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계역(界域)을 건너는 나룻배
계연은 대답하지 않았고, 응약리는 가볍게 대꾸했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너는 그저 헤엄만 치면 된다.”
계연은 고개를 저으며 소매를 한번 떨쳤다. 그러자 검은 나무 탁자가 나타났고, 뒤이어 필묵과 종이, 벼루 등의 문방사우가 그 위에 놓였다. 때때로 빛나는 늑대 털로 된 붓도 당연히 그 가운데 있었다.
“이런 기분과 경치라니, 그야말로 ‘운중유몽(*雲中游夢: 구름 속에서 노니는 꿈같은 풍경)’이네요. 강신마마는 편하게 계세요. 저는 글을 좀 써야겠어요.”
계연은 종이를 펼쳐놓고 문진을 올려 잘 고정했다. 한쪽에 있던 응약리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서서 손가락을 벼루에 대고 한번 툭 치자, 가는 물줄기가 모여들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넓은 소매를 흘러내리지 않게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계 숙부님, 저희는 이제 통천강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동해에 있으니, 계속 절 강신마마라고 부르시면 남들이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냥 약리라고 불러주세요!”
응약리의 말에는 이유가 타당했다. 비록 계연은 그녀에게 존칭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하기는 했지만, 늙은 용 일가와의 관계는 막역하다 할 수 있으니 그녀의 말대로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다고 해서 지금 바로 호칭을 고쳐 부르지는 않았고, ‘일리 있는 말이구나’라고 대답하고서 다시 붓을 들어 올렸다.
응약리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먹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계연이 새로 간 먹물에 붓을 찍어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운중유몽>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는 위씨 집안 이들을 위해 기록을 남길 때처럼 단순히 옮겨 적지만은 않았고, 자신이 깨닫고 느낀 바를 덧붙였다.
그가 글자를 쓰고 먹물이 마르면 곧바로 종이 위에서 글자가 사라졌다. 계연은 지금 천록서를 쓰는 것이었다.
천록서를 만드는 정통적인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으나, 계연은 선기(仙器)를 지닌 데다 계연 자신의 깨달음이 더해져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다.
계연은 글자를 무척 느리게 써 내려갔고, 이때는 어떤 특별한 현상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응약리는 진지하게 그가 쓰는 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어느새 때는 이미 섣달 마지막 날이 되었다.
섣달 그믐날 저녁, 계연은 여전히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탁자 위에서 천천히 글을 쓰고 있었다. 먹물이 떨어질 즈음이 되면 응약리가 즉시 먹을 갈았다.
쿠르릉…… 콰광!
휘오오- 휘이이-!
하늘에서는 번개가 내려치고 광풍이 불어닥쳐, 해수면의 풍랑이 더욱 거세졌다. 그런데도 비바람은 계연의 책상 위를 침범하지 못했다.
우르릉…….
쏴아아아!
비바람이 점차 거세게 불어오던 순간, 계연은 글의 마지막 몇 글자를 써 내려갔다.
마지막 글자를 쓴 계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상공에는 어느새 천둥과 벼락이 번갈아 치며 바다에 광풍이 불고 있었다.
“오늘은 섣달 그믐밤이니, 수행에 있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응약리는 이때 책상 위의 글을 보고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래서 계연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고래를 들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 숙부님, 제가 저 비구름을 전부 흩어지게 만드는 게 어떨까요?”
그녀는 강신(江神)인 데다 용족이기도 해서, 정말로 하고자 한다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괜찮다. 바다에서 이렇게 험악한 번개 폭풍을 또 언제 만나보겠어.”
계연은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소매를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 안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금색 빛은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면서 구름 사이로 날아 들어갔다.
솨앗!
곧 금빛 번개가 하늘 가장자리에서 펼쳐지며, 그 주위로 번개가 아른거리는 커다란 네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구사박매(*驅邪縛魅: 삿된 것을 물리치고 속박하다)’라는 글자였다.
응약리는 예전에 자신의 오라버니가 했던 이야기, 천수호의 고천명이 제 오라버니에게 들려준 후 오라버니가 자신과 아버지에게 전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는 하늘에 나타난 네 글자를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계 숙부님의 뇌주(*雷咒: 번개 저주) 칙령이야!’
그리고 마치 그녀의 생각에 답하기라도 하듯, 뇌주가 모습을 드러낸 찰나 사방의 천둥 번개가 더욱 거칠게 날뛰었다.
번쩍……!
우르릉…… 쾅!
치지직……! 쾅!
번개가 뇌주를 향해 떨어지며 그 속도도 점차 빨라졌고, 내려치는 벼락의 양도 많아졌다.
구름 밑의 하늘과 해수면은 쉴새 없이 내리치는 번개로 인해 사방이 무척 밟아졌다. 그렇게 약 반 각이 지나자, 벼락의 기세가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계연이 다시 손을 한번 휘두르자, 보기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는 뇌주가 다시 그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게연은 몸 안의 오기(五氣)가 원만해진 다음부터 이 뇌주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맨 처음 묵영의 흩어져가던 물의 정기(精氣)와 번개의 힘을 흡수한 것 말고도, 이제는 다른 번개를 끌어올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전제 조건은 번개의 규모가 충분히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뇌주를 전개할 때 입는 자신의 손해가 흡수하는 벼락의 힘보다 더 커지기 때문이었다.
“계 숙부님, 이제 비구름을 없앨까요?”
“응, 부탁한다.”
