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스승을 대신해 연을 잇다
육 산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몸을 곧게 세우고 두 손을 모은 뒤, 허리를 굽혀 대추나무를 향해 예를 올렸다.
“저는 육 산군이라 합니다. 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계속 우규산에서 수행하다가, 마침내 큰 진전을 이루어 오늘 거안소각에 방문했습니다.”
육 산군은 자신의 은사가 그에게 아무 데서나 자신이 제자인 것을 밝히고 다니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이곳이 거안소각임에도 불구하고 계연을 선생이라 칭했다.
호운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육 산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육 산군이야. 우규산에 사는 그 호랑이 말이야.”
육 산군은 계연도 자주 거론한 적이 있어, 대추나무도 그를 직접 보지는 못했을 뿐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스스로 찾아와 인사한 것을 보고, 대추나무도 조금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솨아아…… 솨아아……!
가지가 흔들리며 뜰에 맑은 바람이 불어왔고, 주위에 은은한 영기(靈氣)가 감돌았다.
그때 호운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모습으로 대추나무 높은 곳을 올려보고 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무성한 대추나무 가지 사이로 붉은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새빨갛고 커다란 대추 알이 떨어졌다.
육 산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대추는 주먹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손에 쥐면 옥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표면은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이었으며, 자세히 관찰하면 반짝이는 빛이 감돌았다. 대추에서는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듯한 맑고 은은한 향기가 났다.
‘이게 바로 호운이 말했던 화조(火棗)구나. 과연 비범하군.’
육 산군은 대추를 자세히 관찰하다가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입을 벌려 대추를 연기로 감싸듯이 빨아들였다. 이는 그가 대추를 먹어 삼킨 것이 아니라, 잘 보관해놓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소매를 몇 번 털어낸 뒤 돌 탁자 앞에 앉았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거안소각의 고요함을 한껏 느꼈다.
육 산군은 그곳에 한참 앉아 있다가 해가 서쪽 산으로 넘어간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호운은 돌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호운은 이전에도 자주 이곳에서 이렇게 잠이 들었었다. 계연이 오지 않던 몇 년 동안, 호운은 가끔 이곳에 와서 잠을 청하고 가기도 했다. 호운은 심경이 복잡하거나 답답할 때도 자주 대추나무 아래에 와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육 산군은 호운을 깨우지 않았다. 앞으로 하려는 일은 여우를 데리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간 호운이 열심히 수행하긴 했지만, 육 산군이 보기에는 아직도 한참 먼 것이 사실이었다. 호운이 더욱 노력할 수 있도록 호운에게는 약간의 자극이 필요했고, 고립감을 느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터였다.
휘이이……!
맑은 바람이 불어와 대추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스스슥…… 솨아아……!
대추나무 가지가 가볍게 흔들렸다. 육 산군은 온종일 이곳에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고요하고 편안한 기운은 대추나무가 육 산군을 인정하게끔 했다.
육 산군은 아무런 말 없이 대추나무를 향해 공수한 후,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다시 거안소각을 향해 장읍례(*長揖禮: 제자가 은사(恩師)를 만났을 때 올리는 정중한 인사)를 올린 뒤 성큼성큼 떠나갔다.
그는 점괘를 치는 데에 특별한 능력은 없었지만, 예전에 만났던 그 소협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희미한 감응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있을 만한 방향을 잡고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육 산군이 천우방을 나오자, 약 쉰 살 정도로 보이는 손기노점의 주인장이 노점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육 산군은 그가 오전에 지나치면서 본 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자리를 정리하시는 건가요?”
육 산군은 걸음을 멈추고 주인장을 이렇게 향해 물었다. 마침 자신이 사람이 된 후로 아직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면은 밀로 만들었기 때문에, 육 산군에게는 처음 먹는 채식 요리였다. 어차피 조만간 먹어보려 했던 요리였으니, 아무래도 은사님의 집 근처에서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푸른 옷을 입은 서생이 이렇게 물어오자, 손복(孫福)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해도 졌고 가족들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슬슬 돌아가야지요. 하지만 손님께서 국수를 드시고 싶으시다면, 한 그릇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직 재료도 남았거든요.”
육 산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무슨 면 요리가 있습니까?”
손복이 다가와 그가 앉은 식탁을 행주로 닦으며 대답했다.
“손님은 천우방 사람이 아니시군요. 저희 손기노점은 몇 대째 운영 중인데, 항상 노면(*鹵面: 육류·달걀 따위로 만든 국물에 녹말가루를 풀어 만든 진한 국물을 부어 만든 국수)만 팔아왔습니다. 내장탕도 맛있고, 먹어본 분들은 전부 맛있다고 하십니다! 저는 아버지께 직접 가르침을 받아서 맛도 아무런 차이가 없지요!”
“하하, 좋습니다. 그럼 노면 하나랑 내장 한 접시 주시지요.”
육 산군이 웃으며 음식을 주문했다.
손복은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손님. 노면은 아직 있는데 내장이 이미 다 팔렸네요.”
“다 팔렸다고요?”
육 산군은 눈썹을 찡그리며 이렇게 되물었다. 도를 닦는 호랑이 요괴로서 그의 후각은 당연히 무척 뛰어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양 내장 냄새를 또렷이 맡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요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육 산군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캐묻지 않았다.
