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장원(庄園)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비가 몸을 돌려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연비가 방문을 닫는 순간, 계연의 목소리가 안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서첩을 보고 나면 정신이 조금 멍해질 테니 푹 쉬세요.”
그의 말에 연비는 문밖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문 안쪽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몸을 돌려 떠나갔다.
방에 돌아온 후 연비는 신발을 벗고 검을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침상 위에 앉아 천천히 <검의첩>을 펼쳤다.
서첩의 글자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며, 그 위의 글자가 모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연비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글자들은 마치 생명을 얻은 것처럼 종이 위로 날아올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신이 아득해진 연비는 곧 잠에 빠져들었고, 서첩을 손에 쥔 채 침상 위에 털썩 쓰러졌다.
꿈에서 연비는 누군가 산봉우리 위에서 검을 쥐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챙……!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바람과 빗소리가 섞여 들려왔고, 곧 석양을 받은 검이 밝게 빛났다.
* * *
계연은 침상 위에 누워 한쪽에 놓인 자신의 넝쿨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상념이 다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무도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연비, 부디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선천(*先天: 수련의 한 단계로, 범속(凡俗)을 초월한 단계)의 경계에 이른 무인들은 영기(靈氣)를 신체 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원래 있던 진기(眞氣)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선천의 경계에 다다른 무인들은 선법(仙法)을 배운 것이 아니기에, 금교(金橋)를 만들 수도 없고 단로(丹爐)에 불을 지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왜 선천의 경계에 이른 후에도 진기를 완전히 영기로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이전에 계연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니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무공비적에서는 진기야말로 사람이 섭취한 오곡(*五谷: 쌀, 보리, 콩, 조, 기장)과 식량이 변화한 형태이며, 그것은 몸 안의 정기(精氣)에 영향을 끼친다고 서술되어 있다.
정기는 육신과 혼백의 근본이었다. 선천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은 영기와 진기가 결합한 상태였다. 그러니 신체와 정신을 단련할 때를 제외하고는, 진기 전부를 배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안의 잡다한 기운을 분리할 수는 있겠지만, 정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한, 무인에게 있어 수행하는 도중에 부딪힌 벽을 돌파하기란 항상 어려운 법이었다.
그래서 계연이 <검의첩>에 이물전신의 술법을 썼을 때, 계연에게는 연비에게 좌리의 풍채를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술법을 통해 자신의 이런 깨달음을 불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개개인의 경우가 다 다른 데다, 옆에서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결국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일이었다. 천하의 무인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들 봉황의 깃털만큼이나 드문 숫자였다. 그러니 그 경지를 뛰어넘은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계연이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여기까지였다.
* * *
다음 날 아침, 연비는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겨우 잠에서 깼다. 평소에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었다.
연비가 몸을 일으키자,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젯밤 꿈에서 본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는 이제야 계연이 말한 ‘무도(武道)’에 새로운 인식이 생긴 참이었다.
꿈에서 본 좌리의 풍채는 연비가 무공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좌리에게서는 속세를 초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제야 왜 그가 좌 검선(劍仙)으로 불렸는지, 그리고 왜 강호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견이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연비의 두 눈에는 다시 무도에 대한 열정이 타올랐다. 자신이 익히 아는 영역을 그 끝까지 탐구하게 된 그는, 더는 전처럼 목표를 잃고 낙담한 모습이 아니었다.
똑똑똑……!
“연 동생, 아직 안 일어났나? 어서 일어나게, 계 선생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우패천의 말을 듣고 연비는 깜짝 놀라 이불을 걷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태양이 이미 높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되었다니?’
“곧 나가겠습니다!”
연비는 다급히 대답한 뒤,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고 방에 준비된 깨끗한 물로 세수했다.
연비가 방문을 나섰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모든 짐을 꾸린 상태였다. 귀중한 <검의첩>은 다시 돌돌 말아 품 안에 넣은 채였다.
우패천은 연비를 보자마자 연비가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꼈다. 기운을 살펴보니 무언가 변화가 생기긴 했는데, 변화한 기운이 아주 작고 파도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어 자세히 살펴볼 수가 없었다.
* * *
녹평성 밖 북쪽에는 풍경이 수려한 장원(庄園)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주위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심은 전답과 방직(*紡織: 실을 뽑아서 피륙을 짜는 일) 공장, 가옥 여러 채가 모인 마을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이 바로 녹평성 위씨 집안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위명(衛銘)은 안에 경장(勁裝)을 받쳐 입고, 위에는 넓은 소매의 장포를 입은 채 하인들을 데리고 위씨 장원 밖에서 비검객 연비를 영접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위명을 떨친 연비를 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나이도 젊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유명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고를 당해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선천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기대해 볼 만했고 장래에는 무림의 원로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간 조월국의 내정이 어지러워지며, 대부분의 지방관아에서는 백성들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호에는 더욱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으니, 연비같이 전도유망한 고수와 관계를 맺는 것은 위씨 집안에 있어 무척 좋은 일이었다.
