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각기 다른 점을 가진 글자들
비록 이 글자들이 십여 년 전부터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나, 실은 이 글이 쓰이던 순간부터 그들은 좌리의 뜻과 정신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 후 근 백 년 동안 그들이 보고 들었던 일들은 흐릿하고 몽롱한 상태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는 무척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글자들은 종이학이나 호운에 비해 적지 않은 일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천히 학습해 나가야 하는 다른 정괴나 요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기초가 충분치 않아 그들 스스로는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단순했고, 문자라는 특성 때문인지 하소연하려는 욕구가 무척 강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하소연이라는 말은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말싸움을 하는 것도 꽤 즐거워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의첩> 위의 작은 글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어떤 상황의 전후 관계나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무척 정신력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의 ‘어르신’인 계연은 글자들 사이에서 무척 위엄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글자들끼리 말도 못 하게 싸워대더라도 계연의 한마디면 모든 글자가 복종했다.
때로 한 글자가 사소한 말실수를 하거나 다툼을 일으킬 만한 소재를 꺼내면, <검의첩> 전체가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계연은 무슨 일에 관해 물을 때도 글자 하나에만 물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 작은 글자들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고, 모두 자기들의 말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자주 말싸움을 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항상 단체로 행동하는데, 그 와중에 어떤 글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글자 각각의 기억들은 믿을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이 글자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것(그들에게 있어서는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었다)을 무척 즐겨 했다. 그들은 비록 자주 말다툼을 해대지만, 단결해야 할 순간에는 서로 뭉쳤다. 그들이 함께 길을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 모여 <검의첩>을 완성해서 그런지, 글자들 사이에는 가족 같은 끈끈한 정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계연이 글자들이 집을 떠났던 모든 과정에 대해 듣고 난 후에는 이미 2시진(4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 글자들은 어떻게 <검의첩>을 떠났는지, 또 어떻게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피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은 두렵고 상심한 가운데 계연을 찾아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갔다가 헤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2만 리는 떨어진 묵원현에 도착한 순간, ‘천당’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글자들은 그렇게 묵원현에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럼, 일반적인 요물이나 귀신들은 너희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구나? 네가 대답해라. 다른 애들은 말하면 안 된다!”
계연은 태양혈을 문지르며 그중 한 글자를 짚었다. 글자들의 소란을 막기 위해서는 항상 이렇게 단독 발언권을 강조해 줘야 했다.
계연에게 지목당한 ‘예(銳)’ 자는 마치 사방을 둘러보는 것처럼 좌우로 몸을 움직였다가 계연을 바라보았다.
“어르신께 아룁니다. 다른 요괴에게 있어 그게 어려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가 숨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르신 말고는 누구도 찾지 못했거든요. 한번은 크게 말싸움을 하다가 한 요괴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숨으니까 그놈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놈이 거기서 2주 동안 배회하는 바람에, 우리도 거기에서 2주 동안 말 한마디 못 했었죠. 정말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검의첩> 위의 많은 글자가 이 화제에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두 이 화제에 대해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계연이 눈을 부릅뜨자 다시 얌전히 종이 위로 돌아갔다.
“그래서 처음에 그 요괴가 너희들을 보았느냐? 네가 계속 말하렴. 다른 글자들은 말하면 안 된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모두가 빨리 도망치라고 소리쳐서 저도 따라서 도망치느라…….”
“후우…….”
계연은 깊이 심호흡한 다음, 다른 글자들을 향해 물었다.
“누구 아는 글자?”
그의 물음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
“저요! 저요!”
“제가 알아요!”
“어르신, 저도 알아요!”
“쟤네 다 몰라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거짓말하지 마. 내가 너보다 잘 알아!”
“헛소리하긴. 이 중에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잖아!”
“아야야…….”
말다툼이 벌어진 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조용! 네가 나서서 말해봐라.”
계연이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다’는 글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자 다른 글자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그리고 계연의 지목을 받은 ‘심(心)’ 자는 무척 득의양양하게 종이에서 일어났다.
이제 글자 위의 먹물이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계연은 그게 한껏 뽐내는 거라는 걸 알았다.
“어르신께 아룁니다. 저는 그때 사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요괴의 생김새를 또렷하게 보았어요. 그건 코가 엄청나게 큰 개였는데, 대신 꼭 사람처럼 일어서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어요. 게다가 그때 그 요괴는 저희가 숨은 황야에서 2주 동안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니라, 교활하게도 잠시 떠나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것이었어요!”
“뭐?”
계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그 개는 이 글자들이 숨어 있는 것이지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알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이 글자들이 위험하지도 않고 비범한 정괴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니, 감각이 무척 예민한 요괴인 것 같았다.
물론 글자가 정괴가 된 것은 그 자체로 무척 비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연이 지금 알고 싶어 하는 비범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글자들은 함께 <검의첩>을 이루지만, 동시에 각각의 글자가 모두 특색이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때 저와 각(覺), 영(靈)은 모두 그 요괴가 정말로 떠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모두 움직이지 말고 숨어 있으라 했어요. 그러자 근처에 숨어 있던 요괴는 결국 우리를 찾지 못하고 한껏 화를 낸 뒤 가버렸죠!”
“음, 정말 잘했구나!”
계연이 웃으며 칭찬하자 ‘심’ 자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이 글자들은 각각 서로 다른 영험함과 정수(精髓)를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심’ 자는 다른 글자들보다 좀 더 총명했고, ‘영’과 ‘각’은 감각이 좀 더 예민했다. ‘검(劍)’과 ‘예(銳)’는 더욱 용감하고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정괴(精怪)들은, 특히나 문자에서 비롯된 이 생명들은 누군가 그들을 정말로 삼켜 버린다면 그들 스스로도 신묘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잘 들으렴. 다음부터는 아무렇게나 뛰쳐나가면 안 된다. 알았니?”
