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51화 (351/892)

351화. 귀하께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선생, 저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왜 이렇게 낯이 익지요?”

‘난영극(蘭寧克), 당연히 우린 만난 적이 있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계연은 그와는 반대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글쎄요, 기억에는 없는데 만났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글을 사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점괘를 보러 오신 건가요?”

계연은 다시 한번 이렇게 질문했다.

“그럼, 점괘는 됐고 뜻이 좋은 구절을 써 주십시오. 기다란 종이에 큰 글자로요. 무엇을 쓸지는 제가 불러드리지요.”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둘 말아놓은 종이를 잘 편 뒤, 붓에 먹물을 묻히고 이렇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이렇게 써 주십시오. 자유로이 의협(義俠)을 행하니, 영웅호걸이로다(任氣爲俠, 人中之龍).”

그러자 계연이 붓을 휘둘러 호방하고 웅대한 기세의 여덟 글자를 단번에 완성했다. 옆에 찍은 낙관은 평소에 쓰던 계 선생이 아니라 ‘연(緣) 선생’이었다.

“좋은 글씨군요. 정말 마음에 듭니다. 얼마죠?”

계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은자 9냥입니다.”

남자의 뒤에 서 있던 자가 그 말을 듣고 노발대발했다.

“9냥? 차라리 가서 강도질을 하지 그러시오! 도대체 자기가 정말로 대가(大家)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첫째로, 대가의 작품이라 해도 제 글씨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제 글씨를 사면 제가 좋은 말을 몇 마디 해드릴 것인데, 어쩌면 그것으로 곧 다가올 재난을 피하실 수도 있습니다!”

글자를 부탁했던 남자가 냉소를 지었다. 이 자가 정말로 글을 잘 쓰기는 했지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서생에게 은자 9냥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가지였다. 춘혜부의 서예 대가에게 글을 부탁해도 고작 수십 냥이었다. 저 서생이 말한 ‘곧 다가올 재난’도 그는 코웃음을 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가자.”

남자는 계연이 쓴 글자를 챙겨 들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어, 저기, 그건 품질이 뛰어난 선지(宣紙)란 말입니다. 백 문(文)을 줘도 겨우 1척(*尺: 약 30cm)밖에 못 사는 거라고요!”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치자, 세 사람 중 하나가 흉악한 눈빛으로 계연을 째려본 뒤 주머니에서 쇄은자(碎銀子) 두 덩이를 꺼내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행을 따라 떠나갔다.

“휴, 손해만 봤네.”

계연은 이렇게 한숨 쉬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좀 전에 말을 걸었던 옆 노점의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선생, 저 치들은 딱 봐도 보통이 아닌 자들인데 뭐 하러 그리 가격을 높게 불렀습니까? 은자 9냥이면 우리 온 가족이 1, 2년은 먹고살 수 있는 돈인데요. 지금 받으신 쇄은자 두 개는 못 해도 2백 문은 될 것입니다. 글자 몇 개 쓰고 2백 문이면 남는 장사지요.”

계연은 어이가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이들은 이런 실력을 얻기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은 보지도 않고, 당장 자신이 받는 이익만 보았다.

“대형(*兄臺: 잘 모르는 남자에 대한 경칭), 이건 금주의 연목(*軟木: 코르크나무)을 재료로 수십 차례의 공정을 거쳐 제작한 세 겹 향단지(香檀紙)입니다. 도성의 향묵헌(香墨軒)이라는 곳에서만 파는 종이라고요. 이 종이 1척을 만드는 원가만 해도 백 문이 넘을 것이고, 그것조차 십수 년 전의 가격이었지요. 그런데 저자가 들고 간 길이는 못해도 3척은 될 것이고, 겉에 표구까지 되어 있는 종이였습니다. 설령 글자 값을 안 받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미 큰 손해를 본 거란 말입니다.”

이는 예전에 계연이 도성의 초(楚)씨 집안에 잠시 빌붙어 살던 때에, 그 보답을 하고자 이 종이를 사서 위에 법령을 남기고 왔던 그 종이였다.

그러자 남자가 놀란 얼굴로 펄쩍 뛰었다.

“종이 한 장이 그렇게나 비싸단 말입니까? 어이쿠, 그럼 선생께서 정말 손해를 크게 보셨군요.”

“누가 아니랍니까!”

계연은 이렇게 투덜댄 후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벌써 가려고 하십니까?”

옆 노점의 주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겨우 하나 팔았는데 이렇게 가시려고요?”

“예, 몇 개만 더 팔아도 손해가 막심할 테니까요.”

그러자 노점 주인은 왠지 모르게 약간 고소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슬며시 웃으며 자기 앞에 놓인 물건을 정리하고 막 무어라 입을 떼려던 순간, 그는 계연이 이미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사람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탁자와 의자까지 전부 사라졌다.

노점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 양쪽 끝을 두리번거리며 종적을 찾았지만 결국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그 세 사람이 심상찮은 얼굴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흉악한 기세를 보고 노점 주인은 얼른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했다.

그 세 사람은 방금 계연이 있던 위치까지 찾아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씨 어르신, 글자를 팔던 자가 사라진 듯합니다!”

“이상하군, 분명 조금 전까진 여기에 있었는데.”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마침내 건어물을 파는 농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이, 여기 앉았던 사람, 언제 떠났는지 아나? 어디로 갔지?”

“잘,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방금 그 선생께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조, 조금 이상합니다!”

노점 주인은 이렇게 사실대로 고했다.

