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88화 (388/892)

388화. 아홉 번 글자를 덧쓰고 대량사에 방문하다

자리한 이들은 모두 마음껏 먹고 마셨고, 계연조차 자신이 이렇게까지 이 자리를 즐길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식사를 마친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 토지신이 커다란 상자를 하나 들고서 나타났다.

“계 선생님, 일단 송연묵 한 상자를 준비해 왔습니다. 이 안에는 총 163개의 표준 규격의 송연묵이 들어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묵원현에 있는 상등품의 먹을 준비하고 있으니, 일단 이것 먼저 받으시지요!”

그러자 계연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드립니다, 토지공.”

“아, 아닙니다. 선생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토지신은 그를 더 방해하지 않고 곧바로 지면 아래로 사라졌다.

계연은 이 정도면 이미 충분하다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만족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건넨 법전이면 좋은 품질의 먹을 훨씬 더 많이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자를 열어 그 안의 송연묵 하나를 꺼내어 보니, 표면에 금박을 바른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독특한 묵향(墨香)이 은은하게 퍼졌다. 글자들이 먹었던 먹보다 훨씬 더 좋은 품질의 먹이었다.

그는 <검의첩>을 꺼내 탁자 위에 펴놓고서, 조급해하는 글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물건 아낄 줄을 모르고 함부로 먹기만 하니, 배만 부르고 수행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지 않으냐!”

계연은 송연묵 상자를 소매 안으로 거둬들이고서, 딱 한 덩이만 남긴 뒤 벼루와 붓걸이, 늑대털로 만든 붓을 차례로 꺼냈다.

“모두 얌전히 있어야 한다. 내가 직접 먹물을 칠해줄 테니.”

그제야 글자들은 어르신께서 늑대 털로 된 붓에 먹물을 묻혀 자신들에게 발라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글자들이 흥분에 차서 떠들썩해지자, <검의첩>이 마치 바람을 맞은 것처럼 쉬지 않고 흔들렸다.

그는 벼루 위에 맑은 샘물 한 줄기를 끌어와 직접 먹을 갈기 시작했다.

좋은 먹은 그 향기와 모양도 뛰어나지만, 먹을 갈 때도 무척 부드럽고 세밀하게 갈렸다. 그렇게 해서 거의 순식간에 먹물이 완성되었다.

<검의첩> 위의 글자들은 대부분 몸을 일으켜 벼루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 가는 동안의 그 고요함이 계연의 마음을 더욱 평온하게 했다. 그의 이런 변화는 주위의 기운에도 영향을 미쳐, 조금 전까지 소란스러웠던 글자들조차 점차 입을 다물었다.

벼루 위에 만들어진 먹물은 균일한 검은 색을 띠며 은은한 묵향을 내뿜었고, 붓을 대면 아무런 걸림 없이 부드러웠다.

그가 붓을 손에 쥐고 소매를 걷어 붓끝에 먹물을 적시는 동안, <검의첩>은 이미 계연의 바로 앞까지 ‘미끄러지듯’ 이동한 상태였다.

이곳의 묘지기는 글 쓰는 걸 즐겨하는 이가 아닌 모양인지 방 안에는 서안(*書案: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용도의 탁자)이 아닌 자그마한 원형 탁자만 놓여있었다. 그러나 계연이 그 앞에 서자 어떤 탁자보다 더 운치 있어 보였다.

“검의첩이 만들어졌을 때는 좌리의 실력이 검선(劍仙)이라 불릴 만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런 좌리의 신의(神意)가 담긴 너희들은 날 때부터 비범한 존재였어. 그러나 좌리는 정말로 검선(劍仙)은 아니었기 때문에, 글자가 너무 무겁고 날카로움이 길며, 변화는 단순하고 의지만 넘치는 형태지…….”

