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도(道)를 듣고 환상을 보다
세 사람은 몸을 숨긴 곳에서 나와 발등을 들고 가볍게 몇 번 뛰어올라 사찰의 바깥 담장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문이 있는 곳이 아니라 약간 구석진 담벼락이었다.
멀리 보이는 대량사 정문에 걸린 침향목 목패 옆에는 선제가 하사한 금패가 별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대량사 승려들은 저 금패를 도둑맞는 게 두렵지도 않나 보지?”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들은 낮은 소리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담벼락에 붙어 이동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귀를 쫑긋 세워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그들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동시에 담벼락을 넘었다.
그들은 마치 세 마리 제비처럼 담벼락을 폴짝 뛰어넘은 후에도 뒤꿈치를 들고 가볍게 착지했다. 발이 땅에 닿을 때는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곳은 노목명왕전 바깥의 작은 광장이었다. 세 사람은 텅 빈 광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대전에 걸린 장명등을 제외하면 승려들이 머무는 승당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오늘 밤 대량사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불경 읽는 소리도,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세 사람은 그만큼 담도 컸으므로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이곳은 대량사였으므로, 무슨 삿된 존재를 마주칠 확률도 없었다.
대량사는 찾아오는 인파가 너무 많아서, 사찰 곳곳을 담장으로 갈라놓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많은 이들이 한곳에 몰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비록 길을 잃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신 승려들이 곳곳에 서서 참배객들을 위해 길을 안내해 주었다.
다만 이때의 세 사람에게는 길을 안내해 줄 승려가 없었다. 수많은 건물을 지나칠 때까지 그들은 단 한 사람의 승려도 만나지 못했다.
“이상하네, 대량사의 승려들이 다 어디로 갔지?”
탕씨 성의 형제 중 동생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치문을 통과하려던 순간, 그의 몸이 제 형제에게 끌어당겨졌다. 그의 형이 손가락으로 앞쪽의 모퉁이를 가리켰다.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기척을 죽이고 그쪽을 살펴보자, 십여 명의 승려들이 방석을 깔고 앉아 담장에 등을 기대고 일렬로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바른 자세를 하고 수행을 닦는 것처럼 보였고, 어떤 이는 고개가 꺾여 깊은 잠에 빠져있기도 했다.
“저게 뭐 하는 거지?”
“저들에게 들키지 않게 길을 돌아가자.”
세 사람은 다른 길을 이용해 사찰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쪽에도 승려들이 앉아 참선하고 있었고, 뒤이어 바꾼 다른 길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한두 사람, 때로는 십여 명이 넘게 담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서쪽의 한 담장 앞에 도착하자 그들의 눈에 승려 두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승려들은 마치 동그랗게 무언가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여태껏 노승들은 보지 못했으니, 이 안에 무언가 일이 있는 거야!”
“맞는 말이야, 여기로 들어가지!”
세 사람은 정신을 잃은 승려들을 지나친 다음, 가볍게 담장을 뛰어넘어 4, 5장(약 12~15m)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주위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보고 세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걷다 보니 그들 중 가장 어린 남자가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래?”
“형님, 누군가 시를 읊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근데 꼭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해요.”
“누가 시를 읊는다는 거야!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
그렇게 얼마간 걷다가 이번에는 짧은 수염을 기른 탕씨 성의 남자가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다. 그들이 막 작은 연못을 건너려는 순간, 그는 연못 안에 만개한 금빛 연꽃들이 가득히 피어있는 것을 보았고 심지어 은은한 향기도 맡을 수 있었다.
“금련(*金蓮: 금빛으로 빛나는 연꽃)?”
남자가 놀라워하며 소리친 후, 경공을 이용해 날아올랐다. 그의 계획은 연잎에 가볍게 발을 디딘 후, 저 연꽃을 한 송이 꺾는 것이었다.
풍덩……!
연못 주변으로 물보라가 솟구쳤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금빛으로 빛나던 연꽃은커녕 연잎도 연꽃도 없었다.
“탕형, 왜 그래?”
“금련! 금련이 가득히 피어있었는데!”
“금련이 어디에 있어? 뭐에 홀렸나? 어서 자네 형님부터 끌어 올리자고!”
두 사람은 함께 짧은 수염을 기른 남자를 작은 연못에서 끌어 올렸다. 그런 후 그의 얼굴을 몇 번 때려 정신을 차리게 만든 다음,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정신이 혼미해진 승려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그런 와중에도 고요한 표정으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이제는 그들 중 한 사람만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오색 빛이 주위에 가득 차고, 별빛이 밝게 쏟아져 마치 은빛의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귓가에는 어렴풋이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샘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에 더해 때로는 노승이 불경을 읽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누군가 금(琴)을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진작에 걸음을 멈추고 이 환각 속에서 강렬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거대하고도 기이한 모습의 짐승이 나타나 환상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는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도 했고 바로 곁을 스쳐 지나기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선학(仙鶴)이 신선으로 변해 웃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했다.
