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도광양회(韜光養晦)하는 육승풍
이날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 햇빛이 비치지 않는 날씨였다. 마을 사이의 도로를 달리던 마차 위에서 육승풍은 돌연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전방의 돌 위에 앉은 푸른 옷을 입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육승풍은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주변의 모든 기척에 무척 민감한 상태였다. 몇 초 전만 해도 분명 그 돌 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누군가 나타나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괴했다.
마차 두 대는 천천히 움직이는 중이었고, 육승풍은 조금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육승풍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 앞에 앉은 남자를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소매에 수 놓인 검은 구름무늬도 보일 정도가 되었다. 사내는 머리 위에 살짝 구부러진 하얀 비녀를 꽂고 있었다.
마침내 마차가 그 사내를 지나치던 순간 육승풍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사내는 오히려 거리낌 없는 태도로 마차 위에 앉은 육승풍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육승풍은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훅 느껴진 이 위기감은 마치 바로 옆에 낭떠러지가 있는 곳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육승풍이 다시 그 남자를 자세히 관찰하자, 조금 전의 감각은 마치 착각이었다는 듯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육승풍은 눈을 뜨고서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조금 전 그게 정말로 내 착각이었나?’
그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돌연 귓가에 파공음이 들렸다.
솨앗!
육승풍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날아온 표창을 잡아챘다. 동시에 옆에 앉은 일행을 몸으로 밀쳐낸 뒤, 자신은 그 반동을 이용해 다른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탁! 탁!
그와 동시에 표창 두 개가 날아와 육승풍과 일행이 앉았던 의자 위에 꽂혔다. 표창인 줄 알았지만, 실은 보통의 쇳조각에 불과했다.
“누구냐?”
이렇게 소리친 육승풍은 눈을 가늘게 뜨며 주위를 관찰했다. 그러고는 경공을 이용해 한쪽의 나무를 향해 날아간 뒤, 장법으로 나무를 세게 쳤다.
“흐엇!”
쿵!
나무 뒤로 산산이 부서진 가루가 날리며, 표창을 날린 자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쉬지 않고 흔들리는 나무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육승풍은 일격을 날린 뒤에도 멈추지 않고 그자를 뒤쫓았다. 그렇게 숲까지 따라 들어왔으나, 조금 전 이쪽으로 들어온 남자는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육승풍, 얌전히 목을 내놔라!”
음산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동시에, 한 사람이 칼을 쥐고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육승풍이 이를 알아채고 막 반응하려 했을 때는 이미 소리도 없이 칼날이 눈앞이 다가와 있었다.
댕-!
퍽!
육승풍은 손바닥으로 평평한 검의 옆부분을 때렸다. 칼에 손이 닿자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거의 동시에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장법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도 한쪽 손을 뻗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상대방은 제비처럼 날렵했다. 그는 육승풍의 공격을 막아낸 뒤 1장(*약 3m) 정도의 간격을 남기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천천히 땅에 내려앉은 상대방의 모습이 희미하게 변하더니, 상대는 다시 육승풍의 눈앞에 다가와 맹공을 퍼부었다.
퍽퍽!
타닷! 퍽!
챙! 챙!
두 사람은 대략 스무 번의 초식이 오갈 동안 서로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라 모호한 한 덩어리로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서로 공격을 주고받다가, 상대가 다시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그곳에 서서 육승풍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육승풍도 남자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남자는 평범한 용모에 체격도 보통이었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음험한 기색이 엿보였다.
육승풍은 고개를 숙여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이미 서리가 한 겹 서려 있었는데, 육승풍이 내력을 몇 바퀴 순환한 뒤에야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대체 무슨 삿된 무공을 연마한 거요? 나와는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러시오?”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육승풍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네놈, 무공이 꽤 괜찮구나.”
“그쪽도 마찬가지요!”
육승풍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대꾸했다. 곁눈질로 흘끗 마차가 있는 방향을 보니 마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보아하니 자신을 습격한 자는 이 남자 한 사람인 듯했다.
육승풍이 잠시 마차를 바라보는 동안, 남자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다가 남자는 수풀 사이로 물러나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육승풍은 그가 사라진 곳을 뒤쫓아갔으나, 어떤 자취도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육승풍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차로 돌아와 말을 몰았다. 하지만 이번 강호대회에 대한 마음가짐이 좀 더 비장해졌다.
한편, 길의 다른 한쪽에 앉아 있던 육 산군의 곁에 안개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조금 전 육승풍과 싸운 남자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육 산군을 향해 공수했다.
“산군, 저 육승풍은 무공이 무척 뛰어납니다. 소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음, 그럼 잘되었구나.”
육 산군은 이렇게 대답한 뒤 남자를 향해 물었다.
“왜 내가 다른 창귀(*倀鬼: 호랑이의 시중을 들며 먹이를 찾아주는 나쁜 귀신)들은 놓아주고 너만은 놓아주지 않았는지 아느냐?”
“산군께서 따로 뜻하시는 바가 있겠지요.”
남자는 결코 눈앞의 육 산군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하하,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는 만약 다른 곳에서 죽었다면 아직도 저승의 감옥에 갇혀있었을 것이다. 방금 육승풍과 싸울 때, 너는 몇 번이나 그를 죽이고 싶어 했지. 만약 저자의 무공이 뛰어나 양기가 왕성하지 않았다면, 너는 바로 손을 썼을 것이다.”
육 산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어 말했다.
“나는 저자를 시험한 동시에, 너를 시험한 것이다. 저자는 생각보다 괜찮았지만, 너는 아직 안 되겠구나. 얌전히 굴거라.”
