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뻔뻔함의 저력
육 산군은 강맹에게서 난영극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 이런 모습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겠지. 당신이 날 기억해낼 수 있도록 내 친히 단서를 주겠소. 정축년(丁丑年) 초봄, 우규산의 산신당 앞에서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듣고 당신들을 살려주었었지. 그 대신 당신들은 이번 생에 큰 포부를 품고 의를 행하겠다고 나와 맹세했었고, 나는 언젠가 직접 하산하여 그 약속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겠다 말했었소. 난영극, 이제 기억이 나나?”
육 산군이 말하는 속도는 무척 느릿했으나, 글자 하나하나가 무거운 추처럼 난영극의 가슴을 때렸다. 육 산군의 말을 듣는 동안 그의 눈은 점차 휘둥그레졌고, 흰자위에는 실핏줄이 번졌다. 난영극의 호흡은 점차 긴박해졌는데, 마침내 그의 안색마저 창백하게 변하였다.
여러 해 전의 그 밤, 우규산 산신당에서 벌어졌던 일이 마침내 난영극은 생각났다. 그는 다시 눈앞의 서생이 입은 옷의 색깔을 바라보았다.
‘이, 이 사람은……!’
난영극은 밀려오는 경악과 두려움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자신이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그저 깊은 곳에 묻혀있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난형, 저자가 대체 누구입니까?”
강맹이 육 산군을 노려보며 난영극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이때 난영극은 무척 혼란스럽고 불안정해 보였다.
“강, 강형, 저자는 사,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뭐라고 하셨소?”
난영극은 온몸을 뒤얽는 공포 때문에 목소리가 바늘같이 가늘었을 뿐만 아니라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아마 내가 사람이 아닐 거라고 했소!”
이렇게 말하는 육 산군은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리며 날카로운 맹수의 앞발을 흉내 낸 채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도 호권(虎拳)을 쓸 줄 아는데, 잘 보시오.”
그렇게 말하자마자 육 산군은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기 시작했다.
“어흥-!”
크르릉!
그러자 주변 손님들이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호랑이의 거대한 포효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루 안의 도자기며 반찬 그릇들이 모두 식탁 위에서 떨렸고, 심지어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도 있었다.
강맹은 누군가 머리를 세게 내리치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윙윙’하는 이명만이 가득했다.
난영극은 온몸이 딱딱히 굳었지만, 그의 시야만은 여전히 또렷했다. 뒤이어 놀라 부릅뜬 그의 두 눈에 육 산군이 살짝 몸을 구부리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 위에 형형한 눈빛을 한 맹호가 포효하며 자신에게 덤벼드는 환상이 덧씌워졌다. 그 기세는 그야말로 사냥감을 덮치는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반면 강맹은 자기 몸이 천근만근이라도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순간적으로 무거워지며 느릿해졌다. 강맹이 애써 손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상대의 팔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자신의 가슴팍을 향해 공격해왔다.
퍽!
콰지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강맹의 왼쪽 가슴 부근이 움푹 파였다. 곧이어 강맹은 여태 경험해본 적 없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쿠궁!
다음 순간 인귀루 2층의 창가가 산산이 부서지더니, 인영(人影) 하나가 나무 부스러기를 뒤집어쓴 채 7, 8장(*약 20~25m)의 높이에서부터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맹은 아직 죽지 않은 채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계속 피가 뿜어져 나와 말을 뱉을 수도 없었고, 두 팔과 두 다리의 모든 뼈가 부러진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윽…… 읍! 어허억……!”
그는 주루 2층 방향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여 구멍이 뻥 뚫린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강건한 신체가 그를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잠시 후 그는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한편, 육 산군의 선혈이 잔뜩 묻은 손바닥 위에는 여전히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오, 이자의 심장은 아직 빨간색이었군.”
그가 흉포한 기세로 산 사람의 심장을 꺼내는 것을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온몸의 털이 뻣뻣이 곤두선 채 침묵에 휩싸였다.
난영극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맞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강맹이 만든 구멍을 통해 주루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온몸의 진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미친 듯이 달아났다.
무림대회며 강호에서의 지위며 그 모든 것은 목숨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영극은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잽싸게 도망쳤다. 절박한 심정 때문인지, 이때 그의 경공 수준은 그간의 경지를 뛰어넘어 정말로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성황당이나 다른 사당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난영극은 곧 그 생각을 집어치웠다. 진흙으로 빚어낸 그깟 신상(神像)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난영극은 곧 낙하별원(落霞別院)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선천(*先天: 수련의 한 단계로, 범속(凡俗)을 초월한 단계)의 경지에 오른 고수 중 가장 유명한 낙릉은 분명 그곳에 머물고 있을 테고, 오직 그만이 저런 요괴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낙 장주가 그 요괴를 막아내지 못한다 해도, 일단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았다. 그곳에는 운각이 두명부에서 운영하는 점포인 ‘운옥각(雲玉閣)’이 있었다. 그러니 육승풍도 필경 그곳에 있을 터였다!
‘절대 죽지 않겠어.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육승풍, 육승풍도 우리 중 하나였잖아. 그자도 당해봐야 해!’
그는 공포와 흥분이 뒤섞여 한껏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한편, 육 산군은 난영극이 꽁지 빠지게 도망친 것을 보고서도 곧바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구멍이 난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미 숨이 끊어진 강맹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주루의 2층은 현재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다가 육 산군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두려움에 차 있지만 통쾌함으로 번뜩이는 눈빛을 한 번통을 바라보았다.
