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큰 규모의 사찰
계연은 비겁술을 써서 길을 서두르지 않고, 그저 천천히 유유자적 걸었다.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걷자, 2주 후 연량국 북쪽 국경에 있는 동추부(同秋府)에 이르렀다. 대량사가 자리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류 원외의 말대로 연량국은 조월국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지만, 대정국보다는 못했다. 계연이 걸어오면서 보니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그저 배곯지 않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도였다. 다만 충분히 비축해둔 것이 없어, 무슨 천재지변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백성들의 생활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동추부는 연량국 도성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부유한 지방이었다. 확실히 동추부에 가까이 갈수록 백성들의 웃음이 더욱 많이 보였다.
9월 말, 계연은 불공을 드리러 가는 참배객 일행에 섞여 대량사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이 길에는 청석(*靑石: 푸른 빛을 띤 응회암으로, 건물의 외부 장식에 씀)이 깔려 있었고, 길은 마차 네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길에는 행인과 마차 말고도 수레에 향이나 촛불을 싣고 파는 사람, 탕후루가 잔뜩 꽂힌 나무통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는 행상인들이 섞여 무척 떠들썩했다.
계연은 참배객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었는데, 마침내 곳곳에서 혜동대사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모두 젊은 규수들인 것 같았다.
댕- 댕- 댕-!
대량사의 종소리가 멀리 퍼져나가며, 웅장한 사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계연은 적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원을 보아왔다. 하지만 규모만 놓고 보면 눈앞의 대량사와 비할 만한 곳은 없었다.
계연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 대량사의 건물들은 좌우로 길게 늘어선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중 높이 솟은 것은 분명 불탑(佛塔) 비슷한 건축물일 것이다.
댕- 댕- 댕-!
종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교 사원의 정취만이 가득히 느껴지겠지만, 계연에게는 종소리와 함께 경전 외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계연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자, 그 불음(佛音)이 심지어 주위 참배객들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였다.
“오호, 대량사는 과연 명불허전이 아니었구나. 비록 명왕(明王)의 화신(*化身: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혜동 같은 고승이 수행하는 사찰이니만큼 비범한 데가 있군!”
이 번잡한 거리에서도 계연의 찬탄을 들은 청력이 뛰어난 한 중년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의 말이 맞습니다. 대량사는 2백 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古刹)로, 우리 연량국에서 제일로 손꼽히는 사찰이지요. 이곳에 몸담은 혜동 대사께서도 이름난 고승이시고요. 그리고 지금은 대량사의 얼굴이나 다름없지요!”
계연은 이때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걷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흰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며 그의 모습을 더욱 초연해 보이도록 했다. 그는 빈곤한 사정의 서생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관직에 몸담은 기세등등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비범한 외양의 계연에게는 진작부터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고 있었다. 눈치가 좀 있다 하는 이들은 계연이 대단한 내력을 가진 풍류객이라 여기고는, 그가 불쾌해할까 봐 몇 번 쳐다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고 있었다.
반면 그에게 말을 건 남자는 계연에게 가까이 서 있던 참이었다. 계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남자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에게 살짝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해 보였다.
“선생의 발음을 들으니 남산부(南山府) 부근에서 오신 모양이지요?”
연량국의 표준어는 남산부의 발음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남산부는 바로 연추산 부근에 있는 곳으로, 연량국에서는 이곳의 발음이 가장 정확하며 표준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그곳의 발음을 공부하려 애썼지만, 연량국은 지방 곳곳의 사투리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진짜 남산부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계연처럼 표준적인 발음을 내지는 못했다.
남자는 품이 넉넉한 장포를 입고 있었지만, 걸음마다 힘이 있고 팔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관이거나 무공 고수인 것 같았다.
계연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에게 살짝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한 뒤,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저는 남산부 사람도 아니고, 연량국 사람도 아니에요. 저는 대정에서 왔거든요. 대량사의 명성을 듣고 오늘에서야 처음 방문한 거예요.”
남자는 계연이 대정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는 계연의 행색을 살피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확실히 그에게 다른 일행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아, 대정국에서 오신 풍류객이시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철풍(鐵風)이라 하고, 금은동철(金銀銅鐵)할 때 철, 광풍이 몰아친다의 풍입니다. 연량국 도성에서 왔습니다!”
“저는 계연이라 합니다. 계책이 떠오르다(計上心頭)의 계, 인연이 있다의 연입니다.”
계연도 그에게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후 다시 전방의 대량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백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많은 장사꾼이 천막을 치거나 자리를 깔아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철풍은 대정국처럼 먼 곳에서 온 계연에게 무척 호기심을 느낀 듯,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사찰로 동행했다.
