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때맞춰 잘 오셨구나!
대량사 내원에 있는 한 승당(*僧堂: 승려가 좌선하며 거처하는 공간)에서는, 혜동대사가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방석 위에 앉아 염불을 외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작은 소반 위에는 단향이 꽂힌 작은 향로와 잘린 과일, 각종 다과,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머리에 화려한 장신구를 꽂고 살구색 옷을 입은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다리를 받치고서 혜동대사가 불경 외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
“혜동대사, 이 불인경(佛印經)은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여인이 이렇게 말하자, 혜동대사는 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처음부터 불경을 외기 시작했다.
그때 승당 밖에서 한 승려가 다급히 뛰어왔다. 하지만 그는 혜동대사의 승당에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한 여관(女官)이 뻗은 손에 가로막혔다.
“멈추시오, 이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기야말로 대량사의 승려인데 외부 사람이 자신을 멈춰 세우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승려는 이 여관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사실대로 말했다.
“시주, 밖에 혜동 사숙을 찾는 분이 와 계십니다. 안에 알려야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제가 대신 가서 전하겠습니다!”
“그 시주의 성함은 계연이라 하고, 사숙께서 그분의 이름을 들으면 만나려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관은 ‘계연’하고 한 번 읊조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무슨 계에 무슨 연 자입니까?”
“아, 그, 그건 소승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 처리를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아뢰고 오겠습니다.”
“예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관이 고개를 끄덕인 후 곧바로 승당의 입구에 가서 섰다.
똑똑똑-!
“무슨 일이냐?”
“마마, 한 승려가 와서 아뢰기를, 밖에 혜동대사를 찾아온 이가 있다고 합니다. 이름은 계연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불경을 외던 혜동대사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계 선생님이 오셨다고?”
그의 목소리에는 의혹이 어려 있었지만, 그는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선생께서 정말 때맞춰 잘 오셨군!’
이왕 좋은 기회가 왔으니 반드시 잡아야 했다. 혜동대사는 눈앞의 여인을 향해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장공주마마, 소승의 오랜 벗이 먼 곳에서 방문하였으니 아무래도 만나봐야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살구색 옷을 입은 여인은 허리를 쭉 펴고는 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대사의 오랜 벗께서 오셨다 하니, 여언(茹嫣)도 더는 대사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여인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따라 일어난 혜동대사에게 가볍게 예를 올렸다.
“선재 대명왕불!”
혜동대사는 불교식 인사를 올린 후 장공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장공주를 모시는 노련한 여관은 바로 문밖에 서 있었고, 계연이 왔다는 소식을 전한 승려는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서 있었다.
장공주가 웃으며 그 여관을 향해 말했다.
“가자, 사찰을 좀 구경하다가 다시 별원으로 돌아가자꾸나.”
장공주가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혜동대사는 말을 전한 승려를 향해 눈짓했다. 승려는 기가 막히게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향해 달려갔다.
계연은 내원으로 이어지는 아치문 바깥에서 대략 반각(半刻) 정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아까 안쪽으로 사라진 승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선재 대명왕불. 계 시주, 사숙께서 시주를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승려는 손을 내밀어 그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계연도 그를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그를 따라나섰다.
내원으로 이어지는 문은 죽 열려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계연이 그 문을 넘어서자마자 대량사의 번잡한 소음이 단번에 고요해졌다. 이곳 내원이 불문(佛門)의 청정한 땅이란 것이 계연에게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이쪽입니다!”
계연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승려가 앞으로 나서 이끌었다.
계연이 승려를 따라 또 다른 모퉁이를 도는 순간, 깐깐해 보이는 여관이 살구색 옷을 입은 여인을 모시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계연의 시야에 보였다.
호흡이 길고 걸음에 힘이 있는 데다 기혈(氣血)이 왕성한 것을 보니, 여관은 관직에 몸담은 무공 고수인 듯했다.
살구색 옷을 입은 여인은 자태가 아름답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황가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전해 들은 소문도 있으니,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자명했다.
계연이 그들을 살피는 동안, 장공주와 그 곁의 여관도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연의 유유자적한 걸음걸이에서는 속세를 초월한 듯한 느낌이 났다. 그들을 보는 시선은 담담하게 풍경을 감상하는 시선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짧은 눈 맞춤 후에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군자의 덕목도 갖춘 듯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실 생김새도 무척 준수한 편이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로 외모가 중요한 시대이다 보니, 만약 계연이 곰보 얼굴에 주먹만 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면 동작에 아무리 기품이 있었어도 사람들은 그를 뒤에서 비웃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걸음을 늦추거나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계연을 이끌고 가던 승려만이 두 여인을 향해 합장했을 뿐이었다.
계연이 떠나자 두 여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정말로 그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혜동대사를 찾아온 벗이 저 사람인가 보지요? 과연 기품이 범상치 않군요!”
여관은 온갖 고귀한 신분의 사람을 만나보았는데도 계연을 본 후에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자 장공주가 옆에서 웃으며 대답했다.
“혜동대사를 그리 기쁘게 할 손님이라면 당연히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그렇게 두 사람은 천천히 떠나갔고, 계연은 잠시 후 단독으로 지어진 한 승당에 다다랐다. 여전히 준수한 외양을 한 혜동대사가 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계연을 보자마자 즉시 다가와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선재 대명왕불! 정말로 계 선생님이셨군요!”
“대사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계연이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하며 인사하자, 두 사람은 짤막하게 그간의 근황을 나누었다.
혜동대사는 한쪽에 서 있던 승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지행(智行), 너는 그만 가보거라.”
“예, 사숙!”