몇 번이나 그들은 하마터면 환호성을 터뜨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그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선(仙), 불(佛), 영(靈), 요(妖), 마(魔)……. 감정을 가진 모든 중생은 도를 좇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의 말에 틀린 곳이 있습니다. 수선자, 불자, 귀신, 요물 등은 잠시 제하더라도 마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사의 말씀에도 이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게 옳겠군요. 일부 마귀들에게도 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마, 편집적인 마처럼 마음이 굳건하지 못한 이들은 도를 닦을 수 없겠지요.”
“좋습니다! 사람에게 잡념이 없으면 마가 생기지 않고, 사념이 극에 달하면 마를 불러옵니다. 금은(金銀)을 바라고, 관직과 권세를 바라고, 불로장생을 바라는 집념이 강할수록 욕망도 더욱 중해지지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세 명의 무공 고수들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욕망과 사념이 솟구치는 동시에, 누군가 옆에서 그것은 옳지 않다고 노한 얼굴로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아악! 더는 못 듣겠어!”
탕씨 형제 중 동생이 참지 못하고 손발을 마구 휘둘렀다. 이에 정신이 혼미해져 비틀거리던 그의 형과 친우가 그에게 맞아 몇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은 그런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술에 취한 것처럼 주위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들은 때때로 기쁨에 찬 표정을 짓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무마하명왕불! 세 분 시주께서는 이곳에 계시면 안 됩니다!”
한 노승이 뜰 안에 나타나 세 사람을 막아섰다. 그런 후 그들의 혈 자리를 연이어 몇 군데 누르더니 영기(靈氣)를 주입해 주었다.
“대사님…….”
담씨 성의 남자가 멍하니 눈앞의 노승을 바라보았다.
“세 분 시주, 이게 바로 저희가 문을 닫고 참배객들을 사절하는 이유입니다. 어서 떠나 주십시오!”
“예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예,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세 사람은 그 승려가 그들을 꾸짖지 않는 걸 보고 대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허둥지둥 사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경공 실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머리가 완전히 몽롱해지기 전에 서둘러 사찰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사찰에서 멀리 떨어질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 * *
사실 계연과 불인 노승은 주위의 초목이 움직이는 기척까지도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히 대량사에서 참배객들을 물린 일과 세 사람이 멋대로 침입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대량사에서 참배객들을 내보내고 사찰의 문을 닫아건 후에, 두 사람은 더욱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참배객들이 나가기도 전에 사찰 전체가 이미 이상 현상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계연은 그간 자신의 의식 세계의 신묘함에 완전히 적응된 상태였다. 이에 천지화생의 실력도 점점 무르익어, 노승과 도를 논하는 도중 천지화생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바깥 세계로 펼쳐져 나갔다.
게다가 계연은 운산관 도문(道門)을 위해 <천지묘법>을 직접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공의 별들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별의 힘을 드리웠다.
계연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불인 노승의 몸 안에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계연과 마찬가지로 노승의 주위에는 꽃과 나무, 붉은 노을이 펼쳐지며 시시때때로 불음(佛音)이 울려 퍼졌다.
이것은 마치 바둑에서 적수를 만나고 주량이 엄청난 술친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계연은 늙은 용과 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비록 불인 노승이 자신처럼 현실 세계와 같은 모습의 의식 세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척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다.
대량사의 승려들은 마치 구급대원이 된 것처럼 제 귀를 틀어막아 도음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한 다음, 눈앞에 펼쳐지는 각종 환상을 무시하고서 정신을 잃은 다른 승려들을 돕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승려들은 아예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찰 외곽으로 보냈다. 또한 승려들이 머무는 건물은 전부 내원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원의 불당이나 대전에 자리를 마련해 머물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은 승려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먼 곳으로 옮겨지거나, 아예 정신을 차리도록 두들겨 깨우기도 했다.
반면 대량사를 빠져나온 세 명의 무공 고수들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후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대량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게 대량사를 벗어나자 하늘이 더욱 어두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서 대량사를 바라보니, 그 상공이 몽롱한 별빛에 뒤덮여 있었다.
“방금 그것…… 모두 봤지?”
담씨 성의 남자가 흥분을 억누르며 탕씨 형제에게 물었다.
“응, 잊을 수도 없을 것 같아.”
“저도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어요!”
지금도 세 사람은 그 아련하기도 하고 어딘가 괴이쩍기도 한 목소리가 은은히 귓가에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자. 여섯째 어르신께 보고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