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무도(武道)의 끝은 어디에
마침 계연은 이때 우패천과 함께 객잔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계연은 청력이 뛰어났기에, 고요한 밤에 울려 퍼지는 연비의 한탄 어린 혼잣말을 무척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검법(劍法)이 날카롭기로 유명한 비검객이 그간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던 것을 계연도 알고 있었다.
객잔의 복도에서 우패천과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던 순간, 계연은 우패천이 때때로 가슴팍에 넣은 돈주머니를 더듬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우패천에게 농담을 던졌다.
“내일 일찍 위씨 가문을 방문해야 하니, 오늘은 이제 나가지 마세요. 우 어르신을 못 찾으면 저희 하인들이 걱정할 테니까요.”
계연의 말을 듣자 우패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계연을 향해 웃어 보인 다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패천의 방은 연비의 방에서 꽤 가까웠기 때문에, 연비는 그가 문을 닫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우패천이 기루에 있다 돌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연비는 사실 오늘 밤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연비는 고개를 휘휘 저은 후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서, 원위치에 내려놓은 뒤 침상에 누웠다. 그는 방 안의 새하얀 천장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계연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깊이 침잠한 두 눈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지만, 이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물결처럼 파동이 일고 있었다.
잠시 뒤, 계연은 소매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것을 펼쳐 위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 후 눈을 감은 계연은 손을 뻗어 위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글자에 닿을 때마다 마음에 깨달음이 들이쳤다.
그에 더해 연비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 깨달음과 합쳐지자, 일순간 계연은 시공을 초월하여 공중에 서 있게 되었다. 계연은 곧이어 노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한 칸짜리 초가집의 뜰에 놓인 네모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검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붓을 쥐고서 글을 쓰는 중이었다. 노인은 갈라진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80년 인생 기나긴 길을 걸어왔는데, 무도(武道)의 끝은 대체 어디인가? 선천적인 재능도 수선(修仙)하는 자를 이기지는 못하는 것인가? 이에 검을 내리고 글을 쓰니, 어찌 이리 불공평한가…….”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바로 대정국의 무림계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검의첩>이었다.
연비와 육승풍 그리고 두형은 모두 성격이 달랐으며, 그만큼 무도를 대하는 태도도 각기 달랐다.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연비는 협객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무인(武人)에 더 가까웠다.
계연은 조용히 탄식을 내뱉었다.
“좌리(左離)와 무척 닮았구나…….”
수행자들 대부분과 달리, 계연은 한 번도 무공을 연마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검의첩>은 자신에게 끼친 영향이 막대했고,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도 그러했다. 이런 기술은 거의 도술에 가까워서, 단순히 선인(仙人)과 범인(凡人)으로 실력의 고하를 나눌 수 없었다.
“무도는 정말로 무력한가?”
계연은 연비의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좌리가 살아있었다면, 그가 닦은 무도의 실력으로 볼 때 일반적인 요괴며 귀신들은 그의 앞에서 강호의 일반 무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좌리검전>을 쓸 당시의 좌광도가 무림의 일인자로 군림하는 고수였다면, <검의첩>을 쓸 당시에는 이미 천하무적의 좌 검선(劍仙)이었다.
계연은 한 번도 지금 이 순간처럼 확신이 든 적이 없었다.
이렇게 심오한 경지와 검의(劍意)라니! 마치 발을 들이자마자 또 다른 경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만약 그가 뜻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하지만 좌리는 결국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깝구나…… 정말 아까워…….”
계연은 무도를 닦는 이들 중에서 충분히 대가(大家)라고 불릴 수 있는 실력자였고, 무도에 대해서도 타고난 열정과 호기심이 넘쳤다. 그러나 계연은 단순한 무인은 결코 될 수 없었다. 이미 벌여놓은 일들이 너무 많았고,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들도 앞으로 끊임없이 생길 터였다. 신통한 술법을 연구하고 바둑돌이 될 만한 인재도 계속 찾아야 하니, 아무래도 ‘신비로운 계 선생’밖에는 될 수가 없었다.
계연의 생각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뻗어 나갔다. 마침내 결심이 선 계연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연 대협, 주무세요?”
바람처럼 가벼운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 연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거의 곧바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 선생님이 날 부르신 건가?’
“아직 잠이 들지 않으셨다면, 제 방으로 와서 잠시 이야기 나누시죠.”
계연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자, 연비는 마침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불을 걷은 다음 겉옷을 걸쳤다.
잠시 후 계연은 방 밖에서부터 연비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비가 막 손을 뻗어 방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안에서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열고 들어오세요.”
그러자 연비는 가볍게 문을 살짝 밀었다. 계연은 등갓을 씌운 유등(油燈)이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위에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펼쳐져 있었는데, 계연은 연비가 들어온 것을 알고도 고개를 숙여 그것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연비는 검을 품 안에 쥐고 계연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계 선생님, 실례합니다.”
계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웃어 보이더니,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라 손짓했다.