다른 이들은 이리저리 주위를 살폈고, 중간에 있던 남자는 두루마리를 펴 글자를 다시 읽어내렸다. 원래 적혀 있던 글자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

<任氣爲俠, 只是想想, 人中之龍, 閣下也配>

자유로이 의협(義俠)을 행하는 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니

영웅호걸이 귀하께 가당키나 하겠는가?

글씨는 여전히 무척 뛰어났으나, 글자가 여덟 개나 더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그 몇 글자를 더한 것만으로 엄청난 모욕이 되었다. 이에 세 사람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달려왔던 것이다.

건어물 노점의 주인인 농민은 글을 몰랐지만, 글자가 늘어난 것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는 ‘그럼 더 좋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늘어난 글자가 무슨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세 사람은 그렇게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결국 계연을 찾아내지 못하고 화를 내며 가버렸다.

노점 주인은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야 이번 일이 무척 신비롭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 *

계연은 그래도 꽤 공평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예전 그 아홉 명의 소협 중에서 그는 이미 두형, 육승풍, 연비 그리고 낙응상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난영극도 그들 중 하나였으니, 먼저 만나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계연은 일부러 적당한 곳을 찾아 자신이 먼저 난영극을 만날 수 있도록 안배했다. 옛날의 정이 아직 남아있었으므로, 만약 난영극이 계연의 눈에 곱게만 보인다면 도움을 베풀 마음도 있었다. 물론 계연이 직접 육 산군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난영극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흥, 이제 와 이런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계연은 난영극을 만나본 후 남아있던 정이 다 털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 자신의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계연이 떠난 곳에서 난영극도 수하들을 데리고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자리를 떠났다.

원래는 뛰어난 글을 얻었다고 생각해 무척 기분이 좋았으나, 글자 몇 개가 더해져 조롱의 뜻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파리를 삼킨 것처럼 기분이 찝찝했다.

그래도 글자 자체는 무척 대단한 솜씨였다. 지금도 버리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계륵(*鷄肋: 닭의 갈비뼈라는 뜻으로, 큰 쓸모나 이익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비유)이 아닐 수 없었다.

“난씨 어르신, 글자를 따로 떼어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면이 조금 작아 보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뜻은 좋으니까요.”

그의 수하 중 한 사람이 두루마리 위에 손짓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했다.

“그렇게 해라.”

난영극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뒤, 그 서생을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에 그의 수하 중 한 사람이 원한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다시 그 서생을 만나기만 하면, 관절을 죄다 부러뜨려 주겠습니다!”

“여기가 두명부가 아니라 정원부였으면…….”

“그 서생이 쓰는 글자를 우리가 전부 보았는데, 어찌 몇 개가 늘어났지?”

이들은 풀리지 않는 의혹 때문에 이 일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이번 일로 한가롭게 거리 구경이나 하려던 생각이 싹 사라졌기 때문에, 이들은 객잔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문 방향에서부터 들어온 마차 두 대가 행인들을 피하느라 멈췄다 섰다 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가장 앞에서 마차를 모는 이는 바로 육승풍이었다.

조금 전까지 한가로워 보이던 모습의 육승풍은 길을 지나는 세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난영극이 고개를 돌려 마차 두 대와 그 앞에 탄 마부를 바라보았다.

“저기 마차를 모는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눈에 익은 듯한데.”

난영극이 그를 따르던 수하에게 묻자, 두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본 적 없는 자입니다.”

그러자 난영극은 눈썹을 찡그리며 혼잣말을 했다.

“오늘 정말 이상하군.”

그 이후로 육승풍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난영극은 진작에 그의 생김새를 잊은 지 오래였다.

반면 육승풍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부티 나는 남자를 보고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러자 난영극도 발걸음을 멈추었고, 두 사람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육승풍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그간 무탈하였는가?”

난영극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낯익었는데 저자는 나를 안단 말인가?’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육승풍은 잠시 멍한 얼굴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해보았지만, 난영극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그는 돌연 예전에 자신이 거안소각에 술을 들고 찾아갔을 때, 계 선생님께 그 옛날 함께했던 소협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난영극을 보자마자 모든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되살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자신을 까맣게 잊었을 줄이야.

“하핫! 하하하하, 하하하!”

육승풍이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리자, 난영극과 그의 수하들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의 수하 중 하나가 이렇게 물었다.

“왜 웃는 것이오?”

“아, 아니오. 내가 웃은 건 여러분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서요. 하하하……. 내가 아직은 그리 형편없는 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무척 기뻐서 그렇소.”

육승풍은 웃음을 멈추고 난영극을 향해 공수하며 제대로 인사했다.

“내 이름은 육승풍이라 하오. 난 대협(大俠)을 뵙소이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대협의 실력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겠소.”

말을 마친 육승풍은 고삐를 한번 가볍게 털더니 마차를 몰아 떠나갔다.

난영극은 눈썹을 찡그리며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무언가를 생각해냈다.

“설마 저자가……?”

“난씨 어르신, 육승풍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난영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말했다.

“저자는 계주 운각 사람이다. 예전에 운각이 명성을 떨치고, 저 사람이 젊었을 때 우리는 함께 유람을 떠난 적이 있었지. 시간이 흘러 내가 알아보지 못했군.”

몇 마디 더 하려던 순간, 돌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낀 그는 고개를 돌려 마차가 들어왔던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만 보일 뿐, 어떤 수상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이어 괴이한 일이 벌어지니, 난영극은 수하들을 데리고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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