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분위기가 변하다
우패천은 막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리려다가, 돌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장원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귀를 움직이고 쉴새 없이 냄새를 맡았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연 동생, 누가 오려는 것 같아. 사람은 아니야. 무척 희미하긴 하지만 저 타는 듯한 냄새는 사람이 풍길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아무리 잘 숨겼어도 내 코를 피할 수는 없지. 그나저나 나를 찾아온 것인지 아우를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군!”
우패천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비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후, 우패천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장원에서 이어진 길 저 끝에 사람 모습이 하나 나타났다. 그자는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더니, 순식간에 장원 밖 채소밭에 가까워졌다.
“우 형님, 아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우패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그 여인은 변신에 능하니 혹시 모르지. 아니면 동생이 말했던 그자가 온 것일 수도 있겠어.”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육 산군이 길을 따라 걸어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육 산군은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고 그 바깥에서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두 분, 비검객(飛劍客) 연비가 혹 이곳에 삽니까?”
그러자 연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육 산군을 관찰했다.
“예, 여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연비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데, 그쪽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울타리 밖에 선 남자가 기품있는 태도로 허리를 숙인 뒤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육 산군이라 합니다.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과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오호라, 그쪽이 그 호랑이 요괴로군?”
연비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우패천이 이렇게 물었다. 그의 몸에서는 이미 흉흉한 기세의 요기(妖氣)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패천은 사리구별도 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간 연비에게서 우규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우패천은 성정이 거칠었지만, 또 세심한 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우규산의 호랑이 요괴에 대해 여러 번 홀로 분석해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거의 20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일정 수준에 오른 요괴들에게 있어 2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니 지금이라고 해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우패천은 정통 수행계와 접촉한 적이 없었던 산간에 사는 요괴의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하여 육 산군에 대한 결론을 몇 가지 내릴 수 있었다.
첫째, 육 산군의 실력과 마음가짐은 아홉 명의 소협들을 전부 능가한다. 그들은 그러한 수준의 요괴에게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 둔갑한 후라면 더욱 불가능하다. 게다가 육 산군은 아홉 사람의 생사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둘째, 심사가 치밀하다. 하지만 동시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모가 있다. 당시 계 선생님이 있어 그의 생각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선생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소협들은 그때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지혜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요괴가 자신이 계 선생님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 약속을 무척 중시한다. 계 선생님을 정말로 존경하고 있거나 혹은 두려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세 가지 전부 해당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요괴는 성격이 단순했고, 육 산군은 그중에서도 한번 말을 뱉으면 꼭 실행해야 하는 성격인 듯했다. 사람을 잡아먹지 말라니 먹지 않겠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를 죽일 것이 확실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우패천이 반복적으로 추론하여 이끌어 낸 결론이었다. 만약 계연이 우패천의 이런 생각을 들었다면 반드시 감탄했을 것이다. 사리에 맞고 근거도 있으니 무척 신뢰도가 높은 추론이었다.
육 산군을 만난 우패천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먼저 기선제압을 해야겠군. 저 둔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요괴 놈한테 선배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현재 조월국의 신도(神道)는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다. 이런 낙경성 같은 곳일지라도, 성황신의 세력은 그저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낙경성의 성황신은 이미 우패천이라는 요괴가 성 밖에 머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요괴는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갖춘 도행의 수준이 깊었다. 이에 낙경성 성황신은 우패천이 낙경성에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암묵적으로 우패천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우패천이 자신의 요기(妖氣)를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패천도 진짜로 모든 기운을 드러내지는 않고 어느 정도 자제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범위만 조절했을 뿐, 기운이 뿜는 힘 자체는 그대로였다.
우패천이 서 있는 2장(*약 6m) 범위의 주위에는 그의 요기가 넓게 깔렸고, 하늘로는 3장 높이까지 솟구쳤다. 위세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대신 살기가 기세등등했다. 그가 뿜어내는 요기에서 두 눈에 붉은빛이 번뜩이는 커다란 소의 머리가 포효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자 육 산군의 시선이 마침내 연비에게서 떨어지더니 우패천에게 향했다. 우패천은 턱을 조금 치켜들고서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육 산군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 깊은 곳에서 섬뜩한 빛과 화염이 솟구쳤다.
연비의 곁에 도행이 이렇게나 깊은 요괴가 있다니, 육 산군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에 육 산군은 다시 우패천을 향해 공수하며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하께서는 누구십니까? 연 대협과는 무슨 관계이십니까?”
우패천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육 산군이 고분고분한 태도로 굽히고 나오는 것을 본 그는 표정을 조금 풀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우패천이네. 소를 일컬을 때의 그 우, 그리고 천하를 제패한다는 뜻의 패천. 연비와 나는 의형제 사이이지. 비록 내 아우는 범인(凡人)이지만 우리는 서로 잘 맞고 성향도 비슷하다네(*合胃口: 성향·마음이 맞는다는 뜻도 있지만, 입맛에 맞는다는 뜻도 있음). 아, 그가 맛있다는 뜻이 아니고 성격을 말하는 것이네.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동고동락하기로 했으니, 만약 내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뜻이네!”