이렇게 말한 육 산군은 입을 쩍 벌려 다시 창귀를 빨아들였다.
* * *
두명부는 계주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성이었다. 조월국에 다녀온 뒤로 계연은 대정국의 평온한 세태를 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대정국에도 풀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었지만, 세상에 원래 완벽한 곳이란 없는 법이다. 대정국은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무척 평화로운 편이었다.
두명부의 거리를 걷는 계연은 보통의 여행객처럼 보였다. 그는 마침내 적당한 위치의 길모퉁이를 찾아낸 후,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소매 안에서 탁자 하나와 둥근 의자 두 개를 꺼낸 후 그중 하나에 앉았다.
육 산군이 육승풍 일행을 따라오며 시험하는 것처럼, 계연도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
계주에서 무림의 무인들이 가장 득시글한 곳이 바로 정원부와 두명부였다. 덕승부에도 비록 낙하산장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두 곳에 비하면 무공의 깊이가 얕은 편이었다. 그리고 정원부와 두명부 중에서는 이 두명부가 좀 더 규모가 컸다.
이번에 거행되는 무림대회는 사실 아무렇게나 열리는 작은 대회가 아니라, 계주 무림 전체의 성대한 모임이었다. 낙하산장의 장주와 셋째 장주 또한 참석하여 계주 무림의 지위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주변 각 주의 수많은 무인도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왔고, 그 규모에 두명부 관아조차 놀랄 정도였다.
계연이 별안간 이 모퉁이에 탁자를 놓은 것은 당연히 햇볕을 쬐려는 심산은 아니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용돈이나 벌어볼까 하여 차린 것이었다.
그는 소매에서 연이어 필묵과 종이, 벼루 등의 문방사우를 꺼내 탁자에 차려 놓은 뒤, 붓을 붓걸이에 걸고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는 조금 어두침침했지만, 아직 시간이 일러 그런 것뿐이었다. 계연은 잠시 후에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연이 천천히 먹을 가는 동안 하늘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둡게 짓누르던 구름이 점차 흩어지며, 거리에도 오가는 행인들이 늘어났다.
계연이 선택한 이 길모퉁이는 노점상들이 좋아하는 위치였다. 얼마 후 채소 장수며 각종 장사꾼이 나타나 간단한 판매대를 만들거나 땅바닥에 양탄자를 깔고 상품을 늘어놓았다. 그들 중 몇몇은 계연이 앉은 곳을 힐끔대기도 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구름 사이로 처음 드러난 햇빛이 가장 먼저 비춘 곳이 계연이 앉은 위치였다는 것이다. 그가 앉은 길모퉁이는 홀로 남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은 주위의 노점상들뿐이었고, 그래봐야 고작 몇 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리쬐는 햇빛이 점차 범위를 넓혀감에 따라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선생께서는 여기서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계연의 옆에서 건어물을 파는 백성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계연은 주름이 깊게 파이고 살갗이 까무잡잡한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탓에 얼핏 보기에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지만, 사실은 3, 40살에 불과할 것이다.
“저도 장사를 하러 나온 거예요. 그저 제가 파는 게 글자일 뿐이죠.”
“아, 그렇군요.”
남자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초와 연말에는 이런 가난한 서생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계절에는 보기 드물었는데, 그렇다고 또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계연은 점점 많아지는 행인들을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늑대 털로 만든 붓을 들었다. 그는 붓에 먹물을 듬뿍 묻힌 다음, 종이 두 장에 각각 이렇게 써 내려갔다.
<편지 대필, 글자 판매 및 점괘 풀이>
계연은 하얀 선지 두 장을 탁자 끝자락에 내려놓았다. 그 필체가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글씨 자체는 무척 뛰어났다.
계연은 손님이 찾아오면 앉을 수 있도록 다른 의자 하나를 탁자 맞은편에 끌어다 두었다.
계연이 만든 노점은 썩 괜찮은 모습이었으나, 탁자 위에 놓인 문방사우와 그의 정갈한 옷차림이 어떻게 봐도 점술가로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간판도 없이 종이 두 장만 앞에 놓아둔 것으로는 확실히 충분치 않은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 앞에 앉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계연도 어차피 진짜 돈을 벌 목적으로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계연은 어떤 세 사람이 멀리서 지나가는 순간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비록 그 세 사람은 이미 이곳을 지났지만, 맨 앞에 서 있던 사람이 계연이 쓴 글씨를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계연은 그들이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알았다.
과연 세 사람은 7, 8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들 세 사람은 아주 잘 차려입은 말쑥한 행색이었다.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머리를 고정한 작은 관(冠)에는 백옥이 박혀 있었고, 튼실한 체격에 살집이 약간 붙어 부유해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을 이끌고 계연의 탁자 앞으로 오더니, 미소 짓는 얼굴로 계연에게 이렇게 물었다.
“글자가 무척 뛰어나군요. 하지만 선생께서 점괘도 보실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한 남자는 약 4, 50세 정도 되어 보였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꽤 관리를 잘한 모양이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로 이어지는 부분의 피부색이 더 진한 데다 관절 마디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저런 차림새의 남자가 호미를 쥐고 휘둘렀을 리는 없으니, 오래도록 무기를 연마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물음에 계연도 웃는 얼굴로 답했다.
“조금은 볼 줄 압니다. 글을 사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점괘를 보러 오신 건가요?”
이때 계연은 일부러 두 눈에 장안법을 쓴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계연을 유심히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