“그럼 국수만 한 그릇 먹겠습니다.”
“예에! 얼른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노면이 육 산군의 식탁에 놓였다. 그러나 육 산군은 한 번도 젓가락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통 어떻게 사용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손복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와서 물었다.
“손님, 젓가락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집을 수가 없습니다!”
육 산군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예? 제가 좀 보겠습니다!”
손복은 육 산군의 손에서 젓가락을 받아든 다음, 하나씩 툭툭 치며 휘둘러보다가 공중에서 무언가를 집는 시늉도 해보았다. 젓가락은 부러지거나 휘어진 곳 없이 곧고 튼튼했다.
“괜찮은데요? 젓가락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손님.”
육 산군은 웃으며 젓가락을 받아 공중에서 몇 번 집었다 폈다 해보았다. 그 움직임은 무척 자연스러워서, 지금 막 배웠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그렇네요.”
손복은 괴이쩍게 여기면서도 ‘맛있게 드세요’라고 대답한 후 다시 노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화덕의 불을 끄고, 조리대를 닦고, 그릇들을 정리한 후 손복은 마침내 남아있는 재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국수 그릇에 머리를 파묻고 열심히 먹고 있는 서생을 향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손님, 실은 여기 양 내장이 한 그릇 남아있습니다. 아직 드시고 싶으시다면 손님께 팔겠습니다.”
육 산군은 ‘과연 내가 틀리지 않았군’이라고 생각하며 국수를 씹어 삼킨 뒤, 손복을 향해 물었다.
“그럼 조금 전에는 왜 팔지 않은 건가요?”
“하아…….”
손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웬일인지 오늘따라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좀 긴데, 그래도 듣고 싶으시다면 제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육 산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복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
“실은 예전에 여기 천우방에 기인(奇人)이 한 분 사셨는데, 모두 그분을 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육 산군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정말로 사부님과 연관이 있는 곳이었다니!’
“이 근처 사람들은 모두 계 선생님을 기인이라고 일컬었지만, 실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계 선생님이 무척 신비로운 분이라고 믿으셨어요. 선생님께서 국수를 드시러 오실 때마다 무척 공손한 태도로 대접하셨었지요. 이에 계 선생님께서도 그 마음을 아셨는지, 고향을 떠나시기 전에 윤 문곡(文曲)께 부탁해 대추 몇 알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참, 선생은 보아하니 글 읽는 분이신 것 같은데, 윤 문곡이 누구신지는 아시겠지요?”
“당연히 알다마다요. 윤 문곡은 우리 대정국 문인들의 거두(巨頭) 아닙니까! 삼원급제(*三元及第: 전시까지 세 번 연달아 장원에 급제하는 것)를 하신 문곡성(*文曲星: 학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 저명한 문인을 이르기도 함)의 현신인 분이시지요.”
그간 호운이 윤씨 집안의 일에 대해 적지 않게 떠들어댔으므로, 육 산군도 당연히 알 건 다 알고 있었다.
“예, 예, 바로 그 윤 문곡 말씀입니다! 그때 그분께서 대추를 전달해 주셨었는데, 제가 먹어보니 무척 신선하고 달았어요. 몸에도 무척 좋아서, 그 후로 저희 집안사람들은 감기조차 걸린 적이 없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 대추 덕분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어쨌든 아버지께서는 항상 저희에게 계 선생님은 보통 분이 아니라고 항상 말씀하셨었어요. 그분께서 우리 집 노면과 내장 요리를 좋아하시니, 장사가 얼마나 잘 되든 간에 항상 노면과 내장은 한 그릇씩 남겨 놓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어느 날 오셨는데 대접할 게 없으면 안 된다고요. 만약 오지 않으신다고 해도, 한 그릇일 뿐이니 집에서 우리가 먹으면 되니까요.”
손복은 천우방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어휴, 언제 또 세월이 이렇게 흐른 건지!”
이에 육 산군이 눈썹을 찡그리며 이렇게 물었다.
“그럼 왜 제게 파시는 겁니까?”
그러자 손복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계 선생님이 오지 않으신지 이미 몇 년이나 되었거든요. 아버지께서는 2년 전에 돌아가셨고요. 그래서 그 규칙을 지키는 것도 이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손복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면을 먹던 손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지금 보니 도대체 그가 언제 면을 다 먹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주인장, 이왕 부친께서 남기신 규칙이라면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장은 먹지 않겠습니다. 이 국수는 얼마입니까?”
손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삼 문(文)입니다.”
육 산군은 가슴팍을 뒤져 동전 세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일어서서 정중하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돈은 여기에 놓고 가겠습니다. 노면이 정말 맛있군요. 이전에는 항상 고기만 먹었었는데, 이건 제가 처음 먹는 국수 요리입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손복도 그를 향해 공수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고기만 먹었다고? 부잣집 서생인가 보군.’
손님이 떠나자 그는 동전을 챙긴 뒤 그릇과 젓가락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날 밤, 수레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손복은 오늘 번 돈을 세어보고자 돈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 울퉁불퉁한 금덩어리가 하나 들어있었는데, 손가락 두 개를 동그랗게 모은 듯한 크기에 무게도 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