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78화 (378/892)

378화.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계연의 시선은 둘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육 산군이 자리에 앉던 순간, 계연은 육 산군의 왼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알아차렸다.

“상처가 꽤 크구나.”

계연의 앞이니 육 산군은 자연히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예, 그가 생각을 바꿔 저를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왼팔이 아예 꿰뚫릴 뻔했습니다. 그 사나운 소가 전에 제게 수백 년은 더 수행하고 오라고 했었지요. 비록 조롱의 의미였다는 건 알지만, 저보다 확실히 도행이 높긴 했습니다.”

우패천이라면 체면을 차리느라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육 산군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특히나 계연의 앞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연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요괴들 간의 싸움은 정말로 해와 달의 빛을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무인들끼리 싸움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력도 중요했지만, 판단력과 심리적인 요소도 중요했다.

연비는 싸움의 후반부로 갈수록 우패천이 심지어는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애를 먹는 것처럼 느꼈었는데, 지금 연비는 육 산군의 말을 듣고서야 실은 그와 상황이 반대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무인들끼리의 싸움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계연은 육 산군의 말에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렇게 말했다.

“우패천의 법체가 대단하긴 했지. 소모하는 힘이 크긴 하지만, 대신 신체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또한 수련으로 쌓은 잠재력도 엄청나더구나. 반면 너는 모든 수단과 계책을 동원했는데도 그의 법체를 부수지 못했지. 그런데 사실 그의 법체는 전에 한 요괴가 부순 적이 있었어.”

육 산군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제자였으므로, 계연은 속으로는 줄곧 육 산군을 크게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아홉 명의 소협들과 했던 맹세도 끝을 본 셈이니, 육 산군에게 좀 더 사정을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계연의 말에 우패천과 맞붙었던 육 산군은 당연히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언제입니까? 누구였나요?”

그러자 계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예상이 옳다면 서역 남주 천창산에 있는 옥호동천(玉狐洞天)에서 온 요괴야. 여우 요괴일 가능성이 크다.”

“여우 요괴라고요?”

육 산군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여우 요괴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들개 몇 마리로도 능히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특히 꼬리를 여러 개 달고 난 후에는 좀 더 상대하기 까다로워진다.

“그래, 여우 요괴. 저 성질 나쁜 소의 가장 큰 약점은 그가 호색한이라는 거야. 그 여우 요괴가 바로 그 점을 노렸지. 하지만 그 요괴가 가진 수단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어. 꼭 기억하렴. 만약 나중에 옥호동천의 여우 요괴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도사연이라는 이름의 여자 요괴라면 더욱더 말이야. 그 요괴는 여러 가지 일을 알고 있더구나.”

육 산군이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혹 제게 내리실 분부가 있습니까?”

“그래.”

계연이 연비를 바라보고 눈을 맞추자, 계연의 희뿌연 두 눈에 신령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자 연비는 즉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졌다.

연비가 잠에 빠지자 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산군, 나는 일찍이 선수(仙獸)들이 수행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네게 직접 전수해주진 않았다. 오히려 네게 지시를 내리고 이리저리 이끌어 스스로 깨닫도록 했지. 이는 네 잠재력을 제한하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육 산군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스승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이미 어떻게 해야 은사에게 효(孝)를 다할 수 있을지 여러 번 고민해왔었다. 그리고 이제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우리가 모든 곳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이 광활한 땅에는 동천(*洞天: 도교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의 유형 가운데 하나. 대개 동굴이나 석동, 계곡 등 지하 또는 반지하 공간)처럼 은밀히 숨겨진 곳도 있고, 그런 세상 곳곳에는 여러 존재가 살고 있지. 그리고 비록 여기저기 퍼져있긴 하지만, 요괴들은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들이야. 그리고 그들의 힘이 강대하여 선문(仙門)의 수행자들조차 쉽게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곳이 있어. 바로 흑황(黑荒)이라 불리는 흑몽영주(黑夢靈洲)지.”

여기까지 말한 계연은 진지한 얼굴로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선문에 몸을 담은 수행자나 신도(神道)를 걷는 신령 대부분이 요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 너도 알겠지. 하지만 이를 부정할 수 없게도, 일정 수준에 오른 요물 중에는 선한 자가 드물다. 특히 어느 특별한 지역의, 따로 목적이 있는 자들은 더욱 그렇지.”

자기 말을 귀담아듣는 제자를 바라보며 계연은 오른손을 폈다. 그러자 소매 안에서 은은한 빛이 한 줄기 나오더니 그의 손바닥에 음목(陰木)으로 된 목패가 나타났다.

“이걸 보렴.”

목패에 담긴 이물전신(以物傳神)의 술법은 이미 사라졌어야 하지만, 계연은 일찍이 이 안에 담긴 영기와 법력을 봉해 두었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손에 쥐자 육 산군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육 산군은 계연에게서 목패를 넘겨받고 한참 집중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운주의 땅에는 요괴, 선인, 귀신 등이 어울려 살지만, 그중 가장 세력이 강대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 가장 약해 보이는 인간이었다.

