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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345화 (345/892)

345화. 은사께서 이곳에 사셨구나

벼락이 수차례 떨어졌기 때문에, 곳곳에 타고 그을린 흔적이 가득했다. 나무와 수풀에는 벼락으로 인해 불이 붙은 곳도 있었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불씨가 모두 사그라들었다.

벼락은 그쳤지만, 먹구름은 여전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비마저 쏟아져 내렸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 산군과 호운에게 있어서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 산군은 자신이 머물던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안 깊숙이 들어가자 머리 위에 종유석들이 몇 개 달려 있었다.

육 산군이 손가락을 종유석에 대자 그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동굴 전체가 낮처럼 환해졌다.

종유석 밑에는 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동굴 바닥이 거무스름한 데다 위에서 빛이 비치자, 연못은 마치 표면이 매끄러운 거울처럼 보였다.

육 산군은 둔갑에 성공한 후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연못에 비춰보니 그래도 감회가 남달랐다.

“아직 뭐가 모자란데.”

한참을 보던 육 산군은 머리 위를 더듬다가 그제야 그곳에 무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털이 옷으로 변화하던 순간, 비녀는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육 산군은 손가락 하나를 뻗어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짧은 팔길이 정도의 날카로운 발톱이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검지를 조각칼처럼 이용해 약간 휘어있는 그것을 정성껏 다듬었다.

잠시 후, 살짝 휜 모양의 하얀 비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질은 백옥같아 보이기도 하고 상아(象牙)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육 산군은 머리카락을 적당히 나누어 비녀를 꽂아 올렸다.

“이제 다 됐군!”

호운은 곁에서 육 산군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육 산군은 예전만큼의 압박감은 뿜어내지 않았다.

“육 산군, 이제 둔갑에도 성공했으니 곧 우규산을 떠나겠지?”

호운이 이렇게 묻자, 육 산군도 감개무량한 듯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우규산에 이렇게 오랜 세월 갇혀 살았는데, 이왕 사람이 되었으니 당연히 나가야지. 예전에 했던 약속은 잘들 지키고 있나 확인도 해야 하고…….”

여기까지 말한 육 산군은 고개를 숙여 호운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바로 떠나진 않을 거다. 수행과 마음을 좀 더 단단히 쌓은 다음에 나갈 거야. 뇌겁(雷劫) 때문에 입은 상처도 바로 낫는 게 아니니, 몸이 완전히 회복한 다음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육 산군은 호운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호운은 확실히 한숨 돌린 듯한 모습이었다. 계 선생님도 떠나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 데다가, 윤청도 떠난 후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육 산군마저 떠나면 자신은 무척 상심할 것이다.

“자, 너도 나와 같이 수련하자.”

이렇게 말한 육 산군은 몸을 돌려 동굴 입구 근처로 걸어갔다. 육 산군은 예전에 누워 자던 건초 위에서 다른 수선자들이 하듯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호흡을 천천히 조절했다.

호운도 그의 뒤를 따라 통통 뛰어가, 육 산군이 눈을 감고 호흡을 조절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육 산군이 등지고 앉은 동굴 벽의 움푹 파인 곳에는 계연이 그에게 주었던 ‘환골탈태’라는 글씨가 놓여 있었다.

‘나도 열심히 수련해야지!’

호운도 육 산군 옆에 엎드리고 앉아, 주위의 영기를 빨아들이며 수행을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솨아아 들려왔고, 우규산과 주변 마을 전체는 무척 고요했다. 누구도 오늘 밤 천둥 번개가 왜 그리 요란했는지, 깊은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 * *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계절이다. 지난밤 내내 장대비가 흩뿌려진 우규산은 촉촉이 젖어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석대 주위의 바싹 타버린 수풀과 나무들이 남긴 잿가루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 좋은 양분이 되었다. 어느새 땅에는 뭔지 모를 싹이 움텄고, 나무들은 새 가지를 뻗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을음 가득하던 회색 풍경은 점차 새로 태어난 초록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동안 육 산군은 뇌겁을 맞아 생긴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고, 둔갑한 지 고작 한두 달 만에 수행에 큰 진전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감고 수행하던 육 산군이 마침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신비한 빛이 그의 두 눈에 스쳐 지나갔다.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자, 호운은 어느새 곁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운이 밖에서부터 뛰어 들어왔고, 육 산군은 그에게서 나는 은은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여우는 밖에서 포식하고 온 모양이었다.

육 산군은 몸을 일으키며 호운에게 말했다.

“호운, 계 선생님이 사시는 곳에 데려다줘.”

“어, 지금 말이야?”

“응, 지금.”

호운은 고개를 끄덕인 뒤 동굴을 뛰쳐나가, 고개를 돌려 육 산군을 향해 말했다.

“나만 따라와!”

호운은 산길을 재빨리 내달리며 때때로 고개를 돌려 육 산군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육 산군은 느긋하지도 서두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놓치지 않고 그를 따라왔다. 이에 안심한 호운은 더욱 속도를 올려 뛰어 내려갔다.

육 산군은 계연을 무척 존경하고 따랐지만, 산에서 내려가기 어려운 모습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의 은사(恩師)가 사는 곳에 방문해보지 못했다. 매번 사부님이 직접 그를 보러 오기만 했었다.

