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자네는 정말 시원스러운 성격이군
계연은 낮고 온화한 목소리로 <산해경(山海經: 중국 고대의 지리서)>의 구절을 인용해 대답했다.
“호랑이의 몸에 아홉 개의 꼬리, 사람의 얼굴에 호랑이의 발톱을 가졌으며 곤륜산에 서서 멀리 동쪽을 바라보는구나. 그가 바로 신수(神獸) 육오(*陸吾: <산해경>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신수로, 곤륜산(崑崙山)을 관장한다고 함)다.”
“육오?”
“신수라고요?”
육 산군과 우패천이 동시에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다만 육 산군은 ‘육오’라는 이름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었고, 우패천은 ‘신수’라는 말에 더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우패천은 신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신수는 산신(山神)이나 수신(水神) 등 신도(神道)를 닦는 신령들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육 산군은 어떻게 봐도 그들과 같은 신령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계연은 육 산군과 우패천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육오. 하지만 진정한 육오는 꼬리가 아홉 개이지. 그러니 너는 아직 조금 모자란 상태란다.”
“그게 어디가 조금입니까, 한참 멀었지!”
우패천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혼자 투덜거렸지만,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육 산군은 그의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계연도 우패천을 상대하지 않고, 육 산군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덧붙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부단히 수행하면 될 거야. 너와 같은 육오를 찾아갈 생각은 할 필요도 없다. 용들과 달리 육오는 세상에 단 하나거든.”
사부의 말을 듣고 육 산군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대답했다.
“예!”
계연은 다시 한번 세 사람을 훑어본 뒤, 낙경성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 일은 여러분들끼리 합의하세요. 저는 낙경성에 가서 저곳 귀신들을 안심시키고 와야겠어요.”
계연은 말을 마치고 가볍게 날아올라, 바람을 몰고 낙경성 방향으로 떠나갔다.
* * *
낙경성 백성들은 이제야 폭풍에 대한 우려를 내려놓은 참이었다. 조금 전의 그 폭풍은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였는데, 다행히 성안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사라졌다.
비록 모래와 돌가루가 성안에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기껏해야 동쪽 성벽 근처의 한구석일 뿐이었다.
물리적인 영향은 없었다지만, 이 사건이 백성들에게 끼친 정신적인 영향은 아직 남아있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요괴의 포효가 성까지 어렴풋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천둥소리라고 여겼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요괴나 마귀가 소동을 부리는 줄로 알고 잔뜩 긴장했다. 그간 조월국의 많은 지역이 온갖 삿된 존재들로 인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성황당의 향불이 끊이지 않고 타오를 터였다. 그러고는 또 평소처럼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이때 낙경성 백성들이 향을 올리며 정성껏 모시는 성황신과 그의 휘하 귀신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성벽 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날아와 성벽으로 내려섰다. 진작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낙경성 성황신은 휘하의 귀신들과 함께 계연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예를 올렸다.
“저 요물들을 제압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장(仙長)!”
계연은 굳이 호칭을 고쳐주기도 뭐해서 마찬가지로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성황신과 여러 기관장께서는 어서 예를 거두세요. 성 밖 요물들의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낙경성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을 거예요.”
계연은 굳이 자세히 사정을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으므로, 대강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하다는 확신이었다.
귀신들은 조금 전의 싸움을 전부 다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에 벌어진 일은 똑똑히 목격했다. 게다가 계연은 굳이 그들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자신의 법력과 영기를 얼마쯤 드러냈었다.
정통 수선자들 중, 특히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법력과 영기에서는 신령한 느낌이 난다. 그것은 요괴나 마귀들이 뿜어내는 요기나 마기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그 느낌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귀신들을 안심시킬 정도는 되었다.
계연이 낙경성 귀신들에게 한바탕 사건을 설명한 후 다시 성 밖 장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하마터면 자신이 잘못 온 줄 착각할 뻔했다.
이 작은 장원의 대부분은 두 요괴의 싸움 중에 무너지고 꺾어져서, 지금은 방 한 칸과 초막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당의 돌 탁자와 의자 몇 개는 그나마 괜찮은 상태였다.
이때 우패천은 깨진 데 없이 멀쩡한 찻주전자를 들고서, 다기를 따뜻한 물로 한번 씻은 후 정성껏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연비가 아니라 연비 옆에 앉은 육 산군에게 찻물을 따라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성질 더러운 소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머리는 맞은 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우패천은 당연히 맞아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태도가 이토록 사근사근한 데에는, 육 산군이 후에 연비에게 호의를 베풀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육 산군이 아주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자, 육 씨! 우리 집이 무너졌긴 하지만, 그래도 이 찻주전자는 멀쩡하다네. 이 찻잎 맛 좀 보게. 이건 근처 산에서 자라는 찻잎을 볶아서 만든 건데 아주 맑고 개운한 맛이 나지. 어서 맛보게!”