위명은 위씨 집안의 청년 중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 비검객의 위명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나이와 신분으로 볼 때 가장 연비를 접대할 만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일전에 연비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를 내보냈다.
다만 태양이 높이 걸릴 때까지 연비가 찾아오지 않았다. 위명은 어제 자신들이 소식을 잘못 전달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고개를 돌려 한 남자에게 물었다.
“어제 연 대협께서 오늘 아침 일찍 오겠다고 한 게 맞는가?”
남자도 그와 마찬가지로 경장을 입고 있었는데, 위명의 질문에 재빨리 대답했다.
“명 어르신께 아룁니다. 연 대협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일이 생겨 늦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어쩌면 그자는 진짜 연비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위명이 눈썹을 찌푸리며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리지. 연비의 이름이라면 조금 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어.”
잠시 후, 하인 하나가 뛰어오더니 위명이 곁에 다가와 이렇게 고했다.
“명 어르신, 앞에 걸음이 무척 빠른 세 사람이 장원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검을 들고 있는데, 연 대협의 외양과 무척 흡사합니다. 다른 두 사람 중 하나는 서생으로 보이고, 다른 하나는 짧은 적삼을 입은 것으로 보아 시종 같습니다.”
“잘됐구나. 다들 준비해라. 정신 바짝 차리고!”
길 양쪽에 늘어서 있던 위씨 집안의 하인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비의 일행이 길 저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위명은 단번에 연비를 알아보고 눈을 번쩍였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위명은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 연비를 맞이했다.
“연 대협께서 누추한 곳에 친히 발걸음을 해 주셨군요. 녹평성 위씨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하하하…….”
위명은 이렇게 인사를 건네며 그들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드리우며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연비도 검을 품에 안고 그에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다른 두 사람을 차례로 소개했다.
“친히 맞이하러 나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 분은 제가 존경하며 모시는 계 선생님이시고, 이 분은 저와 친한 우 형님이십니다.”
그러자 위명은 계연과 우패천에게 각각 다시 인사를 건넸다.
“계 선생님, 우 형님, 모두 안녕하십니까! 저는 위명이라 합니다.”
위명은 사실 연비가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다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그의 태도를 보니 자신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에 그는 행여 어색해질까 얼른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뒤이어 계연과 우패천도 그를 향해 인사했고, 위명은 친절한 태도로 그들을 장원 안으로 안내했다.
장원은 면적이 무척 넓었다. 관리가 잘된 전답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와 물길이 곳곳에 보였다. 어떤 곳은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어떤 곳에는 더위를 피할 정자 옆으로 작은 길이 나 있기도 했다. 가는 도중에는 저 멀리 가옥들이 밀집한 곳이 보였다. 위씨 가문의 방계와 그들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인 듯했다.
햇빛도 따사롭고 미풍이 불어오는 가운데 이런 곳을 거닐고 있으니, 마치 무릉도원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 대협, 계 선생님, 그리고 우 형님. 저희 위씨 가문의 장원 풍경이 무척 아름답지 않습니까?”
연비와 우패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계연이 먼저 감탄사를 던졌다.
“풍광이 무척 수려하군요. 마치 무릉도원에 온 듯합니다. 위씨 집안 이외의 사람들은 이런 평안함을 누릴 수 없는 게 안타깝네요.”
위명은 그 말을 듣고 계연을 좀 더 주시했다.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태가 불안하여 저희도 그저 이곳에서 몸을 사리고 있을 뿐입니다. 위씨 집안은 지켜야 할 사람도 많고 가업도 큰 데다, 굳이 저희에게 대업을 떠맡을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의협심을 발휘하는 것도 실은 여러모로 고심해야 하는 일이지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일행은 곧 장원의 정당(正堂)에 다다랐고, 위명은 근처의 한 하인에게 일러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하인이 재빨리 뛰어가 정당 안에 앉은 집안 어른들에게 비검객 일행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전했다. 위명이 계연 일행을 데리고 정당에 도착하자, 안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입구까지 나와 맞이했다.
위씨 집안의 가주는 위명의 부친인 위헌(衛軒)으로, 그는 60이 넘은 나이였지만 무공을 수련해서인지 여전히 체격이 건장했다. 모두가 한바탕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오늘 계연의 일행이 방문한 목적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 차를 한입 마신 뒤, 마침내 위헌이 먼저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연 대협, 방금 명이에게 일러 저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무자천서를 가져오라 했으니, 곧 세 분께서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듣자 하니 연 대협께서는 몇 년간 남쪽에서 검을 수련하며 적지 않은 고수들에게 도전했었다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전에는 제가 너무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무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싶습니다.”
연비의 말을 듣고 위헌은 더욱 흥미가 생긴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대체 어느 무림 고수분께 진 것입니까?”
“진 적은 없습니다.”
위헌은 웃으며 속으로 연비가 민망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바로 그때, 위명이 붉은 나무 상자를 가지고 들어오자 위헌은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자자, 어서 보세요. 이게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무자천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