우패천은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말뜻을 친절히 해석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생을 산에서 살다가 막 둔갑한 육 산군이 행여나 자신의 말을 곡해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동시에 육 산군에게 연비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확실히 알렸다.
“아, 실례가 많았군요. 연 대협께서는 좋은 형님을 두셨습니다!”
육 산군은 웃으며 대답하고는 울타리 안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연비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든든한 우패천이 곁에 있으니, 연비는 이 상황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두렵지 않았다.
육 산군이 막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우패천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잠깐, 내가 들어오라고 했었나?”
우패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묻자 육 산군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발을 거둬들이고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우패천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게.”
그러자 육 산군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이며 목을 움직여 ‘뚜둑’ 소리를 냈다.
“우 형님, 너무 심한 게 아닌지…….”
연비가 진기(眞氣)를 이용해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묻자, 우패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요괴는 본때를 보여줘야 해. 게다가 여기는 우리 근거지이기도 하고. 저기, 말 잘 듣는 것 좀 봐.”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동안 육 산군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누르고 이미 장원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하지만 연비는 우패천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 산군에게 너무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어, 탁자 위에 놓인 쟁반에서 찻잔을 뒤집어 그 안에 찻물을 따랐다.
삼복더위가 서서히 끝나가는 때였기 때문에 찻물은 여전히 뜨거운 상태였다.
“산군, 여기 앉으십시오. 차 한 잔 드세요.”
우패천도 곁에 있고 그간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비는 당당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육 산군은 짤막하게 응하고는 탁자 옆에 앉았고, 연비도 그를 따라 옆에 동석했다. 우패천만이 흉흉한 기세를 내보이며 한쪽에 서서 육 산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우패천이 계속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육 산군도 참지 못하고 한껏 비꼬는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우패천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그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비, 당신도 왜 내가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조월국 내에서 비검객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데다, 당신 몸에서는 악한 기운과 원한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정말로 의를 행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는 연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듣자 하니 9년 전에 무예를 겨루겠다는 명목으로 싸움을 하다가, 그 대협이 당신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지요? 맞습니까?”
연비는 눈을 감고 기억을 회상하다가 탄식을 내뱉었다.
“맞습니다. 흔히들 검에는 눈이 없다고 하지요. 실력을 겨루던 중 위험한 순간에 제가 미처 손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검법을 더욱 갈고닦기 위해, 조월국의 여러 강호 명사들과 맞붙었습니다. 그중 몇 명은 중상을 입었고, 죽은 이도 있습니다.”
“흥, 강호의 무인들이 무예를 겨루는 것은 서로의 동의 아래 하는 일인데, 당신이 뭐라고 이 일에 대해 떠드는 건가?”
우패천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생사장(*生死狀: 생명이 걸린 행위를 벌이기 전에 양측이 맺은 면책서)이라고 자네가 아나?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은 결투를 받아들일 것이고, 결투 중 죽었어도 자신의 실력이 모자람을 탓해야지, 상대를 탓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요괴들이 사람 몇 명 잡아먹는 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사람들끼리 무공을 겨루다가 목숨을 잃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우패천은 별안간 온몸을 감싸는 오한이 느껴지자 하던 말을 뚝 멈췄다.
육 산군이 차가운 눈빛으로 오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비가 무예를 겨루다가 사람을 죽였다는 대목까지만 해도 그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패천이 방금 ‘우리 요괴들이 사람 몇 명 잡아먹는 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이라고 운운하던 순간 갑작스레 생긴 변화였다.
우패천은 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연비, 그 당시 아홉 명의 소협들을 내 거의 다 만나보았는데, 당신이 요물과 의형제를 맺었을 줄은 몰랐군. 하하하하하……! 어쨌든 저 요괴 놈의 언행을 보니, 너도 무슨 제대로 된 놈이 아닌 건 분명하군.”
육 산군은 한입에 찻물을 털어 마시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흉흉한 금빛이 번쩍이는 눈으로 연비와 우패천을 바라보았다.
육 산군은 이미 우패천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고 있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나 거칠고 무례한 자들이 널려 있듯, 그것은 요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육 산군도 그동안 넓은 마음으로 한발 물러서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살기가 농후한 요물이 방금 자기가 아무렇게나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실토한 것이다. 게다가 ‘비검객’이라는 별칭을 가진 연비에게서도 악하고 원한 섞인 기운이 느껴지자, 그에 관한 평가 중 악의적인 면이 더욱 사실에 가깝게 느껴졌다.
“왜 그러나, 한판 붙어보려고? 이제 겨우 둔갑한 ‘꼬마 요괴’ 주제에 나와 맞붙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우패천은 이미 분위기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고 더욱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아무리 호랑이 요괴라 해도, 저놈은 이제 겨우 둔갑한 요물이다. 저 요괴가 백 년을 더 수련해도 날 이기지는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