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운중유몽(雲中游夢)>
“자자, 어서 보세요. 이게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무자천서입니다.”
위헌은 직접 나무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서책을 보여주었다. 맨 앞 제목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었다.
“계 선생님, 먼저 보십시오!”
연비는 계연이 먼저 보도록 양보했고, 우패천도 목을 쭉 늘려 자세히 보려 애쓰며 계연이 먼저 볼 수 있도록 비켜섰다. 그러자 위씨 집안 사람들은 계연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계연이 상자 안의 서책을 바라보자, 그 위에 거칠게 쓰인 커다란 글자가 나타났다. 서책을 집어 몇 장을 뒤적여보니, 제목을 적은 필적과 같은 모양의 글자가 그 안의 내용을 채우고 있었다.
진짜로 책을 읽는 모습과 아무렇게나 뒤적이는 모습은 큰 차이가 있었다. 계연은 이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정말로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읽는 것 같았다.
“계 선생님, 이 책 안에 글자가 있습니까?”
연비가 이렇게 묻자, 계연은 그와 위씨 집안 사람들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 서책은 어쨌든 위씨 집안의 물건이니, 계연도 아무렇게나 말할 수 없어 사실대로 대답했다.
“있어요. 서책의 이름은 <운중유몽(雲中游夢)>이고, 누군가의 전기(*傳記: 개인 일생의 사적인 기록)예요.”
“<운중유몽>!”
“<운중유몽>이라고?”
위씨 집안 사람들과 연비를 비롯한 우패천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위씨 집안 사람들은 계연을 바라보며 약간 괴이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 세월 누구도 이 서책 위의 글자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에 위씨 집안 사람들도 이 책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있었는데, 돌연 누군가 나타나 글자가 있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서책의 이름을 말하기까지 하니, 그들은 아무래도 믿기가 힘들었다.
사실 위씨 집안 사람들은 놀랍고 기쁘다기보다는, 계연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정말로 속이고 있는 것일지라도, 연비가 저 서생과 한통속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위헌과 위명은 의심이 들었지만, 위헌은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계 선생님, 이 책이 정말 <운중유몽>이라 적힌 전기가 맞습니까? 이 책은 위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인 데다, 집안 어르신들께서는 모두 이것이 대단한 무공비적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위씨 집안의 선조께서 직접 집필하셨다고도요…….”
계연은 위헌을 향해 웃어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이 책은 무공비적도 아니고, 책을 쓴 사람의 성도 위씨가 아니라 중평휴(仲平休)라는 이름이에요. 보아하니 다른 나라의 한 도사(道師)였던 것 같네요.”
“예? 위씨가 아니라고요?”
그의 말에 위씨 집안 사람뿐만 아니라 연비와 우패천도 깜짝 놀랐다.
위헌은 눈썹을 찡그리며 의혹 어린 눈길로 계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제 자기가 중평휴의 후손을 알고 있다고 하겠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비록 이 무자천서에 흥미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을 속여가면서까지 갖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만약 허락해주신다면, 이 자리에서 한번 읽어드리지요.”
어쨌든 그들 집안을 찾아온 손님이었으므로, 위씨 집안 사람들은 속으로 어찌 생각하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위헌은 계연의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간 누구도 서책 위의 글자를 보지 못했는데 오늘 선생님께서 진상을 밝혀 주시니, 저희로서는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서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다만, 저희가 한 가지 무리한 부탁이 있습니다만…….”
연비는 눈썹을 찡그리며 위씨 집안 사람들, 특히 위헌과 위명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계 선생님의 말씀을 그다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패천은 오히려 그들을 비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운중유몽>이라는 책에 더욱 흥미가 생겼을 뿐이었다.
위헌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계연은 이미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괜히 먼저 입을 열었다가 저들의 의심이 더욱 깊어질까 봐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혹시, 선생께서 책을 다 보신 후에 그 안의 내용을 저희에게 다시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저희도 이 서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예,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가 말로 설명하면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하실 테니, 차라리 적어드릴까요?”
“예, 정말 감사합니다!”
계연의 제안을 위씨 집안 사람들은 당연히 쌍수 들고 환영했다.
“어서 가서 계 선생님께 필묵(*筆墨: 붓과 먹)과 벼루, 종이를 가져다드려라.”
위헌은 이렇게 하인에게 분부한 후, 다시 공손한 태도로 계연에게 말했다.
“선생님, 앉아서 천천히 읽으십시오. 만약 저희 집안 선조께서 남기신 이 보전(寶典)을 기록만 해 주신다면, 저희 위(衛)씨 가문은 결코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위헌의 태도는 조금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이 공손했으나, 그 속마음이 어떨지는 오직 스스로만이 알 것이었다. 게다가 계연이 분명히 이 책은 중평휴라는 사람이 썼다고 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위씨 집안 선조가 남긴 것이라고 말하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처럼 선조가 썼다는 직접적인 말을 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계연은 굳이 그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책을 들고서 원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는 천천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연비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따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하인이 쟁반을 받쳐 들고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준비해왔다. 선지(宣紙)만 한 뭉텅이가 쟁반에 올려져 있었다.