계연은 붓끝을 <검의첩>에서 5촌(약 15cm) 정도 되는 높이에 멈추고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글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글자는 도(道)를 구현해내는 한 가지 방법이야. 웅건한 필획을 따라 먹물 안에 그 신의가 깃들지. 내 너희들을 위해 먹을 칠해줄 테니, 먹기만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신묘한 뜻을 찬찬히 탐구해보렴. 시간이 날 때마다 총 아홉 가지 글씨체로 먹물을 칠해주마. 만약 누군가 정신이 팔려 집중하지 못한다 해도, 한번 놓치면 다시 해주지 않을 거야. 알겠느냐?”

<검의첩> 위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했는데, 이는 계연의 말을 못 알아듣거나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못 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맨 첫 글자인 오(吾)자 위에 붓을 내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각종 병기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검을 특히나 좋아했다. 6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목검을 얻었는데…… (吾自幼酷愛兵刃, 尤其戀劍, 六歲得木劍……)》

<검의첩> 전체에 담긴 정서는 그의 생애에 따라 변화했다. 의기가 넘치던 젊은 시절부터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나이가 될 때까지, 강호에 이름을 날릴 때의 흥분과 더는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가 없어진 후의 고독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계연이 그 위에 덧쓸 때는 최대한 좌리의 감정을 배제하고, 글씨체 자체의 운치를 살리려 애썼다.

계연이 글을 다 썼을 때는 1시진(2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사실 순수하게 글만 쓴 시간은 반각(7~8분)이 채 되지 않았고, 주로 먹을 가는 데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한번 쓰는 데에 총 10개의 먹을 사용했고, 먹을 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법력과 현황의 기운을 밀어 넣어 심신의 소모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검의첩>은 글씨가 선명하고 생동감 있게 변하였다. 글자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하는 사람들처럼, 한 겹 빛에 뒤덮여 조용하게 자리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 먹물은 점점 말라갔지만, 그 위의 빛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날 때부터 영물로 태어난 글자들이구나!”

계연이 이렇게 감탄하자 글자들은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동시에 자신들의 신묘한 존재와 특수함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10개의 글자 중 중복되는 글자들은 설령 겉으로 똑같아 보일지라도, 그들이 품은 영성(靈性)은 비슷하면서 또 달랐다.

비록 많지 않은 글자들이었지만, 계연은 욕심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을 얻은 것만으로 무척 흡족해했다.

게다가 이 글자들은 비록 <검의첩>을 이루고 있었지만, 계연은 자신이 덧칠해주는 먹물로 서로 간의 연결을 끊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변화를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나중에는 글자끼리 따로 조합하여 무수한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붓걸이에 붓을 걸어놓은 후, 계연은 뻣뻣한 근육을 몇 번 움직이다가 탁자 곁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수행했다.

* * *

이농향 토지신당은 향불을 올리러 오는 이들이 꾸준히 있었지만, 계연은 그리 번잡하다고 느끼지 못했고 그렇게 총 3일을 내리 머무르게 되었다. 첫날은 글자들을 위해 먹물을 발라 주었고, 다른 이틀 동안은 묵원현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이왕 묵원현에 왔으니 제대로 구경도 안 하고 떠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연은 각종 먹을 만드는 대략적인 과정과, 먹을 생산하게 된 역사, 그리고 이 고장의 특이한 문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이농향 토지신은 몇 차례나 그를 방문하여 상등품의 먹을 안겨주고 갔다. 송연묵뿐만 아니라 칠연묵(漆烟墨), 유연묵(油烟墨) 등 종류가 다양했다.

셋째 날 밤, 묘지기와 묘공들이 모두 잠자리에 든 후, 누군가 가볍게 계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계연은 막 글을 써가며 <천지묘법> 안의 법결을 이리저리 연구해보던 중이었다.

“들어오세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계연은 대답한 후, 멈추지 않고 붓을 놀렸다.

토지신은 한 손에 자그마한 상자를 들고 있고서, 지팡이를 든 다른 한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계연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그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은 뒤, 탁자 앞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계 선생님. 소신(小神)이 대단한 먹을 손에 넣어 특별히 선생께 헌상하러 왔습니다!”

