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제게 죽음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魔)!”
마지막 글자가 떨어지며 진언이 완성되자, 거대한 산에 다채로운 색깔이 깃들더니 다시 한번 실체가 생겼다.
바로 그 순간.
챙……!
날카로운 검명(劍鳴)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눈처럼 새하얀 은빛이 번쩍하고 지나가며 불광을 뒤덮었다.
넝쿨검은 전력을 쏟아부어 실체화한 산을 위아래로 베어냈다.
콰지직……!
요괴를 짓누르던 거대한 산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이 점점 더 커지자 그 위에 서려 있던 불광이 끊어졌다.
두 금갑역사의 몸에 노란빛이 번쩍였다.
“허업!”
“흡!”
거친 기합 소리와 함께 역사들은 두 동강 난 거대한 산을 공중으로 각기 던져버렸다. 뒤이어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산의 아래쪽에 힘껏 주먹을 꽂았다.
쿠웅……! 콰광!
육 산군을 짓누르던 산은 이미 선검에 의해 그 정수(精髓)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두 역사의 일격에 맞자 산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자 산에 남아있던 불광이 그 일격과 충돌해, 광풍을 일으키며 주위를 휩쓸었다. 산속에서는 초목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흙먼지와 돌멩이가 날아다녔고, 대명사 승려들은 몸을 낮추거나 얼굴을 끌어안고서 거센 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명왕의 두 손바닥은 산이 산산이 부서지는 동시에 튕겨 나갔고, 뒤이어 그의 몸도 살짝 비틀댔다.
계연은 구름을 타고서 10장(*약 30m)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거대한 명왕의 화신 앞에 내려섰다. 법안을 열어 관찰해보니, 화신은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듯했다.
조금 전 그 거대한 산은 명왕불의 화신이 가진 모든 불법을 쏟아부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명왕불에게 직접 손을 대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것은 명왕께서 나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불상은 고개를 내려 눈앞의 흰옷을 입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면 범인(凡人)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관찰해보면 주위의 흙먼지가 그를 저절로 피할뿐더러, 주위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존하(*尊下: 듣는 이를 높여 이르는 말)께서도 수선자이시군요. 저 요물이 사찰에 들어와 나를 모시는 승려를 잡아먹으려 하는데, 도와주지는 않을지언정 어찌하여 저 요물을 돕는 겁니까?”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명왕께서 품고 계신 생각이 따로 있고, 저도 제가 가진 저만의 도리가 있듯, 각명 대사도 스스로 선택을 내린 것입니다. 하지만 육 산군이 확실히 무례를 범하였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그를 대신해 명왕께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일은 명왕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계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대답했다.
“명왕께서는 불문의 지존에 자리한 분이시니, 오늘 일어난 일의 내력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불법은 무변, 무량하나 명왕의 화신으로는 그 무량한 법을 더 이상 담아낼 수 없으실 겁니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시지요.”
그러자 불상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금 합장하며 계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존하께서는 신묘하고 무량한 술법을 가지고 계시니, 부디 대명사 승려들이 무탈하도록 지켜 주십시오.”
이에 계연도 웃는 얼굴로 좌지명왕을 향해 공수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없더라도, 대명사 승려분들께는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불상은 호랑이 몸에 인간의 얼굴을 가진 요물을 잠시 바라보았다.
“선재…….”
명왕의 묘원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화신이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아래에서부터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명왕의 화신은 원래 흙으로 빚었던 모습 그대로 돌아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명왕 불상이 가루로 변해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대명사 승려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와 동시에 몰려오는 공포를 느꼈다.
세 노승은 명왕 불상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고 합장했다. 다른 승려들은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계속 <좌지명왕경>을 외웠다.
명왕의 화신이 완전히 사라지자 세 노승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계연을 향해 몸을 돌려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합장했다.
“선재 대명왕불. 선장(仙長), 저희 대명사 승려들은…….”
계연은 노승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방장(方丈)께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대사(大師)들께는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그의 온화한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대명사 승려들은 모두 그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전 계연은 명왕에게 자신이 있든 없든 육 산군은 분명 정도를 지킬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때로는 말을 달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지금 승려들은 모두 놀라 불안해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바로 자신이 지금 하는 말이리라.
이렇게 말하며 계연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각명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깎은 것 말고는 아홉 명의 소협 가운데서 옛날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낙응상보다도 외관에 그다지 많은 변화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계연의 기억에도 그 당시 이십 대 초반의 조룡은 무척 노안이었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중년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
각명은 다른 승려들이 명왕 불상이 가루로 변해 사라진 후에야 불경을 왼 것과는 달리, 명왕의 화신이 나타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쉬지 않고 불경을 외고 있었다. 조금 전 요법(妖法), 불법(佛法), 선법(仙法)이 오고 가는 엄청난 소음과 진동도 그에게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 듯했다.
