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명왕의 진신(眞身)
댕- 댕- 댕-!
대량사의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사찰을 방문하는 참배객들은 여전히 줄을 이었고, 문인(文人)과 풍류객들은 한갓진 곳에서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계연과 혜동대사는 대량사의 정문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들은 지금 술법을 쓴 상태였기 때문에, 혜동대사가 정문에 나타났어도 다른 참배객들은 놀라지 않았다. 장공주와 여관은 뒤에서 멀찍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대량사 정문 앞에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 시선을 던졌다.
불음(佛音)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번잡한 사찰 앞 장터에서 낡은 가사(袈裟)를 입고 은백색의 석장을 짚은 노승을 발견했다.
노승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채, 쉼 없이 불경을 외고 있었다.
“불인(佛印)은 천신(千身)이시며, 부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시느니라…….”
불경을 외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사찰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사찰의 종소리와 합쳐지면서 주변에 불법의 기운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주위의 참배객들과 승려 대부분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혜동대사는 꼿꼿이 몸을 세우고 서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계연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두 눈에 펼친 장안법이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대량사에서 10장(약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노승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혜동대사와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석장을 짚고서, 다른 한 손으로 불교식 예를 올렸다.
“나무(*南牟: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믿고 받들며 순종함을 이르는 말. 부처나 보살, 경전의 이름 앞에 붙임) 마하*(摩柯: 위대함, 뛰어남, 많음이라는 뜻으로 주로 인명 앞에 쓰임) 명왕대법(明王大法)!”
혜동대사가 합장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선재, 불인명왕!”
계연은 두 팔을 모아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승은 계연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인 후, 대량사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혜동대사는 노승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선 뒤,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그들이 서로 인사를 하던 순간에도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불경 외는 소리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계연은 원래 자리에 가만히 서서 노승과 혜동대사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명왕의 진신(眞身)?’
노승과 혜동대사가 대량사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도행이 높은 승려들 몇몇이 다급히 뛰쳐나왔다. 그들은 혜동대사보다 반응이 몇 박자 느리고, 사찰 전체에 울려 퍼지는 이 불음(佛音)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불인명왕전(佛印明王殿)으로 향하고 있었다.
과연 승려들이 그렇게 모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시야에 혜동대사가 한 노승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마침내 이 불음의 출처가 노승이 외는 불경 소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그 노승을 보자마자, 대량사에서 도행이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른 승려들은 마음에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굳이 무언가를 물으려 하지 않고 노승을 향해 가만히 합장했다.
뒤이어 수행의 기초가 탄탄하고 마음이 맑은 승려들이 잇따라 도착했다. 그렇게 불인명왕전 앞은 많은 승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머리를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승려들만이 여전히 사찰 곳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있었다.
대량사를 찾는 참배객들은 여전히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 승려들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계연은 약간 떨어진 뒤편에 서서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주위의 참배객들은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무관심하다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보통의 참배객들과 노승을 비롯한 승려들 사이가 유리(遊離)된 것 같았다.
장공주와 여관은 두 사람 뒤를 줄곧 따르다가, 그들이 한 노승을 맞이하는 걸 보고는 분명 고승(高僧)일 거라 짐작해 멀리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주위의 참배객들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혜동대사가 사찰 정문에 나타나고 대량사의 수많은 고승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승려들 가까이 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계연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이 계 선생이시죠?”
장공주가 겉치레식으로 물어오자, 계연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계 선생, 저 사람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자 계연이 주위를 둘러본 뒤 웃으며 대답했다.
“대량사는 줄곧 연량국의 국사(國寺)였지요. 장공주와 육(陸) 여관의 신분이시라면, 혜동대사께서 진정한 불법(佛法)을 몸에 지니신 분임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저도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맞이한 저 어른은 대단한 불법을 지니신 분입니다. 참배객들은 마가 쓰인 게 아니라 저 승려들과 ‘유리’된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계연은 보통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시 설명해주었다.
“참배객들은 저 고승들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부처를 믿지 않거나 삿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무의식이 지금 이 상황을 배제하는 거예요. 저들이 느끼기에는 지금 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이거든요. 저들이 사찰에 부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 온 것이니까요. 내가 절을 할 테니, 나를 지켜 달라. 이런 마음이니 당연히 볼 수가 없죠. 음, 불교에서 말하는 지장(*知障: 알아야 할 바에 대한 앎, 즉 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장애(障礙)하는 번뇌)이 바로 이 상황과 비슷할 거예요.”
그러자 여관이 이렇게 물었다.
“그럼 왜 저와 장공주께서는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저희의 불심(佛心)이 대부분의 사람보다 진실하여서 그런 겁니까?”
“하하하…….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말했다시피, 저들은 지금 승려들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거예요. 두 분은 처음부터 계속 혜동대사를 지켜보며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어떻게 의식에서 이 상황을 배제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가만히 지켜보고 계세요. 두 분께도 좋은 일이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다시 대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장공주와 여관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계연에게 좀 더 붙어선 다음 대전 쪽을 바라보았다.