“네!”
“알겠어요!”
“어르신, 우리를 데려가 주세요!”
“연비한테 주지 마세요!”
“맞아요!”
“그럼 또 도망치면 되지!”
“맞아!”
“어르신이 도망치지 말라고 하면?”
“어, 그럼 어쩌지?”
계연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톡톡 치자, 소란스럽던 글자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연비도 이 <검의첩>을 충분히 오래 읽었고, 내가 그 진의(眞意)를 전해주기도 했으니 이제 다시 읽을 필요는 없을 거야. 앞으로는 나와 같이 지내면 된다.”
글자들이 막 환호하려던 순간, 계연의 귀에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글자들에게 막 경고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조용해진 상태였다.
계연은 <검의첩> 위에 글자들이 얌전히 자리한 걸 보고서는 웃으며 다시 검의첩을 소매 안으로 갈무리했다.
잠시 후,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계 선생님,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제가 여기로 음식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같이 식당에 가셔서 드시겠습니까?”
계연은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식당에 가서 먹을게요.”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종이학은 이미 계연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간 후였다.
계연이 나온 걸 보고 묘지기는 그에게 다시 예를 올렸다.
“그럼 저와 같이 가시지요. 조금 전에 한 부호가 환원(*還愿: 신령에게 기도하던 일이 이루어진 후 감사를 표하는 행위)을 드리러 와서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앉아야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객(客)은 주인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법이니, 당연히 개의치 않습니다. 어서 가죠.”
“네,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묘지기는 계 선생이 별다른 이견을 내놓지 않자, 안심하며 그를 외원(外院)의 주방 쪽으로 모셨다.
* * *
이 토지신당은 크기가 꽤 컸고, 거대한 대전 안에 토지신의 신상이 놓인 것을 빼면 그 주위로 온통 장명등(*長明燈: 신상 주위에 계속 켜놓는 유등(油燈))이 걸려 있었다. 바로 이 근처 부호들이 값비싼 돈을 주고 걸어놓은 것이었다.
이 토지신당이 이토록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신당에 찾아와 기도를 올리는 것은 ‘영험함’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이곳 토지신이 마침 그런 신령이었던 것이다. 이에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토지신이 무척 소원을 잘 들어준다고 소문이 나, 이토록 향불이 꺼지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농향 토지신당의 주방은 앞뒤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뒤편은 음식을 조리하는 곳이었고 앞쪽은 사찰의 식당처럼 식탁과 의자가 놓여있는 공간이었다.
토지신당에는 묘지기와 묘공까지 해서 총 세 사람뿐이었으니, 이 식탁과 의자는 당연히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었다. 마을 부호들은 환원하러 오거나 토지신에게 기도를 드리러 오면, 화를 물리쳐주고 복을 가져다준다는 이 ‘공양밥’을 먹고 가곤 했다.
불교 사찰에서는 채식을 하지만,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에는 그런 규칙이 없었다. 가려야 하는 음식도 없고 술도 마실 수 있었지만, 대신 모든 음식을 토지신에게 먼저 바쳐야 했다. 그렇게 신령이 먹고 난 공양밥을 먹으면 재난을 피하게 해주고 액운을 쫓아내 준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때 식당 안에는 이미 열 명이 넘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묘공 두 명과 부호가 데리고 온 하인들이 음식과 그릇을 나르는 중이었다.
요즘은 날씨가 무척 더웠기 때문에, 음식들은 한동안 제사상 위에 놓여있었는데도 여전히 따뜻한 상태였다.
오늘 환원을 드리러 온 것은 한 먹 공방의 주인인 류 원외(*員外: 지방 유력자를 일컫는 존칭)였다. 그는 오늘 아침 꿈에서 토지신이 나타나 일전에 있었던 괴이한 일이 해결되었다는 답을 들은 것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환원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동그란 탁자 앞에 앉아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탁자는 총 두 개였는데, 하나는 류 원외와 그의 부인, 묘지기, 그리고 류씨 집안에서 체면이 좀 서는 하인 둘이 앉는 자리였고, 남은 하나는 그 외 류씨 집안의 하인들과 신당의 일꾼 두 사람을 위한 자리였다.
“정(鄭) 사부(師傅), 조 사부께서는 아직 안 오셨습니까?”
“어르신은 신당에 묵는 귀빈을 모시러 갔습니다. 아, 저기 보세요. 오시네요!”
묘공이 접시와 수저를 내려놓으며 류 원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묘지기가 계연을 모시고 입구로 들어왔다.
“계 선생님, 여기로 들어오십시오. 저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묘지기가 류 원외가 앉아 있던 자리를 손짓하며 가리켰다. 하인들이 앉은 탁자와는 달리, 그쪽에는 앉은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자리가 넉넉했다.
그렇게 말한 묘지기는 서둘러 류 원외와 류 부인에게 먼저 다가가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물었다.
“류 원외, 류 부인, 계 선생님은 저희 신당의 귀빈이신데, 두 분과 함께 자리해도 괜찮으시지요?”
“괜찮고 말고요.”
류 원외가 웃으며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류 원외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묘지기는 계연을 대신해 그릇과 수저를 앞에다 놓고 술잔까지 챙겨왔다. 그러고는 심지어 탁자 위에 작은 이물질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는 소매를 이용해 닦아내기까지 했다.
이 장면을 모두 보고 있던 류 원외는 자연스럽게 이 손님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예전에 지현(*知縣: 현(縣)을 다스리는 벼슬) 나리께서 왔을 때도 묘지기가 이렇게까지 정성을 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