그 승려가 떠나가자, 계연은 줄곧 묻고 싶어 근질거리던 말을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혜동대사, 대사께 마음을 뺏긴 여인들이 적지 않더군요. 상대하려니 불경을 외는 것보다 피곤하시겠어요!”
“휴우…….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험준한 고개를 넘고 망자의 혼을 천도시키는 것보다 더 힘이 듭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두 사람은 승당 안으로 들어가 각자 놓인 방석 위에 앉았다. 그 앞의 소반은 조금 전과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렇게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계연은 마침내 혜동대사에게 부탁한 일의 결과를 듣게 되었다.
“그럼 천보국은 비록 요괴와 마귀와 들끓지는 않지만, 내우외환(*內憂外患: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걱정거리)의 상태라는 뜻이군요. 게다가 황실이 불안한 조짐을 보인다고요?”
“그렇습니다.”
혜동대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세히 설명했다.
“저는 연량국을 천천히 돌다가 대량사에 돌아와 얼마간 머무른 후, 곧바로 천보국을 향해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고작 40년 정도 만에 그곳의 상황은 제가 처음 갔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나빠졌습니다. 제가 선생께 자세히 서신을 써 보냈었는데, 보아하니 받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혜동대사는 서신을 연추산 기슭에 가져가 연추산 산신에게 부탁했고, 연추산 산신은 그것을 대정국의 우역(*郵驛: 공문서와 서신을 등을 전달하던 역참)에 전달했다.
하지만 계연이 최근 몇 년간 영안현을 떠나 있었다 보니, 서신은 관아에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계연은 지난번 육 산군의 환골탈태 때문에 영안현에 갔을 때도 집에는 들르지 않았었다.
“만약 때와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삼사십 년이면 사람들이 나라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남는 시간이지요. 천보국 조정이 세워진 지도 사백 년이 되었지요?”
계연이 탄식과 함께 이렇게 물었다.
“예, 그 정도 되었습니다. 예전에 사부를 따라 함께 천보국에 갔을 때는 모든 것이 연량국보다 대단하고 좋아 보였었습니다. 하지만 사부께서는 글자도 몇 개 알지 못하는 이들이 지부(知府)며 지현(知縣) 노릇을 하고 있다며, 이곳은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것뿐이라 하셨었지요. 그때는 아직 나이가 어려 잘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니 사부께서는 이미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겁니다.”
“겉은 금과 옥으로 포장하였으나, 그 속은 온통 낡아빠진 솜으로 채워져 있었군요(*金玉其外敗絮其中: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내용은 형편없다는 뜻)!”
계연이 이렇게 읊조리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영사(*令師: 상대의 사부를 이르는 말)께서 지금 이곳에 계신지요?”
“선재 대명왕불. 제 사부의 법호는 복도(福度)이셨는데, 그분께서는 이미 30년 전, 86세에 입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 고승께서 고작 86세밖에 살지 못하셨습니까? 이곳 불문(佛門)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명왕의 가르침 같은 게 없나요?”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려있고, 대량사는 명왕의 화신을 모시지 못해 진정한 불교의 법장(*法場: 부처를 모시는 곳)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이 있긴 하지만, 선단(*仙丹: 신선이 만든다고 하는 장생불사의 영약(靈藥))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나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비록 사부님께서는 불법의 경지는 깊었으나, 안타깝게도 천수를 누리시지는 못하셨지요. 하지만 그분의 혼백만은 분명 명왕께서 거둬주셨을 겁니다.”
불법이 깊은 자는 높고 신묘한 마음의 경지를 지니고 있지만, 그런데도 그의 신체 기능은 결국 흘러가는 세월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계연은 그의 혼백이 명왕의 휘하에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불문은 저승처럼 완벽한 구조가 짜여있지 않았으므로, 명왕의 화신이나 진신(眞身) 혹은 불문의 다른 존재가 그의 혼백을 직접 데려가지 않는다면, 보통의 승려들은 입적한 후 저승에 들게 된다.
하지만 혜동대사도 불교의 교리를 깊이 깨우친 승려였으므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아마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계연도 굳이 그 사실을 짚어주지는 않았다.
“참, 장공주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휴우, 말도 마십시오. 여기로 오실 때 장공주마마를 보셨겠지요? 겉으로는 심약해 보이지만 실은 심계가 무척 깊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당금 성상(聖上)의 친누이이기까지 하지요. 연량국 전체에서 감히 그분의 위세에 대적할 만한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제가 어쩌다 그분의 눈에 든 건지 모르겠지만, 상대하기 정말 피곤합니다!”
계연에게 알려야 할 일은 모두 알렸으므로, 이제 혜동대사는 본격적으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런 볼멘소리도 실은 계연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량사에서 그의 신분은 특수한 편에 속했으므로, 따로 하소연을 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머리를 깎는 순간에 속세의 번뇌를 털어냈다고 하지만, 승려들에게도 사실 그들만의 번뇌가 있었다.
“하하, 보아하니 장공주께서는 나이도 젊고 자태가 곱던데, 정말로 환속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대사의 불법(佛法)이 깊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볼 만한 일이 아닙니까?”
“제발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마십시오. 만약 장공주께서 그 말을 들었다간 큰일 납니다.”
그는 바깥에 아무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초조한 듯 문가를 살폈다. 그러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게다가 성상께서 장공주를 위해 일부러 성지까지 내리셨습니다. 제게 장공주마마를 모시고 경전을 가르쳐 드리라고요. 하지만 그게 어딜 봐서 경전을 공부하러 온 자의 모습입니까…….”
그러자 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장공주께서 대사에게 푹 빠졌나 보군요?”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