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글자를 점치다
병주의 운산은 운해(雲海)의 절경으로 이름난 동락현의 명산(名山)이었다. 병주를 둘러싼 다른 지방은 병주처럼 산이 적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운산은 딱 그 일대 부성에서만 유명한 산이었다.
병주는 대정국의 중원(中原)에 자리 잡은 평원으로, 북쪽만큼 춥지는 않았으나 온도의 변화가 큰 곳이었다. 시기는 막 가을에 접어든 때로 다른 지방은 아직도 여름의 끝자락이라 더위가 물러가지 않았지만, 병주에는 이미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봄과 가을은 병주에서 가장 지내기 편안한 계절이었다.
이날 이른 아침, 운산에는 여느 때처럼 안개가 끼어 있었다. 진자주는 이미 침상에서 일어나 운산관에 전해져 내려오는 양생권을 한 차례 연마한 뒤였다.
진자주는 백발에 하얀 수염, 하얀 눈썹을 빼면 모습이 많이 변한 상태였다. 생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진 의원이었다. 이제 그는 신령한 양기가 깃든 몸을 얻어 어떤 병도 앓지 않을 테지만, 양생권에 무척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양생권에 무언가 비결이 숨겨져 있다고 느꼈다.
운산관의 관주인 청송 도인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데에는 양생권의 공도 꽤 컸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는 가운데 청송 도인은 아직 단잠에 빠져있었다. 제문은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진자주가 양생권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인사했다.
“어르신께서는 정말 부지런하시군요.”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청연(淸淵) 도장.”
진자주는 동작을 멈추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운산관에서는 성년이 되어야 도호(*道號: 도문(道門)에 든 후에 받는 이름)를 받는데, 청연이 제문의 도호였다. 반면 진자주는 따로 도호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청송 도인은 감히 그를 제자로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할 테니, 진자주는 그저 운산관에 적을 둔 것으로 족했다.
사실 이 때문에 제문도 남몰래 안심하고 있었다. 사부가 정말로 저분을 제자로 받는다면, 먼저 들어온 자가 사형(師兄)이 되는 원칙에 따라 자신은 진 어르신을 진 사제(師弟)라고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제문이 뒷간에 간 사이, 양생권을 수련하던 진자주가 돌연 무언가를 느낀 듯 동작을 멈췄다. 그는 몸 안의 성력(星力)으로 영기를 끌어당겨 비겁술을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문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뒤 진자주가 보이지 않자, 이를 무척 의아하게 생각하며 진자주가 다시 잠을 청하러 방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자주가 연하봉 꼭대기에 내려서자, 그곳에는 봉우리 아래 깔린 운해를 감상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후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예를 올렸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계연도 시선을 돌려 그를 향해 인사했다.
“진공(公), 운산관에서 지내는 건 좀 적응이 되셨나요?”
“하하, 적응하지 못할 게 무에 있겠습니까? 생전에는 한평생 일하느라 바빴으니, 이제는 한적한 것도 좋더군요. 요즘에는 채기(采氣: 우주의 해와 달, 별 등 세상 만물이 가진 힘을 끌어내 체내로 받아들이는 도가(道家)의 수련법)법으로 별의 힘을 끌어당기는 수행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냅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어르신께서 한가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하산하여 의술을 펼치고 다닐 줄 알았어요.”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좋은 일이니, 계연도 당연히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자주가 미래에 계유신이 되기를 바란다면, 지금처럼 수행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이 옳았다. 의술을 펼치면 지금 여러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지만, 수행을 닦으면 장래에 무수히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계연은 진자주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저도 이치를 알고 있으니, 선생과 용왕님의 기대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운산관에도 병자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증상이 모두 비슷할 뿐이지요.”
진자주가 무척 그럴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자 계연은 어리둥절해졌다. 진자주의 명성이 산 아래로도 퍼져, 사람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산에 오른단 말인가?
“모두 증상이 비슷하다고요?”
계연의 물음에 진자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예, 약초를 캐서 만든 고약(膏藥)으로는 부딪히고 까진 상처밖에 치료를 못 하니까요.”
계연은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웃었다.
“농담까지 하시는 걸 보니 여기서 잘 지내고 계신 것 같군요.”
이전에 그가 몇 번 만났던 진자주는 말이 적고, 웃는 모습도 몇 번 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꽤 짓궂어 보였다.
“청송 도인과 제문은 일어났나요?”
“아직입니다. 하지만 반 시진(1시간)만 더 있으면 일어날 겁니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들이 일어나면 내려가죠. 지금은 이 운해를 좀 감상하고요.”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뒷짐을 지고 선 계연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진자주도 계연에게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함께 서서 운해를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흰 옷자락을 표표히 펄럭이는 계연은 신선처럼 보였고, 진자주는 흰 눈썹과 수염을 기른 늙은 신선처럼 보였다. 만약 누군가 산에 올라 이 장면을 보았다면, 경외심을 품고 그들을 선장(仙長)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진공께서는 아직 바다를 본 적이 없으시죠?”
“예,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계연은 바다 위에서 들었던 괴이한 울음소리와 그 하늘가에 번졌던 붉은빛을 떠올렸다.
