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약속을 지킨 자와 부끄러워하는 자
한편 부성의 성벽에 지어진 성루 위에는 흰옷을 입은 계연이 높이 뻗어 올라간 처마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왼팔 위에 머리를 올리고 성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육 산군은 조금 전에 부성을 떠난 참이었다.
그때 모호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재빨리 스쳐 지나가더니, 성벽 위에 다다라 관복을 입고 높은 모자를 쓴 두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들은 바로 두명부 야간 순시의 임무를 맡은 좌우 정사(正使)들이었다.
“계 선생님, 성황신께서 선생님을 두명부 저승에 초대하셨는데, 참석 의사가 있으신지요?”
계연은 몸을 일으켜 처마 끝에서 성벽 위로 내려왔다. 그가 두 야간 순시관을 향해 공수하자, 그들도 계연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저는 두명부 저승에 폐를 더 끼치지 않고 이만 가보려 합니다. 부디 성황신께 안부 전해 주세요. 오늘 일은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록 이들이 육 산군을 당해낼 수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왕 자신이 여기까지 왔으니 오해가 커지지 않도록 나서서 말은 해야 했다.
“맹세했으면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사리에 따라 처리했을 뿐인데, 감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야간 순시관의 대답을 듣고 계연은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이번 일은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처리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두명부에 오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이유이든 요물이 사람을 죽인 것을 두명부 저승에서 가만히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계연은 구태여 더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구름을 밟고 두명부 성을 떠나갔다.
낙응상과 육승풍, 난영극을 차례로 만난 육 산군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넓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과연 계연이 중시하는 제자답게, 자신이 따로 나설 필요도 없이 일을 처리했다. 심성도 괜찮았고 판단력도 무척 뛰어났다.
* * *
병주 애전부(崖前府), 쾌속으로 질주하는 말들이 주인의 채찍질에 더욱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랴!”
말발굽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이토록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뛰어난 기수(騎手)들은 말들이 잠재적인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섬세히 말을 몰았다.
도로 대부분이 진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수들은 온몸에 흙탕물과 진흙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제일 앞에서 달리는 기수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기다란 칼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쥐었는데, 다른 한쪽 소매는 텅 빈 채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모두 더 속도를 냅시다! 또 놓치면 안 됩니다!”
“하하하! 역시 지난 마을에서 말을 바꿔타길 잘했군. 저놈들 말은 이제 얼마 못 버틸 거요!”
저 앞에서 말을 달리는 이들을 바라보며 뒤에서 그들을 추격하는 이들이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쫓기는 쪽의 기수들은 추격자들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당장 날개라도 돋아나 날아가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했다.
“제길, 저놈들은 포기하지도 않고 쫓아오는군! 이랴!”
그들은 회색의 경장(勁裝)을 입은 스무 명은 족히 넘는 일행이었다. 반면 뒤쫓아오는 이들은 대략 일고여덟 명 정도였는데, 대신 그들의 기세는 머릿수와는 정반대였다.
다시 일각(*一刻: 15분) 정도가 지난 후, 앞서가던 이들의 말이 드디어 지쳤는지 속도로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살핀 뒤 동료들에게 말했다.
“왕형, 우리 둘이 먼저 가서 막읍시다.”
“그러세!”
두 사람은 대화가 간결한 만큼 동작 또한 재빨랐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은 각자의 말 등 위에서 공중으로 솟구친 후, 말이 질주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경공을 이용해 좀 더 속도를 붙인 다음, 앞서가던 일행의 앞쪽에 내려섰다.
두형과 왕극은 각각 장도(長刀)와 너비가 널찍한 대도(大刀)를 검집에서 꺼냈다.
챙! 챙!
슈욱! 휘익-!
쫓기던 이들은 별안간 눈앞에 칼날이 번쩍이는 것을 발견했다.
푸욱! 챙-!
