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고인(高人) 육 씨
육 산군은 육승풍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두려우십니까?”
육승풍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애써 담담히 대답했다.
“물론 두렵습니다!”
“듣자 하니 오랫동안 옥창현에서 나오지 않았다던데, 그럼 나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닙니까?”
육승풍은 지금, 이 순간이 생사의 기로라는 것을 알았다. 비록 두려움에 온몸이 차가워졌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싶었다.
“가족과 집이 먼저고, 의를 행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저희 운각이 불안정하고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는 때에, 제게 있어 의를 행하는 것은 바로 가족과 집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육 산군은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돌연 길 한쪽 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온 요괴가 감히 이곳에서 소동을 벌이느냐?”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육 산군의 귓가에 길 저 끝에서부터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육 산군이 드러냈던 요기(妖氣)가 야간 순시관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쯧쯧, 잠깐 방심했더니. 나는 저승과 충돌할 생각이 없네.”
육 산군은 가볍게 한 마디를 남긴 뒤,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육 산군은 엄청난 속도로 공중을 가르며 날아갔다. 낙릉과 낙풍이 보기에는 몇 초 만에 밤하늘 사이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육승풍은 사면령을 받은 사람처럼 얼굴에 온통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휘이…… 휘이잉…….
그때, 음기 섞인 바람이 불어와 주위에 있던 이들 모두를 오한에 몸을 떨게 했다. 비록 그들은 저승의 관리들이 지나간 것은 보지 못했지만, 한바탕 불어닥친 음기로 인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낙릉은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낙풍과 눈을 맞춘 뒤 함께 육승풍을 바라보았다.
“육 현질(*賢姪: 조카를 높여 이르는 말), 방금 그자는 대체……?”
육승풍은 호흡을 고른 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그들을 향해 공수했다.
“말하자면 무척 깁니다만, 두 분께서 듣고 싶으시다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발설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그 당시 아홉 사람 중에 낙응상도 있었으니, 육승풍은 이 두 장주에게도 말해주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낙풍은 자신의 큰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별원의 하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어디서도 발설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하인들은 아직도 고수들이 공격을 주고받던 순간의 놀라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낙풍의 말을 듣고 조건반사적으로 “예”하고 대답했다.
* * *
몇 분 뒤, 낙하별원 안에서는 낙릉과 낙풍이 육승풍을 데리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인들은 모두 내보낸 뒤였다.
“셋째야, 손은 어떠냐?”
낙풍은 오른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보기에만 심각하지, 실은 뼈에 금이 갔을 뿐입니다. 근육에는 문제가 없고 감각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선천 경지의 진기(眞氣)가 있으니 회복도 빠를 겁니다. 거기다 약까지 바르면 아마 두 달도 안 되어 완전히 회복할 겁니다.”
낙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른 뒤, 낙풍과 육승풍을 향해 한 잔씩 건넸다.
“육 현질, 나와 영존(*令尊: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께서는 오랜 벗이었으니 오늘 일은 걱정하지 말고 편히 말해보게.”
“감사합니다, 낙 장주.”
육 승풍은 감사를 표한 뒤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두 분 장주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그자는 무공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겁니다. 게다가 난영극을 삼킨 장면만 봐도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셨겠지요.”
육승풍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했다.
“사실 그자는 요괴입니다. 그가 빚을 받으러 왔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요괴?”
낙릉과 낙풍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들으니 깜짝 놀랐다.
“예, 그는 우규산 맹호(猛虎)가 사람으로 둔갑한 겁니다.”
육승풍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예전에 있었던 일을 대략 설명했다. 낙릉과 낙풍은 경악하는 한편 차마 믿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응상도 위험하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낙풍은 제 오른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요괴가 만약 응상에게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우리로서는 그를 막을 수가 없지 않나!”
육승풍은 최대한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 요괴는 일을 행하는 데에 자신만의 원칙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자는 잔인하게 살생을 일삼는 자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저희를 놓아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낙 사매는 일찍이 시집가서 아이를 키워왔고, 그간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지요. 제가 보기에 그 요괴도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휴우, 그러기를 바라야지.”
낙릉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이렇게 한숨지었다. 낙풍은 그제야 무언가 알아챈 듯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예전에 내가 객잔에서 만났던 맹인 선생이 그 계 선생이었겠군?”
계연의 이야기가 나오자 육승풍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치솟았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그 호랑이 요괴가 아무렇게나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린 것도 실은 계 선생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저희 아홉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호랑이 요괴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요괴도 수행의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거든요.”
“그럼 그 계 선생님을 찾을 수는 없겠는가?”
낙풍의 말을 듣고 육승풍은 고개를 저었다.
“계 선생님의 거처는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선생께서는 자주 천하를 유람하셔서 댁에 잘 계시지도 않고요. 지금 당장 찾기는 어렵습니다.”
낙릉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응상이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셋째 네가 이 별원에 남아있고, 나는 잠깐 낙하산장에 들렀다 오겠다. 응상이 어떤지 보고, 위험할 것 같으면 도성으로 잠시 몸을 피하도록 하마.”
“예, 형님도 조심하십시오!”
낙하산장의 세 장주들은 서로 무척 사이가 좋았다. 그 셋 중에서 낙릉과 낙풍은 각각 두 명의 아들을 두었고, 둘째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낙응상이었다. 이에 그들은 낙응상을 모두 친딸처럼 아껴왔고, 그녀는 낙하산장의 금지옥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몇 마디 더 인사를 나눈 뒤, 낙릉은 그 즉시 덕승부로 향했다.