명왕의 힘은 여전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는데, 처음에는 강물처럼 빠져나왔다면 지금은 가는 물줄기처럼 변해 있었다. 명왕의 불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은 이제 각명에게서 빠져나와 대명사 안에 퍼져나갔다.
계연이 각명을 관찰하던 동안, 육 산군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명왕의 진산강마(鎭山降魔) 대법(大法)은 그 위력이 엄청났다. 실체를 갖춘 산은 말 그대로 천근만근의 무게로 자신을 짓눌러 조금도 반항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 혼자였다면, 산 아래에 그대로 처박혔을 것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 확실했다. 금갑 역사 둘이 도와줬는데도 하마터면 바닥에 엎어질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선검(仙劍)이 모습을 드러내, 불법(佛法)이 서린 거대한 산을 베어냈다.
육 산군은 자신의 양쪽에 서 있는 금갑 역사를 관찰했다. 두 역사는 거대한 체격에 붉은 얼굴에는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위로 흐르는 빛은 눈을 찌를 만큼 번쩍이지는 않았고, 그들의 몸 앞뒤로는 노란 천이 당당하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팔을 내리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뿜어내는 위세가 자못 당당했다.
역사들이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육 산군은 몸을 한번 털어낸 뒤 수백 장 떨어진 곳으로 도약했다. 육 산군은 자신의 뿜어내는 요기(妖氣)를 갈무리하고, 대명사 광장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계연에게서 채 10장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땅에 내려앉은 거대한 요괴의 몸은 희미한 빛무리 안에서 점차 줄어들다가, 마침내 옅은 황색에 구름무늬가 수놓인 장포를 입은 젊은 남자로 변했다.
육 산군은 계연을 향해 공수한 다음 읍했다.
“육 산군이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계연은 몸을 돌려 육 산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명왕의 화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내가 없는 셈 치거라.”
“예!”
육 산군은 이렇게 대답한 뒤 예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의 노승들과 주위의 승려들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불경을 외고 있는 조룡에게 시선을 내렸다.
육 산군은 자신의 은사(恩師)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연에게 조룡을 놓아주어야 하는지 혹은 그 외 다른 말을 따로 묻지 않았다. 스승이 말한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때 사찰 전체는 무척 고요하여 조룡이 홀로 불경을 외는 소리만 들렸다. 육 산군, 계연, 다른 승려들은 모두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각명의 몸에서 더는 명왕의 힘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내내 외고 있던 불경 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각명은 눈을 뜨고 엉망이 된 사찰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광장을 빼면 다른 건물은 그리 망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고작해야 기왓조각이 떨어져 나간 정도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한번 쓱 훑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 거대한 요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각명은 다른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던 각명은 약간 주저하며 이렇게 물었다.
“혹…… 계 선생님이십니까?”
그러자 계연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조룡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각명 대사라고 불러야 하나요?”
“선생께서 부르고 싶으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계연을 마주치자 각명은 조금 부끄러워졌다. 뒤이어 계연에게 인사를 올리려다가, 그간의 습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계연을 바라보니, 그의 뒤편에 모르는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각명은 그가 육 산군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러자 육 산군이 각명에게 몇 발짝 다가갔다.
이제는 어떤 승려도 그들 사이를 나서서 막지 않았다. 세 노승은 눈을 감은 채였다.
“조룡, 혹 생각을 바꿨소?”
중년의 승려는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물음에 상관없이 이렇게 탄식했다.
“저는 줄곧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못하고, 수행할 때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요. 닥칠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생사의 순간에 맞닥뜨려서도, 사찰의 모든 승려를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스운 인생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각명은 쓴웃음을 짓더니 마침내 그 모든 것에서 해탈한 듯, 육 산군을 향해 합장하며 승려의 위치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육 시주(施主), 제게 죽음을 베풀어 주십시오.”
각명은 허리를 90도로 굽힌 그대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벼운 바람이 사찰을 훑고 지나갔고, 소량산 전체는 무척 고요해졌다.
그러자 육 산군은 몇 걸음 더 다가가 소매를 툭툭 털어낸 뒤, 각명을 향해 공수하며 읍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 몇 초간 공손히 인사했다. 뒤이어 육 산군이 허리를 펴자, 각명의 몸에서 햇빛을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거대한 황색과 검은색의 그림자가 생겼다. 그림자는 마침내 거대한 맹수의 입으로 변했다.
각명은 고개를 들어 숨을 참은 뒤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입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과 동시에 그의 눈앞이 깜깜해졌고 마침내 각명은 의식을 잃었다.
넋을 놓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승려들은 흠칫 놀랐다. 거대한 입이 각명을 단숨에 삼키는 것을 보고 승려들은 두려운 와중에도 무언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
세 노승은 이때가 되어서야 마침내 눈을 뜨고, “선재”라고 외치며 고개를 숙인 뒤 불경을 외웠다.
계연은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행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