가장 앞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칼에 베여 낙마했고, 말도 그와 함께 뒹굴었다. 다른 한 명은 검을 휘둘러 왕극의 칼을 막았다.
낙마한 사람과 땅에 넘어진 그의 말이 뒤따라오던 일행들을 모두 뒤엉키게 했다. 기수들의 고함과 말들이 히힝 하고 우는 소리가 뒤섞이며, 마침내 그들 전부가 멈춰 섰다.
두형과 왕극은 그들의 앞길을 막고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여섯 사람이 뒤에서 나타나 20명 남짓의 사람들을 중간에 가둬둔 형태가 되었다.
왕극은 원래부터 애전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부성 관아에서 총 포두(捕頭)를 맡고 있었다. 이번에 이들이 뒤쫓은 자들은 연지(燕地)의 강호 패거리들이었다. 그간 몇 번이나 맞붙었는데 계속 체포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관아의 포졸들을 몇 잃기도 했다. 이번에 두형을 만나 두형이 함께 데려온 사람들 덕분에 마침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이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검을 빼내 왕극의 칼을 막아낸 사내가 칼날로 두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형,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각자 제 갈 길을 가면 되는데, 어찌하여 사람들을 데려와 한 달이나 넘게 나를 뒤쫓는단 말이냐? 나도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두형이 웃으며 왕극과 눈빛을 한번 교환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딱히 참으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그러자 왕극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가 겁이 나 도망친 것이 아니냐? 만약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진작 우리와 결사일전을 치렀겠지. 왜, 남을 겁탈하고 노략질할 용기는 있고, 사내답게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는 없느냐?”
두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왕형, 잊으신 모양이군요. 저런 자들일수록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를 두려워합니다. 괴롭힐 만한 상대를 만나면 온갖 포악을 떨치고, 맞설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발바닥에 기름칠한 것처럼 도망치는 놈들입니다.”
뒤에서 따라온 강호인들도 말에서 내려 큰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두 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기들이 한 짓이 있으니, 우리만 보면 그렇게 도망친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오늘로 끝입니다!”
뒤따라온 여섯 명의 사람 중 한 사람은 허리춤에 있던 술병을 풀어 한 입 마신 후 다른 이들에게 전달했다.
이통주는 뻐근한 몸을 쭉쭉 늘이며 아직도 말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조대동(趙大同), 만약 네가 여기서 자결한다면 네 가족은 목숨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겠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말 등 위에 앉은 남자가 두형과 왕극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쪽의 이통주를 비롯한 여섯 사람을 바라본 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흥, 나는 일찍이 남은 가족이라곤 없다. 게다가 너희와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적일 뿐인데, 내가 네 놈들의 말을 믿고 자결하겠느냐? 꿈도 크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봐야 죽는 것뿐인데, 가는 길에 몇 명 데려가는 게 낫겠지!”
“맞아!”
“죽여버리자!”
이통주는 고개를 저으며 비웃음을 지었다. 앞쪽에 선 두형은 담담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조대동,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말로만 한 약속이라고 고개 돌리자마자 모르는 척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우리는 약한 자를 괴롭히고 강한 자에 빌붙는 이들이 아니다. 그간 강호에서도 우리의 명성이 퍼졌을 테니 알겠지만, 언제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이형의 말이 바로 우리 모두의 뜻이다. 다시 잘 생각해보아라.”
말 등 위에 앉은 남자는 얼굴색이 시시때때로 변했다가, 결국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크게 고함치며 칼을 휘둘러왔다. 그러자 조대동의 일행 모두 무기를 뽑고 두형의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무리의 사람들은 한곳에 뒤엉켰고, 검광과 주먹이 오고 갔다. 고함과 끔찍한 비명이 산길에 울려 퍼졌고, 어떤 이들은 싸우면서 슬슬 수풀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퍽!
이통주는 마지막까지 서 있던 남자를 장법으로 날려 보냈다. 그는 나무에 부딪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다른 이들은 이미 숨이 끊어졌거나 반항할 능력을 완전히 잃은 채였다.