응약리는 그를 향해 웃어 보인 다음, 곧바로 공중으로 솟구쳐 거대한 교룡으로 변신했다. 교룡의 몸에서는 스스로 내는 붉은빛 말고도 다채로운 색깔의 신광(神光)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유유히 공중으로 날아올라 곧바로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어흥-!
용의 포효가 구름 사이로 울려 퍼지며 용 꼬리가 구름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응약리가 일으킨 힘에 흩어진 구름들은 모두 용 꼬리처럼 형태가 변했다.
우르릉-!
상공의 구름층은 마치 고요한 수면이 누군가에 의해 휘저어진 것처럼, 이리저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는 이미 그쳤고 겹겹이 쌓인 구름도 흩어졌다. 그러자 그 위로 숨겨져 있던 별이 뜬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응약리는 번개와 비바람을 멈춘 뒤에도 바로 내려오지 않고, 하늘을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약간 위쪽의 먼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거대한 배 한 척이 있었는데, 그 전체 길이가 족히 1리(*약 400m)는 되고도 넘을 듯했다.
계연의 시선도 먼 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飛舟)으로 향했다. 번개와 폭풍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서, 그는 이런 배가 상공에 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배의 몸체에는 은은한 법광(法光)이 흐르고 있었다.
“계역(界域)을 건너는 용도의 나룻배 같은 거구나.”
반면, 그 배 위에 있던 이들은 아래쪽에서 들려오던 번개와 비바람 소리가 천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그들은 거대한 교룡이 구름을 뚫고 솟구치더니, 비구름을 모두 몰아내 버린 것을 발견했다.
이 계역 나룻배는 수행자들이 만들어낸 원거리용 탑승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수행자들은 아니었고, 수행길에 막 들어선 이들이나 심지어는 범인(凡人)들도 적지 않게 타고 있었다.
이때 뱃전에 있던 사람들은 전방에 있는 이교(*螭蛟: 뿔이 없는 암컷 교룡)를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흥분에 차올랐다.
“용! 용이다! 어서 봐봐, 엄청 커!”
“어디?”
“저기! 저쪽에!”
“이리 와! 가서 사형(師兄)도 불러와!”
“세상에, 용이 원래 저렇게나 컸단 말이야? 저건 교룡인가, 아니면 진룡인가?”
그렇게 뱃전에는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탑승객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그 배에 타고 있던 진인(眞人)이나 수사(修士)들이 사람들을 통제하려 소리쳤다.
“전부 조용히 하십시오! 바다에 있는 용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됩니다!”
다른 진인 하나가 그렇게 소리친 수사의 곁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사형, 저 교룡은 뿔이 없고 무지갯빛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전설 속의 이교인 것 같죠?”
“그럴 거야. 저런 종류의 용은 대체로 성격이 온화한 편이라고 들었어. 상대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던 때, 그 이교가 눈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용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응약리는 담담한 눈길로 배를 바라본 다음,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고래의 등 위에서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때 배 위에 있던 이들 중 시력이 뛰어난 수사는 그제야 바다에 거대한 고래가 떠 있음을 발견해냈다. 그 위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고, 방금 수려한 옷을 입은 여인으로 변신한 이교 말고도, 뒷짐을 지고 이쪽 배를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뒷짐을 진 손에 붓을 한 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책상은 그 사람을 위해 놓여있는 듯했다.
응약리가 계연의 곁으로 두 걸음 다가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계 숙부님, 저것은 분명 경계를 건너는 데 사용되는 비선(飛舟)이에요. 저 위에는 약 수백 명의 사람이 타고 있고, 걸린 금제(禁制)도 선문(仙門)의 것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쪽 선문인지는 모르겠어요.”
“오, 그렇구나.”
계연은 이렇게 답하며 다시 상공의 배를 관찰했다. 계연의 얼굴에는 그다지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연은 속으로 무척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저 배에는 비록 금제가 걸려 있었으나, 계연이 법안으로 관찰해본 결과 적지 않은 범인(凡人)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저 위에 요물이 있든 삿된 마귀가 있든 계연은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배에 탄 3분의 1 이상이 범인이었기에, 계연은 이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은 근방의 다른 현(*縣: 옛 지방 행정 구역)을 오가는 데에도 먼 길을 나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역을 오가는 비행선 위에 보통 사람들이 타고 있다니, 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약리야, 난 한 번도 계역을 오가는 배 위에 타본 적이 없는데, 저 배에는 항상 저렇게 보통 사람들이 많니?”
응약리는 다시 그 배로 시선을 던진 다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계 숙부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타본 적이 없답니다. 날 때부터 교룡으로 태어나서, 경계를 넘으려면 헤엄을 치거나 하늘을 나는 게 더 쉽거든요.”
“하긴……. 그런데 저들이 너를 꽤 두려워하는 것 같구나.”
응약리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저 배에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아마 저 사람들은 조금 전의 벼락과 폭풍을 제가 만들어낸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제가 중요한 수행의 돌파 구간에 있었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해 저를 두려워하는 거예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족은 쉬이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특히나 망망대해에서는 더욱 그랬다. 바로 밑이 그 용의 근거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근거지 주위에 용을 따르는 물의 족속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구나. 우리도 하는 게 좋겠어.”
“예!”
계연의 말을 듣고 응약리는 그가 건네는 붓을 받아 다시 붓걸이에 잘 걸어 두었다. 그러고는 계연을 따라 함께 그 배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