“세상을 돌아다닐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 세상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요. 언젠가 진공께서 정말로 계유신이 되신다면…….”
계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이 터서 별들은 모습을 감춘 상태였는데, 보이지만 않을 뿐 아직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진공께서 저 대신 이 세상에 끝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또 저 별과 하늘 너머에도 가 주세요.”
진자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반드시 알아보겠습니다…… 계 선생님,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계 선생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말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다. 진자주는 만나본 수행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무척 식견이 넓었다. 성황신을 비롯한 귀신들, 두 강의 강신들, 그리고 용왕까지 만났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기로는 계 선생님은 무척 도행이 높은 분이시니, 이런 말을 꺼낸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는 계연도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햇빛이 점점 강하게 비추자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곧 운산관 사제 두 명이 일어날 테니, 계연과 진자주도 산봉우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계연은 도관에 바로 내려서지 않고, 상공에서 모습을 감춘 채 도관 어느 곳을 관찰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담비 두 마리가 운산관 밖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주방 바깥에 쌓아둔 장작더미를 밟고서 도관의 담장에 오른 뒤, 담장을 따라 대전(大殿) 뒤편까지 뛰어갔다. 그러고는 구석진 곳으로 뛰어내려 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청송 도인과 제문이 양생권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담비 두 마리는 대전 뒤편에 숨어 몰래 그들을 관찰했다.
진자주가 웃으며 그쪽을 가리킨 후 계연에게 말했다.
“매일 이 시간에 옵니다. 때로 주방에 선물도 갖다 놓지요.”
“그래요? 무슨 선물인데요?”
계연이 호기심 섞인 얼굴로 물었다.
“하하, 사냥한 뱀이나 계곡에서 잡은 작은 생선, 민물 게 또는 들쥐나 개구리 등등 다양합니다. 곤충 같은 건 거의 매일 있고요, 가끔 열매도 가져옵니다.”
“하하하……. 좋은 선물을 받으셨네요!”
계연은 담비들이 무척 귀엽게 느껴져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주방 청소를 책임지는 제문은 저 ‘선물’을 받고서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도사가 양생권 수련을 마치자, 계연과 진자주가 도관 밖에서 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본 두 도인은 무척 기뻐하며, 푸짐한 점심상을 대접하겠다며 큰소리쳤다.
하지만 계연이 점괘를 보러 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식자재를 사러 가는 일은 오직 제문의 책임이 되었다. 청송 도인은 벌써 모든 신경이 점을 치는 일에 쏠려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는 운산관 대전 앞에 접이식 의자를 몇 개 갖다 놓았다. 제선, 계연, 진자주 세 사람이 이 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계연은 노랗게 빛바랜 오래된 두루마리를 청송 도인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 계 선생님, 이 종이로 어찌 점을 치면 되겠습니까?”
청송 도인은 수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종이를 만지는 것만으로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다. 계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후 이렇게 말했다.
“이 종이를 집이라고 생각하고, 집주인의 상황을 알아봐 주세요.”
“집이라고요?”
제선은 멍하니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두어 번 흔들며 물었다.
“종이에 사는 건 그림이나 글자가 아닙니까?”
“예, 글자를 찾는 거예요. 글자를 집주인으로, 이 종이를 집으로 생각해 주세요. 이 두루마리가 만들어진 게 수십 년 전인데, 그걸 집주인의 사주팔자라고 치고…….”
계연은 좌리가 이 <검의첩>을 완성한 때를 알려주고, ‘집주인이 집을 떠난 날’도 알려주었다.
멍하니 계연의 말을 듣던 청송 도인의 얼굴에 점차 흥분한 기색이 어렸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상대방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계 선생님이라면 말이 달랐다.
계연은 이 <검의첩>에 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알려준 다음, 청송 도인을 향해 물었다.
“어떠세요, 점을 볼 수 있을까요?”
청송 도인은 진자주와 계연을 번갈아 바라본 후 결심이 선 얼굴로 말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청송 도인은 돌연 무언가 생각난 듯 이렇게 질문했다.
“계 선생님, 이 점괘를 쳤다가 무슨 사달이 나진 않겠죠? 저는 일개 범인인데, 선생께서 제게 부탁할 정도의 일이라면…….”
“하하……. 청송 도장께서도 알고 보니 겁이 있긴 하셨군요.”
계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설령 도인께서 정말로 어느 선인이나 고인에 관련된 일을 점친다고 해도, 그 점을 친 것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천기(天機)에 관련된 일을 점쳤는데 그걸 경솔하게 입 밖에 낸다거나, 신통력이 대단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도장을 겨냥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 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오늘 이 일은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아, 아, 그렇군요.”
제선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에 조심스럽게 한 마디 물었다.
“이 일은 계 선생님께서도 정말 아무런 단서가 없으십니까?”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산관은 영안현을 제외하면 그가 가장 편안하게 여기는 장소였다. 게다가 함께 있는 이들도 모두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아무런 부담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저도 모든 일에 뛰어난 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갖고 있듯이, 점괘와 역술은 청송 도장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선인(仙人)이라고 불리는 이들조차 도장보다는 못할 거예요.”
그러자 진자주가 웃으며 옆에서 거들었다.
“계 선생님께 이런 과찬을 받을 정도라니, 제 도장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