비록 머릿수에서 차이가 크게 났지만, 두형의 일행들은 이들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났다.
이통주는 손을 탁탁 털고 두형의 곁으로 다가왔다. 두형은 장도를 탈탈 털어 그 위에 남은 핏물을 털어낸 뒤 다시 검집으로 넣었다.
“두형(*兄: 나이가 비슷한 동료나 아랫사람을 조금 높여 부르는 말), 왕 포두, 이번에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잡았습니다. 연지에서는 도적이 되기가 쉬운가 봅니다.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요.”
이통주는 그간 줄곧 두형을 따르고 있었다. 전에 두형과 함께 별 괴이한 것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던 그에게 이런 자들은 무척 손쉬운 상대였다.
“저들에게 해를 입은 자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걸요.”
왕극은 이렇게 말하며 의식을 잃은 남자를 발로 한 번 뻥 찬 뒤, 말을 이었다.
“조대동,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 그러게, 내가 조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했었지. 하하, 내 일전에 이미 지부(*知府: 부를 다스리는 장관) 대인을 만나고 왔다. 너는 애전부에 돌아가면 능지(*凌遲: 산 채로 살을 회 뜨는 형벌)형을 받을 것이다.”
땅 위에 엎어진 남자의 몸이 덜컹하고 움직였다. 그가 막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왕극은 그의 목 부근을 발로 차 정말로 정신을 잃게끔 했다. 곁에 있던 이통주는 무릎을 구부려 그의 혈 자리 몇 곳을 연이어 눌렀다.
짝짝짝짝!
별안간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오자, 두형의 일행은 두리번거리며 온몸을 뻣뻣이 긴장시켰다.
수풀 사이의 한 나무 위에 푸른 옷을 입은 남자가 가지 위에 앉아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일행 여덟 사람은 물론이고, 조대동의 사람들도 누군가 그 위에 앉아있다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귀하는 누구십니까? 조대동과 무슨 관계라도 있습니까? 만약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저희가 오해하지 않도록 명백히 밝혀 주십시오.”
왕극은 큰 소리로 이렇게 물으며 손을 등 뒤의 칼자루에 갖다 대었다.
육 산군은 박수를 멈추고, 웃는 얼굴로 두형과 왕극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허심탄회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하하하하……. 잘됐군요, 정말 잘됐어! 왕극도 뛰어나고, 두형 당신은 한쪽 팔을 잃었는데도 수련에 정진하여 진정한 협객이 되었군요!”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왕극과 두형 모두 화를 냈겠지만, 저자의 어조에는 왜인지 그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두형은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시군요.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육 산군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육 산군은 왕극와 두형의 모습을 보자, 자신이 풀어준 이들 중 진정으로 이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신이 인정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지면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바람을 몰고 와 주위의 낙엽을 바깥으로 쓸어버렸다.
그는 두형과 왕극을 향해 공수하며 미소 지었다.
“나는 두 분과 구면입니다. 내 이름은 육 산군이라고 하고, 고향은 계주 우규산이지요. 오늘 여러분을 찾아와 근황을 직접 보게 되니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계주 우규산…… 육 산군이라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두형과 왕극의 머릿속에 한순간 무수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오래전 산신당 밖에서 공수하던 호랑이였다. 그러자 두 사람의 등에서 식은땀이 솟기 시작했다.
“이런, 무얼 두려워하십니까? 옛말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면 귀신이 찾아와도 겁날 게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 육 산군은 항상 약속을 중히 여겼고, 약속을 중히 여기는 이들 또한 존경해왔습니다. 특히 제게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이들 말입니다. 그러니 켕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육 산군은 이렇게 말한 뒤 웃으며 예를 거두었다. 왕극과 두형은 그제야 그에게 인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사람은 공수하며 읍했고, 다른 한 사람은 허리를 구부리기만 했다.
“산군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