계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며 여기에 내려놓으라 손짓했다.
연비는 위씨 집안 하인이 들고 온 쟁반을 받아들고 직접 문방사우를 내려놓았고, 선지를 잘 편 다음 다시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누가 보아도 공경하는 어른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계연은 여전히 눈을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책을 한쪽에 내려놓은 다음 다른 손으로 붓을 들었다. 그러고는 무척 자연스러운 태도로 붓에 먹물을 적셔 잘 눌러놓은 선지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글자는 아주 작았지만, 무척 세밀하고 정교했다. 마치 커다란 글자를 크기만 줄여놓은 것처럼 조금도 뭉치거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그가 처음 쓴 몇 글자만 보고도, 위씨 집안 사람들은 이 계 선생님이 서법(敍法)의 대가임을 알 수 있었다.
옛말에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계연이 이런 신묘한 서법을 가진 것을 보고 위씨 집안 사람들은 속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수정했다.
“맑은 바람을 타고 구름처럼 한가롭게 세상 곳곳을 거닐며, 백 갈래의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고 우뚝 솟은 뭇 봉우리 사이를 주유(周遊)했다. 별빛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어 사방을 돌아보니, 천산만수(千山萬水: 수없이 많은 산과 강)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계연이 점차 더 많은 글자를 써 내려감에 따라, 모든 이들은 글자보다는 책의 내용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단순한 기록일 뿐으로, 천록서(天籙書)가 가진 진의(眞意)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탈하고 대범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 사람들은 글을 읽으며 점차 어떤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노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위로는 흐르는 은하수를 관찰하고, 아래로는 유명(*幽冥: 저승)과 현황(*玄黃: 천지(天地))을 굽어보았다. 이에 나는 수선자(修仙者)로서 마음이 이끌려 혼이 몸 밖으로 나가 노니는 듯한 경지에 이르렀다…….”
계연이 계속 책의 내용을 써 내려가자, 그제야 계연을 둘러싼 위씨 집안 사람들은 이 내용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선인(仙人)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연비와 우패천은 당연히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 무자천서는 어떻게 보아도 결코 평범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위씨 집안 사람들은 서로를 몇 번 쳐다보다가 다시 종이 위의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계연은 이때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원래는 이 <운중유몽>이 특별할 것 없는 개인의 여행 기록이라고 여겼었다. 비록 수선자가 남긴 서책이기는 하지만, 보통의 전기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내용을 읽어감에 따라 계연은 자신의 정신이 어느새 천록서 안의 기록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를 유람하는 듯한 초탈함에 이끌렸고, 현묘한 힘이 그의 마음에서 요동치며 퍼져나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의식 세계에서 <운중유몽>의 수려한 세상을 재현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맑은 바람을 몰아 구름을 타고서,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롭게 노닐었다.
계연의 신체와 의식이 두 가지 개체로 분리되며, 한쪽의 계연은 책장을 넘기며 붓으로 글을 써 내려갔고, 다른 한쪽은 취한 듯 꿈인 듯 오묘한 의식의 경계를 헤엄쳤다.
“연, 연 동생…… 주위를 좀 둘러보게…….”
우패천이 별안간 연비의 팔을 툭 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에 연비가 종이에서 시선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는 곧이어 얼어붙은 듯이 온몸을 굳혔다.
위씨 집안 사람들도 우패천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이어 그들은 입을 쩍 벌리고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히 정당(正堂)의 응접실에 서 있었지만, 주위에는 어느새 옅은 안개가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뿌옇게 서린 안개 사이로 광활한 세상이 얼핏 엿보였다. 곧이어 벽과 천장이 사라지며 수려한 자연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쿠르릉!
뒤이어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천둥소리가 들려오자, 위씨 집안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며 몸을 구부렸다. 연비와 우패천도 마찬가지였다.
솨아아아……!
주위로 푸른 바다가 넘실대며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동시에 마치 그들이 조그만 쪽배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의 풍경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흐름도 그에 따라 변하여,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설원에 있다가도 어느새 빨간 꽃봉오리가 피어있는 초원에 둘러싸여 있기도 했다. 머리 위의 별들은 밝은 빛을 내뿜었고, 동시에 천둥과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한바탕 꿈이었을 뿐이구나!”
계연이 마침내 붓을 내려놓자, 그들을 둘러싼 기묘한 풍경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응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마침내 ‘깨어날’ 수 있었다.
“좋은 책이구나, 정말 대단한 책이야! 이 책은 현묘한 선법(仙法)이 적혀있지는 않지만, 확실히 보전(*寶典: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제가 평생에 걸쳐 본 천록서 중 이 책이 가장 뛰어나군요!”
계연은 지금 책을 읽고 난 후의 감동에 무척 흥분해 있었다. 이에 그는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때때로 <운중유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