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옛일은 옛일로 묻어 두자 (2)
육 산군은 한 손을 들어 올려 곤란하다는 듯이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뒤이어 그의 두 눈이 반짝 빛나더니, 그는 웃는 얼굴로 낙응상을 향해 다시 한번 공수했다.
“제 이름은, 육 산군입니다.”
그러고는 손을 내려놓고 다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의 모습은 곧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찻집 안에서는 설서 선생의 이야기가 막 본론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홉 명의 협객들이 영안현으로 왔다가, 관아의 방문을 보고 함께 우규산으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한편 ‘육 산군’이라는 세 글자를 들은 낙응상은 거대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온몸을 떨며 입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육 산군…… 저자가 육 산군이라고? 우연일까? 설, 설마…….”
옛날에 호랑이 요괴를 얼굴 앞에서 맞닥뜨렸을 때의 그 공포가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릿속에 밀려왔다. 조금 전 설서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추억들보다 훨씬 또렷하고 생생했다. 심지어 그때 생긴 어깨 위의 상처에서 저릿저릿한 통증이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우규산의 산신당 앞에서, 맹호(猛虎)와 그들 아홉 사람은 맹세했었다.
“훗날 아홉 사람 중 누구라도 악행을 저질러 백성을 혼란케 한다면, 산군의 방식대로 벌하는 거지. 그땐 이들을 잡아먹고 머리를 잘라도 천도에 어긋나지 않을 거야.”
그해, 계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낙응상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동안 아홉 명의 협객들은 그것이 계 선생님께서 그들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생각해 낸 계략이라고 여겼다. 설마하니, 그 호랑이 요괴가 둔갑하여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산했을 줄이야!
낙응상은 돌연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온몸에 한기가 스며드는 순간, 그녀는 육 산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 서생은 사람을 잡아먹고 뼛조각 하나 뱉어내지 않는 호랑이 요괴였던 것이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마님,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본 하인들은 다시 태기가 동한 줄 알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아니다, 괜찮다!”
낙응상은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자신의 맞은편에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눈에 익은 듯도 한 어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하얀 장포를 입고 수염을 기르지 않은 단정한 용모의 서생이었다.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고, 머리 위에는 묵옥(墨玉) 비녀를 꽂고 나머지는 등 뒤로 늘어뜨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인 두 명은 누군가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너는 누구냐?”
“누가 여기 앉으라 했지?”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그러자 두 아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들은 하인들을 보다가 다시 낙응상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엄마, 이 선생님께서는 계속 저희와 함께 앉아계셨는걸요? 또 엄마를 안다고도 하셨는데…….”
“맞아, 계속 여기 앉아 계셨었어요!”
‘계속 여기 앉아 있었다고?’
누군가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에 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낙 여협, 어느새 20년이 되어가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조금 전 있었던 일로 너무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혼인하여 아이를 키우는 것은 보통 백성들의 정도(正道)이고, 무슨 대의를 거스르는 일도 아니니까요. 그때 했던 맹세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 육 산군이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거예요. 아마 이번 만남이 생애 마지막 만남일 거예요.”
비록 낙응상이 줄곧 덕승부에 머물기는 했지만, 그동안 계연은 한 번도 그녀와 만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몰랐다.
“당, 당신은 계 선생님이시군요?”
낙응상은 마침내 그가 누군지 기억해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맞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처럼, 그 맹세를 할 때 제가 자리에 있었으니 그것이 이행되는 순간에도 제가 있어야겠죠. 육 산군의 말처럼, 옛일은 이제 옛일로 묻어 둡시다. 하하, 그럼 몸 조심히 지내세요!”
이렇게 말하며 인사를 올린 계연은 찻집을 떠났다. 낙응상과 하인들, 그녀의 두 아이가 밖을 내다보니 계연의 하얀 옷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계연은 어느새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낙응상은 넋이 나간 얼굴로 계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안심하는 동시에, 또 어딘가 허전하기도 한 느낌을 받았다.
계연은 어쨌든 육 산군의 사부였으므로, 자기 제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떤 일들은 그도 감응(感應)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굳이 육 산군을 따라가지 않고 그저 적당한 곳에서 육 산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계연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자신과 관계된 사소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때때로 머릿속에 지명이 떠오르거나,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게 되기도 했다.
* * *
옥창현.
육씨 일가가 운영하는 운각은 그곳에 있었다.
운각은 그간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냈다. 비록 강호에서 운각의 지위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옥창현에서 육씨 형제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옥창현 사람들 가운데 육승풍과 육승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간 두 사람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운각의 가업을 안정시켰고, 운각에 소속된 이들 또한 점차 안정을 찾아 이제는 온전히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육승운에 비해, 육승풍의 명성은 그다지 퍼지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대부분 그가 이미 모든 예기(銳氣)를 잃고 무공에 완전히 손을 놓았다고 알고 있었다.
이날 운각의 한 창고 밖에서는 마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창고를 드나들며, 안쪽에서부터 비단이나 술 등의 물품을 마차로 실어다 날랐다. 그중에는 거대한 옥석(玉石)도 있었다.
“좋아, 다 됐다!”