인간 중에도 물론 품성이 나쁘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자라면서 교화(敎化)되고 충실히 사회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이런 평화로운 상태는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다. 사람들의 원력(愿力)이 모여 신령들의 힘이 되고 그 신령들이 그들을 보호하니, 대부분의 인간은 신선, 요괴, 마귀 등이 산다는 건 알아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흑황의 땅에 사는 수많은 요괴와 마귀들은 이와 완전히 반대 상황을 누리고 있었다. ‘인축국(人畜國)’을 예로 들면, 그들은 이미 단순히 배를 불리거나 수행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먹지 않았다. 요괴와 마귀들은 인간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을 즐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종 기괴하고 잔인한 방법을 고안해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심지어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각종 방법도 다양했다. 육 산군에게도 그런 행위는 무척 변태적으로 느껴졌다.

육 산군은 이전에 계연의 가르침을 통해 이 세상에 순수한 악은 무척 드물다고 배웠었다. 하지만 지금 육 산군은 흑황의 요괴들이 모두 순수한 악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육 산군의 얼굴에 드러난 충격받은 기색을 보고서 계연의 표정도 엄숙해졌다.

“요괴들은 무척 복잡한 무리지. 너는 이미 요괴라 볼 수 없지만, 이 세상에 육오는 단 하나뿐이니, 또 누가 네 정체를 상고(上古)시대의 신수라고 여기겠느냐?”

육 산군은 내내 찌푸리고 있던 눈썹을 늘어뜨리며 계연의 말을 기다렸다.

“사부는 네가 요괴의 신분으로 요족(妖族)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내가 네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육 산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을 향해 장읍례를 올렸다.

“사부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계연은 손을 뻗어 육 산군의 손을 두드려 고개를 들게 했다.

“사부 된 자로서 나는 당연히 내 제자가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내 문하에 들어왔다면, 나는 내 제자가 기개와 사명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계연이 말을 뚝 멈췄다.

“만약 그저 흑황의 일일 뿐이라면, 혹은 그저 천하의 혼란 때문이라면……, 각종 존재 사이의 갈등, 혹은 바르고 삿된 것 사이의 양립(兩立) 문제뿐이라면 괜찮을 텐데…….”

계연이 생각이 점차 넓게 뻗어나갔다. 지금 자신이 직면한 상황은 예전에 자신이 수행을 시작하고 바둑돌을 얻게 되었을 때보다 더욱 복잡한 것 같았다. 특히 동해에서 맞닥뜨린 그 신비로운 광경은, 도통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계연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이 세상의 일만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만약 전에 내가 친 점괘가 이미 대전제(大前提)부터가 틀린 것이라면 어쩌지? 이 세상에 온갖 혼란이 연달아 일어나면 누가 가장 이득인 걸까…….”

계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더 이어갈 말도 없었다.

육 산군은 처음으로 자신의 사부가 짊어진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계연이 피로해 보이기까지 하자,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저 육 산군, 사부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음, 우리는 모두 가진 능력대로 움직여야 하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걸로 되었다. 앉으렴.”

육 산군은 복잡한 심경을 숨기고 자리에 앉았다. 계연이 연비의 몸에 손을 올리자, 연비는 점차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하품하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척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치 빠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계연이 그에게 말을 걸자, 연비는 그제야 그간 무도(武道)를 닦으며 느꼈던 여러 의혹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고 계연은 연비에게 그간 자신이 깨우친 모든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니 육 산군 말고도 대비책을 많이 만들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아오자 우패천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계연이 떠난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허무함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 내 선인지로(*仙人指路: 선인(仙人)의 가르침)!”

계연은 당연히 우패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현재 상태는 자신이 더 가르침을 줄 것도 없이 충분히 뛰어났다. 비록 언행이 가벼운 면이 있지만, 그 정도의 실력을 쌓은 걸 보면 천부적인 재능도 있고 근면하다는 뜻이었다.

그 선인지로라는 것도 실은 우패천이 가진 헛된 생각일 뿐이었다. 그는 수행에 있어 어떤 고비에 맞닥뜨리지도 않았고, 가슴에 맺힌 응어리도 없었으니, 그저 안심하고 수행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은자만 생기면 기루에 가서 스스로 즐겁게 생활하니, 이런 요괴에게는 계연도 더 가르침을 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무술년(戊戌年) 여름, 북경 항주에 자리한 선문(仙門)인 구봉산에서 열릴 선유대회(仙游大會)에 계연은 반드시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느냐가 또 문제였다.

길을 모르는 것은 둘째치고, 만약 그 혼자 가게 되면 자리가 어색해지거나 자신이 잘 모르는 일에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장 적당한 방법은 자신이 잘 아는 이와 함께 계역을 건너는 나룻배를 타는 것이었다.

계연은 이미 그에 대해 완벽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바로 옥회산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옥회산은 뼈대 있는 선문(仙門)으로 그저 그런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연히 선유대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아직 몇 년이 더 남았으니 옥회산 사람들도 지금 바로 길을 떠나진 않을 것이다. 북경의 항주가 아무리 멀어도, 계역을 건너는 나룻배를 타면 몇 달 만에 도착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계연은 먼저 대정국에 들르기로 했다. 일단 청송 도인을 통해 <검의첩> 위의 글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점쳐보고 진자주의 근황도 확인할 겸, 계연은 병주의 운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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