재 머무는 남도현은 남원도와 조로도(朝路道)가 맞닿는 곳에 있었고, 위씨 집안이 자리 잡은 중호도는 경로도(京路道)의 북쪽에 있었다.
중호도까지는 보통 사람들이 두 발로 걸어서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계연과 우패천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연비도 주로 두 다리로 걸어 다닐 뿐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은 드문 사내였다. 혈통이 뛰어난 천리마가 아닌 다음에야, 경공을 사용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해 4월 초, 사람 둘과 요괴 하나는 20일 정도를 소요해 조로도를 빠져나와 중호도의 경계에 이르렀다.
20여 일간 이들은 길을 막는 도적들을 상대했고 흉악한 무리를 마주쳤으며 흑점(*黑店: 옛날, 길손을 해치고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악당들이 열고 있는 객잔)에 묵기도 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황야에서 잠을 자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연비가 조월국으로 넘어와 검을 연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간 자신들이 겪은 작은 경험으로 보아, 이 지역은 아무런 질서가 없는 무법천지 그 자체였다. 심지어 신을 믿는 기운마저 피폐해져 그 힘이 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