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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383화 (383/892)

383화. 요란법석

강변을 따라 걷던 토지신은 강물 안에 먹물이 섞여 흘러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기다란 지팡이로 강물을 콕 찍었다. 그러자 강물이 지팡이 끝에 고였고, 그는 그것을 손안으로 쏟아내어 킁킁 냄새를 맡은 뒤, 심지어 입에 넣어 맛을 보기도 했다.

“아닌데, 냄새가 없어. 여기가 아닌가? 내가 또 잘못 찾은 건가?”

토지신은 손안에 담긴 물을 강물에 뿌린 후,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강 상류를 향해 걸어갔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에 계연도 곧 호기심이 생겼다. 만약 저자가 찾는 목표가 자신과 같다면, 자신도 굳이 서둘러 그 글자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이에 계연은 토지신이 무얼 저리 찾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이 토지신은 몸이 왜소했지만 동작은 재빨랐다. 지맥(地脈)과 연결되어 있다는 토지신이니, 자신이 관할하는 땅 위에서는 속도가 빠른 것이 당연했다.

때때로 그는 땅 안으로 사라지기도 했는데, 그런 후에는 저 멀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만약 계연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그를 놓쳤을 것이다.

약 반 각(7~8분) 정도가 지난 후, 토지신은 주위를 크게 빙빙 돌면서 여러 군데를 살폈을 때쯤, 마침내 물가 근처에 지어진 커다란 공방이 나타났다.

계연이 근처에 다가가자 공기 중에 감도는 묵향(墨香)이 더욱 진해졌다. 공방 옆으로 흐르는 강물에는 때때로 거뭇한 무언가가 섞여 내려왔다. 보아하니 이곳이 ‘원묵(源墨)’을 생산하는 공방인 듯했다.

원묵은 연량국 묵원현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상품으로, 대정국에서는 엄청난 고가에 팔리고 있었다. 문인과 풍류 인사들은 모두 이 먹을 갖고 싶어 했는데,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정국과 연량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이를 높고 험준한 연추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연추산에는 독충과 맹수가 많이 살고 있어, 길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많이 돌아가더라도 조월국의 길을 빌려 연량국으로 향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했다.

대정국과 연량국의 외교 관계는 친화적인 편이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통상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원묵을 하나 구하기도 힘들 지경이 된 것이다. 상등품의 원묵 하나는 같은 중량의 백은(白銀)과 값어치가 비슷할 정도이니, 문인들에게는 엄청난 사치품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대정국 영안현에서 생산된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조 제품들도 다른 나라에서는 무척 값비싼 것들이었다. 게다가 오래되었을수록 더욱 그 값어치가 올라갔다.

계연이 가진 황화목(黃花木)으로 만들어진 붓꽂이도 영안현의 장인이 직접 만든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2백 문(文) 정도의 가격에 구매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연량국이나 천보국 등지에서 판다면 무척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묵의 생산지를 보자마자 처음으로 계연의 뇌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붓으로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계연은 당연히 원묵이 갖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이왕 묵원현에 왔으니, 원묵 몇 개 정도 사서 써 봐야지.’

영안현에서 만든 책상머리에 놓는 여러 문구(文具)처럼, 묵원현의 원묵 또한 세심한 정성을 쏟아 만든 물건이었다. 그중에서도 상등품에는 제작한 사람의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기운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그 가치를 아는 계연이 원묵을 쓰게 된다면, 그 안에 깃든 특수한 현묘함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공방에서 끊이지 않고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한창 바쁘게 먹을 제작하는 중인 것 같았다. 토지신은 공방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걸음을 늦췄다.

공방은 대략 십여 개가 넘는 건물로 이루어졌고, 앞뒤로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원료를 옮기는 이들과 공구를 손에 든 이들이 바쁘게 그곳을 오갔다.

토지신은 사람이 복작복작한 곳에는 가지 않고 그 주위를 천천히 돌다가, 거대한 건물 바깥에 섰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그곳을 오래 관찰했다.

“하하, 오늘은 조금 진전이 있겠군.”

그는 손을 들어 문 위에 남은 먹 자국을 쓱 훑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은 뒤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계연은 이미 근처에 와 있었으나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뛰어난 청력으로 토지신이 멈춘 거대한 건물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안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건물이 여기 말고도 몇 곳 더 있었다.

이 건물은 지붕이 무척 두꺼웠는데, 건물 외벽도 나무판자나 멍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심지어 대문 앞에는 낡은 면 이불 두 채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건물을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토지신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핀 뒤, 지팡이를 땅에 대고 두어 번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푸른 연기로 변하더니 땅 밑으로 사라졌다. 계연은 그가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계연도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단 몇 걸음 만에 공방 근처로 다가와 건물 바깥에 섰다. 그러나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법안을 활짝 뜬 다음에 가만히 서서 그 안의 기척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이 채 무언가를 듣기도 전에, 일꾼 두 명이 위에 천이 덮인 나무 상자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 상자 안에서 은은한 묵향이 나는 걸 보니 막 완성된 좋은 품질의 원묵인 것 같았다.

“자네가 가서 문을 열게, 내가 들 테니.”

“응!”

일꾼 하나가 이쪽으로 뛰어오더니, 문을 막고 있는 면 이불을 걷어낸 후 자물쇠를 열었다. 그러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대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부터 더욱 진한 묵향이 뿜어져 나왔다.

“자자, 빨리 말려야 해. 갑(甲) 등급 선반에 놓으면 돼.”