육승풍은 직접 하나하나 대조해본 다음, 창고의 문을 다시 잠갔다.
그러고는 손을 휘둘러 다른 이들을 모아 함께 마차에 오른 뒤, 천천히 저택을 향해 돌아갔다.
저택 밖에서는 이미 육승운이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승운은 재빨리 육승풍에게 다가가 보따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사람을 보내 새로 고친 옷이다. 지금 입은 이 거적때기는 당장 벗고, 도착하면 이걸로 꼭 갈아입어야 한다. 네가 뭘 하러 가는 건지 명심해라.”
형님이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육승풍은 입을 삐죽거렸다.
“옷은 외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모두 강호인들인데다가 겨루는 것이 무공이지 옷도 아닌데요. 만약 옷만 알아보고 사람은 못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굳이 무공을 닦을 필요 없이 옷가게나 열면 되지요.”
“이 답답한 놈! 네 말만 들으면 무슨 원수를 찾아 복수라도 하러 가는 줄 알겠구나. 이전의 운각 소군자(*강호에서 육승풍의 별명)는 옷차림도 무척 중요시했었는데, 어찌 이렇게 변한 것이냐? 날 위해서라도 신경을 써라. 이 옷은 주(周)씨 집안에 방문할 때 꼭 입어라. 또 우리 운각을 위해 반드시 대회에서 네 진정한 실력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와야 한다!”
육승운은 짐짓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이에 육승풍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넨 보따리를 받았다.
“형님은 집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웬만한 일은 저도 혼자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육승운은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하하, 네가 그렇게 능력이 있으면 혼자 애라도 낳아 오지 그러냐? 어서 가라!”
육승풍은 약간 짜증이 났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채찍을 휘둘러 직접 마차를 몰고 떠나갔다.
옥창현은 본래부터 그다지 번화한 성이 아닌 데다가, 지금은 해가 막 뜬 참이라 길가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마차는 무척 빠르고 순조롭게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차에 앉은 육승풍은 말을 모는 동시에 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온몸에 진기를 순환시키며 무공을 닦는 것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전에 계 선생님께서 주신 대추는 확실히 보통 과일이 아니었다. 그간 그의 형인 육승운은 온종일 운각의 여러 일로 바빠 무공을 닦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육승운의 실력은 퇴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진보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육승운 자신도 무척 놀라워했는데, 그는 속으로 그때 동생이 주었던 신비한 대추와 이러한 현상이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육승풍도 마찬가지로 그간 무공에 정진해왔다. 하지만 그가 기댄 것은 스스로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이었고, 손에 가득한 굳은살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이에 그가 쌓은 무학(武學)에 대한 조예는 육승운보다 더 깊다고 할 수 있었다.
운각 뒤편에는 작은 숲이 있었는데, 그중 수십 그루의 나무들은 기둥이 거의 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어떤 나무들은 땅에 박힌 뿌리가 살짝 들려 있기도 했다. 그 또한 육승풍이 열심히 수련에 정진했다는 흔적이었다.
강호 사람들은 운각이 이미 망했다고 떠들어댔지만, 그간 육씨 형제가 와신상담하여 가업을 착실히 가꾸어온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 두 사람의 무공도 계속 진보를 거듭해, 운각 안의 불안 요소를 모두 없애고 충심 깊은 사람들만 남겨 둔 상태였다.
육승풍은 천천히 마차를 몰면서 수련을 닦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운각의 제자는 그가 마차를 잘못 몰고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씨 집안이 그 아가씨를 우리 둘째 어르신께 시집 보내려고 할까?”
“흥, 우리 어르신한테 시집오면 그 집안의 복이지. 왜 마다하겠어?”
“그건 모르지. 각주(閣主)께서 지난번에 직접 방문하셨을 때도 그들이 무척 정중히 접대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당장 동의하진 않았어.”
“그럴 만도 하지, 그 집안사람들이 우리 둘째 어르신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데. 게다가 이제 어르신께서도 곧 마흔이 다 되어가시는 데다, 그 집안 아가씨는 겨우 스물 몇 살이라 하지 않았어?”
“휴우, 어쨌든 그건 부차적인 일이야. 어르신께서 그 대회에서 실력을 보이시기만 하면, 그 집안사람들도 우리 어르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될걸?”
뒤따르는 마차 위에서는 세 명의 운각 제자들이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육승풍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그가 듣는다 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
멀리 두명부에 자리 잡은 주씨 집안은 족히 수백 리는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운각이 두명부에서 운영하는 옥기(玉器) 산업을 도와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과 육씨 집안은 꽤 친밀한 사이였다.
육승풍은 그간 부지런히 무공을 닦고 형을 도와 운각을 지키느라, 혼인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큰형은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옛말처럼, 육승운은 점차 나이 들어가는 육승풍과 반면에 벌써 꽤 자란 제 아들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육승운은 줄곧 육승풍이 부인을 맞아들이기를 원했다.
비록 이번 여정의 주된 목적은 육승풍이 두명부에서 열리는 강호대회에 참가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주씨 집안에 혼담을 넣으러 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었다.
마차 두 대는 며칠 동안 여러 마을을 지난 뒤, 이제 두명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