“제가 연 대협의 휴식을 방해했으니 오히려 죄송하죠. 앉으세요.”
연비는 등 뒤의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탁자 앞에 와 앉았다. 뒤이어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인 서첩(書帖)으로 향했다. 그가 채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계연이 먼저 대답했다.
“이 서첩은 기세가 비범하고 필체는 용이 꿈틀대는 듯하지요. 좋은 글이고, 또 좋은 검(劍)이기도 해요. 천하에 이보다 더 훌륭한 서첩은 없을 거예요. 아마 연 대협도 이 서첩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겠군요. 이게 바로 옛날에 좌리가 남겼던 <검의첩>입니다.”
‘검의첩이라니! 좌리? 좌 광도의 이름이 좌리였구나!’
<검의첩>의 대단한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연비는 계연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대정국 무림계에서 수십 년간 전해지다가, 그 유명세가 점차 약해지던 때 연지당 도적들의 일로 다시 무림 내 모든 이들이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최소한 연비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이 서첩의 위명(偉名)을 잘 알고 있었다.
‘<검의첩>이 계 선생님 손에 있을 줄이야. 그간 무림에서 아무도 이 서첩의 종적을 찾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을 뿐, 연비는 그 외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첫째로 <검의첩>은 계 선생님의 소유였고, 둘째로 그간 그는 죽 무도의 가능성에 대해 실망하고 속으로 낙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비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계연은 그를 잠시 관찰하더니 웃으며 물었다.
“연 대협은 혹시 <검의첩>에 적힌 무공의 수련법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국 범인(凡人)의 무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연비는 계연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자 깜짝 놀랐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수선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어요. 무공은 속세의 미미한 기술에 불과하니, 언급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연 대협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계연의 질문에 연비는 움찔했다.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도 우둔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계 선생님이 저런 식으로 질문하는 의도에는 후에 반드시 반대되는 말이 따라올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 해도 그는 계연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괜히 섣불리 반박했다가 계연이 이유라도 묻는다면, 그로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 선인(仙人)들의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계연은 이렇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검의첩>을 가리켰다.
“그러나 무공은, 혹은 무도는 결코 우리 생각처럼 간단한 게 아니에요.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수선자들의 말과도 다르고요. 좌리가 남긴 <검의첩>은 그 기술이 거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봐도 될 정도예요. 그야말로 무도(武道)라고 할 수 있죠.”
계연은 웃음을 거두며 숙연한 목소리로 약간의 안타까움을 담아 말을 이었다.
“좌리는 일생을 무공에 미쳐 살았어요. 늙어서는 신선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요. 그래서 그의 무도가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그가 전심전력으로 무도의 길을 걸었다면,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을 거예요.”
툭…… 툭…….
계연은 <검의첩> 위를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의 힘은 미약할 때가 있지만, 무도는 결코 미미한 기술이 아니에요.”
계연이 손가락을 통해 법력을 불어넣자, 서첩 안에 담긴 신의(神意)가 법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무도의 정점까지 올라가서 그 한계를 깨부수고 대대로 전수할 수만 있다면, 무도는 분명 더욱 다채롭게 발전할 수 있어요. 그것은 분명 쉬운 길을 아니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선인이나 삿된 존재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거예요.”
계연은 다시 연비를 바라보며 탁자 위의 <검의첩>을 그를 향해 밀었다.
“<좌리검전>도 제가 본 적이 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게다가 그건 좌씨 집안 사람들의 물건이니 제 마음대로 발설할 수도 없고요. 하지만 이 <검의첩>에 담긴 무도의 진의(眞意)는 유명하다는 무공 비적(祕籍)보다 훨씬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장담해요. 전무후무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계연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 말했다.
“연 대협, 대협의 심성은 수선자가 되기에 알맞지 않아요. 오히려 술법 같은 걸 배웠다간 마귀가 되기 쉬울 거예요. 하지만 무도에 있어서는, 연 대협의 마음은 옛날 좌리의 마음가짐과 무척 비슷해요. 그러니 오늘 이 <검의첩>을 대협께 드릴게요. 제가 이미 이물전신(*以物傳神: 물건에 진수를 담아 전하는 것)의 술법을 걸었으니, 대협께서도 좌리의 풍채가 어떠했는지 볼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다시 <검의첩>을 돌돌 말았다.
“가지고 돌아가세요. 이 서첩을 열어보면 잠에 빠지게 될 테니, 꼭 침상에서 읽으세요.”
연비는 계연의 말을 듣고 놀랍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곧이어 <검의첩>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무인이 어떻게 선인과 요괴와 맞붙을 수 있는지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계 선생님같이 속세를 초월한 선인이 하는 말이니 분명 거짓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왕 이 서첩을 자신에게 주셨으니, 분명 신묘한 이치가 담긴 것이 틀림없었다.
연비는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서첩을 손에 쥐고, 일어서서 계연을 향해 인사했다.
“오늘 주신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