건물 안은 문가에서 비쳐 들어오는 빛 말고는 창호지를 바른 작은 창문 두 개에서 들어오는 빛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꾼 두 사람은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실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무 상자 안에 있던 낱개로 잘린 먹들을 꺼내 선반 위에 늘어놓았다. 계연이 보아하니 이 건물은 전문적으로 먹을 말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인 듯했다.

원묵은 모양을 잡아 잘라낸 후 건조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만 온도에 무척 민감했기 때문에, 직사광선 아래에서 말릴 수는 없었다. 좋은 재료를 쓰는 것 외에도, 원묵이 완성되는 데에는 이처럼 세심한 공정이 요구되었다.

“어? 왜 이렇게 많이 줄었지?”

“그러게! 여기 갑 등급 선반에는 최소 이백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태반이 사라졌군! 주인님께서 사람을 보내 따로 가져가셨나?”

그들은 경황없는 얼굴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라면 주인이 노발대발할 것이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게다가 여기에 둔 먹은 아직 다 마르지도 않은 거였는데. 말린 후에도 가장자리를 다듬고, 물에 씻은 다음 금으로 세공도 해야 하잖아!”

“이런, 혹시 현성에서 최근 먹 공방들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 못 들었어? 상등품의 먹만 훔쳐 가는 도둑이래. 우리도 도둑맞은 게 아닐까?”

“헉! 그런가……? 하지만…… 우리가 반 시진 전에 왔을 때는 그대로였잖아. 공방에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누가 들어오는 건 보지 못했어. 게다가 우리는 특별히 강호의 고수를 고용해서 지키고 있기도 하고…….”

“이 일은 어찌 됐든 알려야 해. 어서 가세!”

“그래, 그래…….”

두 일꾼은 불안해하는 얼굴로 다급히 건물을 나가 공방 앞쪽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떠나자 토지신의 모습이 다시 바닥에서부터 연기처럼 솟구쳐 올랐다.

토지신은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서 실내 곳곳을 살폈다.

“흥! 머리에 털도 안 난 도둑놈들이 여기 숨어 있구나. 너희 정괴들이 한 짓인 걸 내 이미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모습을 드러내면 특별히 가볍게 처분해 주마!”

토지신이 이렇게 소리친 후에도 실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토지신은 차갑게 웃으며 지팡이를 땅 위에 가볍게 두드렸다.

쿵……

그 소리와 함께 실내로 은은한 노란빛이 퍼져나갔다.

바깥에 서 있던 계연은 건물 전체가 ‘두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법안을 통해 살펴보니 건물이 빛으로 한 겹 뒤덮여 지면처럼 견고하게 변한 것이다.

토지신은 조금 전에 왔다 갔던 두 일꾼의 대화에서 분명히 이 건물 안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확신한 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네 이 도둑놈들! 이래도 안 나오면 여기를 전부 불살라 버리겠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겠느냐?”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많은 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구석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와중에 뾰족하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토지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감히 그렇게 하기만 해봐! 우리 어르신께서 아시면 네 놈을 죽인 다음 혼백조차 남겨두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죽일 놈의 늙은이! 기껏해야 보잘것없은 토지신인 주제에. 우린, 우린 네놈이 무섭지 않아!”

“맞아, 안 무서워!”

“안 무서워, 안 무서워!”

“맞아, 겁 안나!”

“어서 우릴 내보내 줘!”

“우릴 내보내 주면 어르신에게 특별히 이 일을 고하지 않겠다!”

“그런데 어르신은 어디 계시지?”

“북쪽으로 가셨어!”

“아냐, 서쪽으로 가셨어!”

“아냐! 북쪽이야!”

삽시간에 실내가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해졌다.

토지신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괴이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했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어르신이 누군지 모른다. 게다가 진짜로 너희에게는 내가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불은 다를걸! 순순히 나오지 않으면 모두 불살라 주겠다!”

토지신이 코웃음 치며 대답한 후 지팡이를 다시 한번 땅에 대고는 쿵쿵 두드렸다. 그러자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우르릉 진동했고, 선반 위에 있는 먹들이 하나씩 지면으로 떨어져 모습을 감췄다.

토지신은 이 건물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저 원묵이었다. 이 건물을 불살라도 원묵만 멀쩡하면 이 공방의 주인에게는 큰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래도 안 나오면 정말로 불을 붙이겠다.”

토지신의 지팡이 위에 불씨가 피어오르자, 소란스럽던 실내가 단번에 고요해졌다. 그러다 그들은 전보다 더욱 시끄럽게 저들끼리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비록 토지신의 술법으로 한 겹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계연은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저 시끌벅적한 소리를 말이다.

‘저 어르신이 설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계연은 괴이쩍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검의첩>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8, 90년 전에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당시 대정국을 비롯한 주위 각국이 공인하는 천하제일 고수였던 좌리의 검의(劍意)와 그의 정신이 녹아 있었다. 그러니 <검의첩>은 사실상 이미 만들어지던 순간부터 속세의 범위를 초월한 글이었던 것이다.

<검의첩>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당연히 이 글을 직접 쓴 좌리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계연이었다. 그 사이에도 물론 여러 사람의 손을 탔겠지만, 계연은 그간 <검의첩>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다고 느꼈다.

<검의첩> 위에 있던 글자들이 모두 정괴(精怪)가 되어 저렇게 ‘어르신’을 부르짖고 있다면, 그건 좌리 혹은 계연 자신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좌리는 죽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어가는 사람이었다. 그 당시의 <검의첩>은 비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글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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