두 사람 모두 분별 있는 성격이었으므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표면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고 서로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자신이 온 곳의 특색과 풍습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철풍은 계연을 위해 대량사에 세워진 여러 불탑에 얽힌 이야기나, 사찰에 어떤 유명한 고승들이 있는지, 또 몇 시에 어느 고승이 경전을 설법할 예정인지 등등을 설명해주었다.
사찰 앞에 열린 장터를 지날 때, 철풍은 향 한 묶음을 샀다. 그러나 계연은 향도 양초도 사지 않았고, 이를 본 철풍은 그가 귀신이나 신선을 믿지 않는 문인(文人)일 것이라 짐작했다.
시장의 떠들썩하고 번잡한 분위기와 달리, 사찰 내부에는 참배객이 많기는 했지만 질서정연하고 조용했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사찰 곳곳에는 승려들이 서서 길을 묻는 이들에게 방향을 알려 주고 질문에 답해주었다.
길을 잃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는 사람, 뒷간을 찾는 사람, 무슨 전(殿)이 어디 있느냐 혹은 무슨 승려를 만나고 싶다는 사람까지 승려들은 나서서 도움을 베풀었다.
그 질서정연한 모습만 봐도 대량사가 얼마나 크고 붐비는지 알 수 있었다.
“하하, 어떻습니까? 정말 대단한 곳이죠? 대정국에는 이와 비슷한 유명한 사찰이 있습니까?”
사찰에 들어온 후 철풍은 계연이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보고 약간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하하, 대정국에는 이처럼 큰 규모의 사찰은 없어요. 아마 규모로만 치면, 연량국은 물론 조월국, 대정국까지 아울러도 대량사가 가장 클 거예요.”
“예? 선생께서는 조월국에도 가보셨습니까?”
철풍은 더욱 계연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지나다가 잠시 들린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예, 가봤지요. 조월국은 소수의 지방을 제외하면, 백성들이 살기가 무척 고되더군요.”
계연은 번화한 이곳과 조월국의 상황을 비교해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참배객들을 따라 사찰 안의 명왕전(明王殿) 앞에 이르렀다. 철풍은 안으로 들어가 향을 올리려다가, 계연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계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계연이 그를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대답했다.
“철 형제께서는 괘념치 마시고 향을 올리세요. 저는 대량사에 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을 만나러 갈 예정이라, 여기서 서로 헤어지는 게 좋겠군요.”
“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입니까? 저는 선생을 저희 철씨 집안의 별원에 초대하려고 했는데요…….”
철풍은 계연이 학식이 깊고 재능이 많은 풍류 인사라는 걸 느끼고서 진작부터 그를 모시고 가려고 다짐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아,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일단 함께 명왕께 절을 올린 뒤, 선생의 옛 지인을 만나러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만약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아무래도 조금 불편할 것 같네요. 명왕께 절을 올리는 건…….”
계연은 장엄한 명왕대전 안에서 불교의 수인(*手印: 불ㆍ보살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 거대한 명왕상을 바라보았다.
“하하, 그것도 사양하겠습니다!”
계연은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한 후 철풍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후 몸을 돌려 확신에 찬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풍은 대전 앞 계단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명왕전으로 들어갔다. 계 선생이 직접적으로 불편하다고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철풍과의 대화에서 계연은 이미 대량사의 고승들이 주로 내원(內院)에서 수행한다는 것을 알게 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망설임 없이 내원으로 향했다.
계연은 여러 건물을 지나 쭉 북쪽을 따라 걸었다. 마침내 아치문이 달린 담벼락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대체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참배객들은 모두 사찰 밖에 마차를 세우고 걸어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이 마차의 주인은 사찰 깊은 곳까지 마차를 타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계연은 굳이 궁금해하지 않고, 곧바로 담장에 나 있는 문으로 향했다. 문 위에는 ‘참배객 출입 금지’라는 명패가 달려있었고, 체격이 큰 승려 둘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계연이 다가가자 그중 한 승려가 손을 뻗어 그를 막아 세웠다.
“선재 대명왕불. 시주, 이곳은 저희 사찰의 후원 구역으로, 승려들이 수행하는 곳입니다. 참배객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참배객이 아니라, 이곳에 만날 사람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혜동대사께 계연이라는 사람이 왔다고 전해주세요. 만나려 할 거예요.”
비록 철풍도 조금 전에 혜동대사는 대량사에 없을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을 믿기에는 혜동대사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계연은 자신의 바둑돌과의 감응으로, 그가 이 안에 있다는 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어, 시주, 혜동 사숙(師叔)께서는 이곳에 안 계십니다만…….”
“스님, 출가하신 분이 어찌 함부로 거짓말을 하십니까? 대사께 전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계연은 담담한 태도로 물러나지 않고 서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맑은 기운이 더욱 그의 말에 신뢰감을 주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다른 승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지금 바로 가서 말씀드려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숙께서 혹 청을 거절하시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계연이 이렇게 대답하자 조금 전의 그 승려가 안쪽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