“흐윽…… 헉…….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대협,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난영극이 부리던 자들일 뿐입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말로 모릅니다!”
쿵, 쿵, 쿵!
난영극의 수하 두 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우는 얼굴로 싹싹 빌며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육 산군은 그들을 조금도 상대하지 않고,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심장은 번통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실은 강맹을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번씨 집안에 은혜를 베푼 셈 치겠소. 저자가 죽기를 그리도 바랐으니 그냥 죽게 해주지.”
그의 말은 듣는 이들을 알쏭달쏭하게 했지만, 육 산군은 따로 해명할 뜻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는 가볍게 날아올라 객잔을 떠나버렸다.
육 산군이 떠나자 그제야 손님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방금은 이곳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너무 심해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들이 느낀 무력감은 어린아이가 홀로 호랑이 앞에 서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조금 전에 그 사람, 선천 고수인가?”
“그렇지 않겠소? 아마 선천 고수 중에서도 무척 뛰어난 자일 것이오!”
“대단한 능력이군. 무척 흉포하기도 하고. 강변의 맹호라는 강맹의 심장을 단번에 꺼내버리다니!”
“흥! 강변의 맹호는 무슨, 바닥에서 처참하게 죽은 놈인데…….”
“저 고수는 번씨 집안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이겠지?”
“그야 당연하지.”
“재미있는 구경을 했군.”
번통은 멍하니 제 앞에 놓인 심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내 펄떡이다가 지금 막 맥동이 끊어진 참이었다. 마침내 다른 강호인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번 대협, 괜찮으시오? 어서 일어나시오!”
“축하드리오, 번 대협. 드디어 원수를 갚았군!”
“그러게 말이오!”
* * *
고요한 저녁에 싸움이 벌어진 소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관아에서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음기 서린 바람을 몰고 나타난 저승의 관리들이었다.
두 명의 야간 순시관은 강맹의 시체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구멍이 뻥 뚫린 그의 가슴과 인귀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그 포효소리가 여기서 들려왔었지!”
“응.”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주위에서는 어떤 요사한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순시관들이 고개를 돌려 강맹의 시체를 바라보자, 비몽사몽한 상태의 혼백이 강맹의 몸에서부터 떨어져나왔다. 강맹의 혼백에서는 그가 쌓아온 온갖 악업(惡業)이며 흉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흥, 강호인들은 과연 선한 놈들이 몇 없구먼!”
“일단 데려가세!”
순시관 중 하나가 손을 뻗어 강맹의 혼을 시체에서부터 강제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칼자루로 혼백의 이마를 때리자, 그의 혼백이 멍한 얼굴로 야간 순시관들의 뒤를 따라왔다.
비록 강맹은 이곳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마주쳤으니 그가 떠돌아다니는 넋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그 포효소리가 아무래도 괴이쩍었단 말이지. 성안에 요괴가 숨어든 건 아닌지 자세히 조사해봐야겠어.”
“맞는 말일세!”
야간 순시관들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며 사방에 음기를 퍼뜨렸다. 그러자 무인(武人) 특유의 왕성한 양기와 부딪히며 희미한 연기가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허둥지둥 도망치는 난영극의 윤곽이었다.
“저쪽이군!”
“가세!”
그들은 희미한 귀신의 형체로 변해 난영극이 도망친 방향으로 뒤쫓아갔다.
* * *
난영극은 진기(眞氣)를 너무 많이 소모하거나, 싸움을 할 만한 체력을 남겨 두어야 한다거나 하는 고민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요괴와 맞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도망친 덕분에, 그간의 잠재력이 극한을 돌파해 그의 경공 실력은 생애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그는 이미 낙하별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낙 장주! 낙릉 장주! 강호의 사도(邪道)를 닦는 자가 저를 죽이려 쫓아오고 있습니다! 부디 낙 장주께서 도와주십시오! 낙 장주, 살려주십시오! 육승풍! 육승풍! 자네도 얼른 나와!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가 나타났는데 어서 나와서 날 도와야지!”
체면이고 예의고 난영극은 이제 그 어떤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진기를 운용해 생각나는 대로 소리치며 낙하별원을 향해 달려갔다.
이때는 이미 많은 이들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고, 낙하별원도 마침 그럴 시각이었다.
이번 두명부 무림대회의 별칭은 ‘계주 무림대회’였다. 낙하산장의 둘째 장주가 자리를 지키고, 낙릉과 낙풍은 낙하산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두명부에 와 있었다. 그들은 현재 별원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낙 장주! 낙릉 장주! 강호의 사도(邪道)를 닦는 자가 저를 죽이려 쫓아오고 있습니다! 부디 낙 장주께서 도와주십시오! 낙 장주, 살려주십시오!”
별안간 밖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들려오자, 낙릉과 낙풍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일단 가서 누구인지 보자!”
“예!”
그렇게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들의 경공 실력은 무척 출중했으므로, 이들은 화원과 담벼락을 가볍게 지나 순식간에 난영극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영극은 고래고래 소리를 치다가 별안간 앞에 사람들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허억!”
극도의 긴장 속에서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도망쳐 오느라, 난영극 같은 무림의 고수조차 한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