그래서 육 산군이 그간 품고 있던 여러 소원 중에는 은사가 사시는 곳에 직접 방문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인간과 여우는 수풀이 무성하고 험한 산길을 마치 평지를 걷듯이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한 시진 내내 우규산을 내려온 그들은 마침내 산 외곽에 다다랐다.

그러자 육 산군은 보기 드물게도 조금 초조해졌다. 물론 그동안에도 바람을 부려 산에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지만, 그는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영안현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육 산군은 처음으로 우규산을 벗어나, 바깥의 도로 위에 발을 내디뎠다.

호운이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타는 이 길에서는 멀리 산간 마을이 바라다보였다. 육 산군은 뛰어난 시력으로 그 마을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햇빛에 말려놓은 동물 가죽이며 집마다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도 또렷하게 보였다. 이는 그에게 있어 무척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 도로에서 영안현까지는 수십 리도 채 남지 않은 거리였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산길이 아니라 평평한 땅이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영안현 밖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단의 대가인 윤재성이 머물던 영안현에는 그간 배움의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다. 심지어 다른 현에서 온 사람들조차 굳이 이곳까지 와서 공부하려 했기 때문에, 영안현에는 서생들이 흔하게 보였다.

그러나 육 산군이 입은 옷은 연한 황색이었고, 서생들이 많은 곳에서 눈에 띌까 봐 걱정스러워진 육 산군은 성에 들어가기 전에 손으로 소매를 몇 번 툭툭 쳤다. 그의 소매에는 아직도 검은 구름 문양이 남아있었으나, 옷 전체의 색깔은 연한 파란색으로 변해 누가 봐도 보통의 서생처럼 보였다.

영안현은 줄곧 조용하고 평온한 고장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떠들썩한 곳이기도 했다.

육 산군이 성에 들어서자 길을 바삐 오가는 행인들에게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며, 주루와 찻집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음, 점포에서 들려오는 호객하는 소리 등 생생한 삶의 소리가 성에 가득했다.

산중의 풍경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 육 산군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척 신기해하기도 하고 감격에 차기도 했다.

호운은 성안에 들어서자 장안법을 펼친 후, 조심스럽게 육 산군을 이끌며 이리저리 좌우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운, 왜 그래? 근처에 위험한 자가 있나?”

육 산군은 호운이 과도하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그가 아는 바로는, 이 현성의 성황신조차 호운에게는 손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휴, 산군 너는 몰라. 여기에 내 ‘숙적’이 있거든. 사실 그다지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만, 마주치면 무척 귀찮아져. 걔들이 없는 틈을 타서 빨리 가는 게 좋겠다. 천우방은 저쪽이야!”

‘숙적이라니?’

육 산군은 의혹에 서린 얼굴이었지만, 더 묻지 않고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국수 팝니다! 맛있는 국수 팝니다! 양 내장도 있습니다!”

천우방 밖에서는 손기노점의 주인이 큰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육 산군은 그쪽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곧 천우방으로 꺾어 들어갔다.

‘어쩌면 사부님께서 저기서 국수를 드셨을지도 몰라.’

그가 길을 걷는 동안, 몇몇 행인들은 누가 봐도 외지인인 육 산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육 산군은 그들을 향해 웃는 얼굴로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는 심지어 그가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계 선생님을 향해 “계 선생님,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는 장면을 생생히 떠올릴 수도 있었다.

육 산군과 호운은 곧 가장 안쪽 구석진 곳에 위치한 집에 다다랐다. 뜰 안에 있는 커다란 대추나무는 초록빛 화개(*華蓋: 옛날, 어가(御駕) 위에 씌우던 일산(日傘))처럼 작은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육 산군은 칠이 벗겨진 대문에 걸린 자물쇠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거안소각’이라 적힌 편액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사부님께서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편액의 색도 바랬고 떨어져 나간 부분도 있었다.

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육 산군은 호운처럼 담장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야에 차례로 석판이 덮인 우물, 돌 탁자와 그를 둘러싼 네 개의 의자, 그리고 소박한 뜰에 세워진 건물이 보였다. 주방 바깥에는 나무 덮개가 덮인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고, 뜰에는 밖에서 본 거대하고 잎이 무성한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자신의 은사가 사는 곳, 거안소각이었다.

비록 계연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그가 살던 기운이 남아있었다. 육 산군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속된 무리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 같은 분이 이런 곳에 사셨다는 것을!”

호운도 거안소각에 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는 우선 뜰을 한 바퀴 돌다가 육 산군의 말을 듣고는 돌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여기가 어디가 모자라서? 나는 거안소각이 무척 좋다고 생각해. 풍경도 좋고 조용하잖아.”

그러자 육 산군이 호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너도 수행에 진척이 있었다는 거야.”

이렇게 말한 육 산군은 돌 탁자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어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이 계절이면 원래 대추꽃이 만발해야 하는데, 이 대추나무는 푸른 잎이 울창하기만 할 뿐 꽃을 피우지는 않았다.

잎이 무성한 깊은 곳에는 불길처럼 새빨간 열매가 숨겨져 있었다. 호운이 말하기를 무척 신비로운 나무라고 하였는데, 오늘 직접 본 대추나무는 보통 나무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릴 뿐, 어떤 특이한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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