* * *
반면, 육 산군은 시간을 좀 들이고 여러 수단을 쓴 뒤에야 두 야간 순시관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성을 나와 한 바퀴 크게 돈 뒤, 그는 다시 다른 방향에서 성으로 들어왔다.
육승풍의 대답에 대해 육 산군도 실은 동의하는 바였다.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도 실은 자신의 힘과 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었다. 육 산군은 사실 낙응상을 만났을 때부터 이에 대해 깨달은 상태였다.
그 아홉 명의 소협들이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짓을 하지 않고, 각자 본분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다면 육 산군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작해야 그들에게 겁을 좀 준 다음, 여생 동안 계속 관찰할 계획이었다.
부성에 돌아온 후, 육 산군은 자기 모습을 숨기고 기척을 모두 감췄다. 그러고는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편벽한 곳에 자리한 객잔 안으로 들어가, 가벼운 걸음으로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그 방에 머무는 이는 바로 번통이었다. 비록 저녁에 주루에서 강맹과 난영극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두명부 관아에서는 이 일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루의 신고를 받고 온 것이었지만, 번통이 주루에서 입은 손해를 보상하게 하고 원만히 사건을 무마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자리에 있던 누구도 살인 사건을 신고하지 않았던 데다가, 민생에 관련된 일도 아니었고 강호에는 강호만의 원칙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번통은 이 시각 객잔으로 무사히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오늘 겪은 일 때문에 번통은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집안이 언제 그런 고수와 연을 쌓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인연이 있었다면 왜 번씨 집안이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강맹과 난영극은 번씨 가문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 고수가 나서서 복수해주기만 한다면, 번통은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더 잃을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저나 난영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군.”
번통은 차를 한 입 마시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미 죽었소.”
문밖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번통은 깜짝 놀랐다가 곧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그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는 과연 주루의 그 고수가 서 있었다.
“은공(*恩公: 은인을 높여 이르는 말)께서 난영극을 죽이셨습니까?”
“그렇소, 뼈조차 남지 않았지.”
육 산군의 대답은 간결하고 담담했으나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번통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됐습니다! 하하하, 드디어……! 하늘이 모든 걸 굽어보고 있으니, 누구든 자신의 악업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거겠지요! 참, 제가 아직 은공의 존함을 모릅니다. 저희 번씨 집안과는 혹 무슨 관계가 있으신지요?”
번통은 감격에 겨워 공수한 뒤 육 산군을 향해 깊이 읍했다.
육 산군은 방 안으로 들어와 차를 한 잔 따라 마신 뒤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육 산군이라 하오. 번씨 집안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쌓은 적은 없고, 남은 원한에 대해서도 더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자 웃고 있던 번통의 얼굴이 당황하여 딱딱히 굳어졌다. 번통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육 산군에게 차를 한 잔 더 따라주었다.
“은공께서 난영극과 강맹을 처리해 주셨으니, 이미 그것만으로 저희 번씨 집안을 크게 도와주신 겁니다. 그 외에 감히 무언가를 더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하, 분별 있는 자로군.”
육 산군은 자신의 사부가 이런 식으로 선연(善緣)을 쌓는 것을 흡족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나도 쩨쩨하게 굴지 않겠소. 이렇게 하지. 육승풍을 찾아가 번씨 집안을 돌봐 달라 도움을 청하시오. 육 산군의 뜻이라 하면 알 것이오.”
“육승풍이요?”
번통은 의혹에 서린 얼굴로 되물었다.
‘둘 다 육 씨인 걸 보니, 이 어르신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가?’
육 산군은 번통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므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육승풍은 운각을 소유한 육씨 가문의 사람이오. 이 부성에서는 운옥각이라는 점포를 운영 중이니, 그곳으로 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오. 이후에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무리한 요구만 아니라면 그를 찾아가시오. 무림대회가 지나고 나면 그의 명성도 드높아질 것이오.”
이런 말을 남기고 육 산군은 차를 완전히 비운 뒤 방을 떠났다. 번통이 즉시 그를 마중하러 따라갔으나, 복도에는 이미 육 산군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뛰어난 경공이라니,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군!”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을 품은 채 번통은 방으로 돌아와 이렇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운각을 소유한 육씨 가문과 관계를 맺으면 번씨 집안은 정말로 가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육씨 집안에 그토록 뛰어난 기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은공은 무공 실력도 뛰어난 데다 무척이나 젊은 나이였다. 물론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을 테고, 젊음을 유지하는 신비한 방법이 있는 것이리라. 번통은 그가 정말로 20대의 청년일 거라고는 절대 믿지 않았다.
번통은 일찍이 운각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가정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운각……. 저 육씨 집안의 고수는 밖에서 무공을 수련하며 유람하다가, 운각에 위기가 닥친 걸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가 돌아왔으니, 운각은 다시 예전의 지위를 되찾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은공이 이번 무림대회가 지나면 육승풍의 명성이 널리 퍼질 것이라고 한 것일 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가정이 맞는 것 같아서, 번통은 점점 더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번씨 집안에 수년간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히고 미래에 광명이 비칠 거라는 예감을 받았다. 최소한 지금까지처럼 몸을 사리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