그간 토지신은 계연에게 적지 않은 상등품의 먹을 가져다주었는데도, 내심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의 양으로는 자신이 받은 법전만큼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그는 마음이 무척 흡족했다. 그가 든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법전의 가치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모든 먹 중에서는 제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십시오!”

토지신은 직접 상자를 열어 그 안을 보여주었다.

계연은 마침 추론에 실수가 생겨 순조로운 기세가 꺾였던 참이라, 아예 붓을 내려놓고 토지신이 내민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금빛 선으로 무늬를 새긴 십여 개의 먹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하하하, 계 선생께서도 이건 모르실 겁니다. 이건 무척 진귀한 금향묵(金香墨)이라는 건데, 시장에 정기적으로 유통되는 게 아닙니다. 돈이 있고 권세가 있는 자라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먹이지요. 이 먹은 알고 있는 이들이 드뭅니다!”

“이게 바로 금향묵이군요!”

그는 이틀간 묵원현을 구경하면서, 먹을 제작하는 한 나이 든 장인에게서 금향묵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듣기로 이 먹은 대장장이가 보검(寶劍)을 빚어내는 수준으로 만들기가 무척 까다롭고 공정도 복잡하다고 했다. 먹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다른 먹처럼 덩어리째 반죽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얇게 층층이 쌓아 올린 다음 금가루를 써서 매미 날개처럼 얇은 금빛 무늬를 형성하도록 한다.

“은은한 향기가 나고, 연고처럼 부드러우며, 붓에 닿으면 착 달라붙고, 종이에 떨어지면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지요!”

계연이 금향묵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자, 토지신은 당연히 무척 기뻐했다.

“과연 계 선생님이시군요.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이게 바로 장인이 만든 금향묵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예, 당연히 마음이 들지요. 저를 위해 금향묵을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계연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나중에 <검의첩>의 글자들에게 아홉 번째 글을 써줄 때 쓰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귀중한 것을 얻었으니 계연도 토지신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뜻을 전달했고, 동시에 자신은 곧 떠날 것이라 알려 주었다.

그러자 토지신은 한숨을 내려놓으면서도 약간 실의에 빠졌다.

이렇게 신묘한 수선자가 토지신당에 계속 머문다면 언젠가 자신도 기연(機緣)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이번에 이렇게 만난 것만 해도 이미 대단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토지신이 떠난 뒤, 계연은 자신이 가진 먹을 전부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큰 상자 네 개와 금향묵이 든 작은 상자 하나였다.

이 먹들은 전부 극상품들로, 나이 든 장인들이 시간과 정력과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들이었다. 특히 금향묵은 먹 하나하나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유일무이한 먹이라고도 불릴 만했다. 그건 이 많은 원묵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계연은 그런 먹들이 상자에 가득 찬 것을 흡족한 얼굴로 감상했다. 보기만 해도 자신이 대단히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 * *

다음 날 계연은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후, 묘지기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계연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묘지기는 딱히 마음이 놓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처음에야 물론 귀빈을 모시느라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접대했었지만, 계 선생님은 시종일관 태양처럼 온화한 분이었다. 박식한 동시에 우스갯소리 하는 것도 좋아하여, 함께 있으면 무척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비록 짧다면 짧은 3일이었지만, 계 선생님이 떠나니 묘지기와 두 묘공은 조금 마음이 헛헛해졌다. 이에 그들은 계연에게 만약 나중에 다시 이 근방을 지나게 된다면, 꼭 이곳에 와서 묵고 가라고 당부했다.

그날 오후, 묘지기는 낮잠을 자다가 토지신에게 듬뿍 칭찬을 받았다.

그때 계연은 당연히 대량사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혜동대사를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전에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흥미로운 이야기 때문에 계연은 그가 정말로 난처한 상황에 놓였는지 꼭 보고 싶었다.

다른 방면에 큰 지장이 없는 상황이라지만, 계연은 사실 꽤 지독한 악취미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선유대회까지는 아직도 몇 년이나 남았으니, 대량사를 들렀다가 옥회산에 가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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