계연의 마음과 사고가 점차 고요해짐에 따라, 불경 외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집중하면 할수록 그 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나무는 먹줄에 맞추어 바로 잡아야 똑바로 되고, 쇠의 날은 벼려야 예리하게 된다(*木受繩則直, 金就礪則利.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한 구절)더니, 과연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리되면 앞으로 대량사의 불심 깊은 승려들 모두 큰 은혜를 받게 되겠군. 또한 더욱 힘써 불법을 배우게 되겠지.”
계연이 담담히 혼잣말을 늘어놓자, 대전 앞에서 줄곧 불경을 외던 노승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장공주는 소리를 낮춰 곁에 있던 여관에게 속삭였다.
“저 대사는 귀도 참 밝구나.”
곧이어 두 사람은 더는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게 되었다. 심지어 두 눈이 휘둥그렇게 뜨일 정도였다.
대량사를 감도는 불음이 점차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노승의 천둥 같은 목소리에 더해 대량사 승려들이 모두 함께 불경을 외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대전 밖에 서 있던 노승은 어느 순간 불경 외는 것을 멈추고는 합장한 두 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몸에서 반투명한 신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반투명한 사람의 모습은 노승과 꼭 닮아 있었다. 노승에게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지던 순간부터, 그것은 천천히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대전을 향해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의 몸이 점점 더 커졌다. 나중에는 대전의 문틀에 닿을 정도였고, 대전 안으로 들어간 후에는 다시 한번 쑥 커졌다.
대량사 승려들은 더욱 크게 불경을 외기 시작했고, 감격한 듯한 얼굴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을 내뿜는 부처가 지날 때마다 참배객들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금빛의 반투명한 부처는 불인명왕전 안에 들어와 불상을 마주 보았다.
“화신(化身)이 깃들어 금신을 완성하노라. 선재…….”
그는 불상을 향해 살짝 인사를 한 후, 한 걸음씩 다가가 마침내 그 좌불상(座弗像)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사찰을 뒤덮은 향불과 기도의 힘이 단번에 불상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금으로 된 불상이 더욱 휘황찬란해 보였다.
대량사의 승려들은 다 함께 대전 방향을 향해 합장하며 허리를 구부렸다. 바삐 움직이던 참배객들도 이 순간에는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저도 모르게 대전을 향해 합장할 정도였다. 이에 장공주와 여관도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오로지 계연만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부처의 금신에 예를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담담한 태도로 서 있는 것이었다.
짙은 불력(佛力)과 원력(*愿力: 사람들이 올린 기도의 힘)이 대량사 전체를 뒤덮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 색채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신 불인명왕정의 상공을 덮은 구름이 다채로운 색깔로 물들었다.
“저기 하늘 좀 봐! 오색구름이야!”
“어어, 저기 좀 보게!”
“정말이네, 대량사에 오색구름이 떴어!”
“엄마, 엄마! 하늘에 오색구름이 떠 있어요!”
“대량사의 명왕불께서 신통력을 보이신 거야!”
“대불(大佛)께서 현령(*顯靈: 신령이 모습을 나타냄)하셨다!”
“어서, 어서 절을 올려라! 올해는 돈 좀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올해는 장가갈 수 있게 해주세요!”
* * *
참배객들은 하늘에 오색구름이 뜬 걸 보고서 놀라워하기도 하고 감격에 차기도 했다. 뒤이어 그들은 더욱 성실한 태도로 대량사 각 전에 놓인 불상을 향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오늘 엄청난 대운을 목격했으니, 절을 올리면 부처께서 보우해주실 것이다.
장공주는 길게 합장한 후 계연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생은 절을 올리지 않으시나요?”
“예, 절을 올리기 곤란하네요.”
어떻게 곤란한지에 대해서는 계연이 말하지 않았으므로 장공주도 더 묻지 않았다.
오늘 이런 기이한 광경을 맞닥뜨린 것은, 다시 없을 무척 드문 기회였다. 연량국 황실에서도 대량사가 진정으로 불법을 모시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그 참모습을 확인한 셈이었다.
반각(半刻: 7~8분) 정도가 지나자 사찰을 뒤덮은 불음이 점차 약해졌고, 하늘에 뜬 오색구름도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갔다.
노승은 대량사 승려들에게 빼곡하게 둘러싸인 가운데 불인명왕전의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 명왕의 화신이 성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앞으로 대량사는 진정한 불문(佛門)의 법장이 된 것이다.
대량사 방장(*方丈: 주지 스님)은 다급히 혜동대사와 눈짓을 주고받은 뒤, 노승에게 다가가 감격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존자(*尊者: 학문과 덕행이 높은 부처의 제자를 이르는 말)께서는 내원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음, 서두를 필요는 없지.”
노승은 온화한 얼굴로 계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 뒤,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