우패천은 계연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계 선생님 오셨군요! 낙경성의 귀신들은 저한테 입도 벙끗 못하니, 굳이 가서 무슨 설명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어서 와서 차 드세요!”
계연은 그들이 앉은 탁자로 다가가 육 산군을 향해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얼굴의 육 산군을 보니, 그도 왜 우패천의 태도가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는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패천은 조금의 기회라도 잡아 육 산군을 깎아내리려고 애썼었다.
이어서 계연이 연비를 바라보자, 연비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계 선생님, 어서 앉으세요!”
우패천은 계연의 앞에 찻잔을 놓아주고는 뜨거운 김이 솟는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자기도 자리에 앉아 육 산군과 계연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맛이 괜찮습니까?”
“괜찮네요.”
“차 맛이 좋군요.”
계연에 비해 육 산군은 좀 더 성의있게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우패천이 하하,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건 제가 직접 볶은 찻잎입니다. 예전에 제가 밭일하는 소였을 때, 그 가족들이 가난하긴 했지만 대신 여주인이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봄마다 산에 올라 야생 찻잎을 따다가 집에 와서 그것을 볶아 직접 차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차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는 헛간에 와서 제 여물통에 쏟아주었었지요. 그게 아주 상쾌하고 맛있었어요…….”
우패천은 드물게도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뒤쪽의 건물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장원만 아깝게 되었습니다. 저와 연 동생이 힘껏 돌본 장원이었는데요. 게다가 저와 수백 년의 세월을 함께한 솥도 망가졌지 뭡니까…….”
“푸웁……!”
그의 말에 연비가 찻물을 앞으로 뿜었다. 하지만 연비가 제때 입을 가린 덕분에, 계연의 옷이 젖지 않을 수 있었다.
“장원을 재건하는 데에 은자가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돈이 모자란 것은 사실 별문제가 아닙니다. 추억이야말로 돈으로는 못사는 것이니까요…….”
계연의 입꼬리가 슬슬 떨려왔다. 그는 우패천의 말을 거들 겸 이렇게 물었다.
“그럼 은자 말고 금은요?”
“금이라면 꽤, 흠……. 금덩이가 있다고 한들 추억은 되살릴 수 없지요…….”
계연은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눈치챘다. 우패천은 지금 육 산군에게 돈을 뜯고 있는 것이었다. 돈을 받아서 무얼 할건지는 그간의 행적을 보면 뻔했다. 계연이 연비를 바라보자, 연비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우패천은 요괴였으므로 돈을 얻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버는 것보다 쓰는 속도가 훨씬 빠를 뿐이었다. 몇 년 동안 그가 이 낙경성 안 기루들에서 펑펑 써댄 돈은 보통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그러니 육 산군이 부자라는 걸 알아버린 그가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한편 육 산군은 우패천이 그렇게까지 뻔뻔한 요괴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므로, 우패천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미안해했다.
“장원이 무너졌으니 당연히 배상해야죠. 저도 재건하는 데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육 산군이 이렇게 대답하자 우패천은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육 씨 자네는 참으로 시원스러운 성격이군!”
그러고는 육 산군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은자가 얼마나 있는가?”
육 산군은 그의 물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천천히 계산해 보았다. 육 산군은 자신의 원래 가지고 있던 쇄은자(碎銀子)와 동씨 집안에서 받은 현상금을 더했다.
“2천 냥 정도 있습니다.”
“잘됐군! 자네는 정말 호쾌하군! 그 2천 냥 내가 받겠네!”
우패천은 육 산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친근하게 웃었다. 육 산군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가 가까스로 그의 팔을 쳐내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패천의 기대와 달리 육 산군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낙경성 밖에 자리한 이런 작은 장원은 2백 냥 정도면 잘 쳐준 것이었다. 게다가 우패천이 말한 수백 년을 함께했다던 커다란 솥은 그 말의 진위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멀쩡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우패천이 손에 쥐게 된 배상금은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금액이었다.
* * *
그날 밤, 장원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우패천은 성안의 객잔에서 묵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리고 그 객잔은 낙경성의 홍등가 바로 옆이었다.
만약 일행 중에 계연이 있지 않았다면, 우패천은 곧바로 홍등가로 그들을 데려갔을 것이었다. 그 거리에도 객잔은 있었으니 말이다.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함께한 후, 낮에는 육 산군과 죽느니 사느니 싸우던 우패천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산책’을 하고 오겠다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핑계를 대고, 곧장 기루가 늘어선 홍등가로 향했다.
그리하여 객잔에 남은 셋 중 계연은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했고, 다른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계연의 방으로 향했다.
육 산군은 자신처럼 계연을 방문하러 온 연비를 보고는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연비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같은 예로 인사했다. 그러고는 육 산군이 나서 계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계연이 탁자 앞에 앉아 텅 빈 ‘검의첩’ 두루마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앉으세요.”
연비가 육 산군을 한번 바라본 후, 문을 잘 닫고 탁자 앞으로 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