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399화 (399/892)

399화. 우는 듯도 웃는 듯도 한 뇌우(雷雨)

금빛을 띠는 보라색 번개는 쉬지 않고 치지직, 번쩍이며 떨어져 내렸다.

계연은 온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선검을 쥔 오른손을 살짝 느슨하게 만들어 가슴 부근을 더듬었다. 종이학이 머무는 비단 주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계연은 자신이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나날이 영성(*靈性: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을 더해가는 종이학은 자신과 달리 무척 약한 존재였다. 만약 저 번개에 직접 당했다간 곧바로 가루가 될 것이다.

다행히 일전에 특수한 수단으로 비단 주머니를 견고하게 만들어둔 덕분에, 그 안의 종이학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뇌겁의 목표는 계연이 왼손에 쥐고 있는 <천지화생>이었다. 그래서 벼락은 계연의 몸을 통로 정도로만 여길 뿐, 대량의 번개는 모두 그의 왼손으로 모여들었다.

계연은 법력을 끌어올려 왼손의 서책을 보호하는 동시에, 소매 안에서 그가 만든 법전(法錢)을 꺼내어 자신의 법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법전의 힘으로 그는 희미한 법력의 막에 뒤덮였고, 떨어지는 벼락을 막아낼 수 있었다.

치지직……!

마침내 모든 번개가 사라졌고, 계연의 주변을 비롯한 주위 산봉우리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계연은 제자리에 서서 요동치는 법력과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그의 몸 위에도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르릉……!

구름 사이로 천둥소리가 들려왔지만, 계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계연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전처럼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고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선검이 그 중앙을 베고 지나갔기 때문에, 먹구름 가운데에서는 한 줄기 널찍한 구멍이 생겨난 후였다. 그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내려 주위가 조금 밝아졌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였지만, 조금 전의 뇌겁처럼 지켜보는 이를 두렵게 만드는 위세는 없었다.

“휴우…….”

계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슴 부근을 누르고 있던 오른손을 내리고서, 왼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흰색이었던 선지(宣紙)는 오래된 종이처럼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심지어 모서리에는 언뜻 그을린 흔적마저 남아있었다.

그때 작은 종이학이 주머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거멓게 그을린 계연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조금 전의 고통을 까맣게 잊은 듯,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미 겉으로 보기에도 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연은 살짝 긴장했다.

마침내 두루마리가 완전히 펴지고 계연의 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점 더 많은 글자가 드러날수록 그 안에 담긴 신의(神意)가 눈앞에 펼쳐졌다.

글자도 완전하고 그 안에 담긴 신의도 그대로였다. 까만 먹물 위로는 금빛이 번쩍이며 언뜻 보라색이 엿보여, 자세히 글을 관찰하면 하늘의 위세가 느껴졌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계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뻣뻣하게 긴장되어 있던 몸을 느슨하게 풀었다.

솨아아아……!

그 순간, 장대비가 쏟아지며 번개에 의해 생겨난 산 곳곳의 불씨들이 힘없이 꺼져버렸다. 동시에 계연은 주위의 온도가 확 내려가는 걸 느꼈다.

계연은 아무런 술법도 펼치지 않고서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차가운 빗물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러자 온몸의 고통, 특히 왼손의 찌르는 듯한 통증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쓰읍…… 엄청 아프네!”

계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이 정도의 고통은 참아내기에 충분했으나, 그렇다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다른 수행자였다면 너무 아파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계연은 오른손으로 천천히 왼팔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위의 그을린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며, 까만 가루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팔은 곧이어 전과 같은 상태를 회복해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일 뿐, 피부 안쪽은 여전히 상처 입은 그대로였고 통증도 느껴졌다.

계연이 있던 곳에는 이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동추부에는 일찍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수의 몇몇을 빼면, 동추부의 그 누구도 범인(凡人)의 시선을 벗어난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 * *

대량사 내원.

혜동대사는 장공주 초여언과 함께 승당 밖 처마 아래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여관은 조금 떨어진 위치의 기둥 옆에 서서, 그들 세 사람은 그렇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쿠르릉……!

천둥소리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그르렁거리며 울려 댔다. 이번에는 장공주가 돌연 이렇게 물었다.

“소리가 전보다 작아진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비는 점점 더 많이 오네요.”

“예, 확실히 전보다 작아졌네요!”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비는 점점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휘이이-! 휘잉-.

우르릉……!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 번개가 울려 퍼졌다. 빗물은 끊임없이 대지를 향해 쏟아져 내려, 작게 고인 웅덩이에는 계속 파문이 일고 있었다.

휘이이-!

솨아아…….

초여언은 저도 모르게 혜동대사 가까이 몸을 붙였다. 추워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시종일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혜동대사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혜동……. 비바람과 천둥소리가 조금 무섭네요…….”

그녀의 말에 혜동대사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과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계 선생님이 부디 무사하시기를!’

혜동대사는 걱정 가득한 기색으로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저 멀리 상공에 기다란 흰색 선이 더욱 먼 곳까지 뻗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선이 아니라 구름이 갈라진 거야!’

넝쿨검이 우중충한 하늘을 베어버리던 순간은 벼락이 가장 왕성하게 떨어지던 때였다. 그때 동추부 주위에는 온통 번개가 내려쳐, 대량사의 고승들조차 선검의 검광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래서 혜동대사는 이제야 하늘을 가로지르는 흰 균열 사이로 햇빛이 비쳐드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햇빛을 발견한 혜동대사의 마음에도 우려가 싹 걷혀나갔다.

“혜동대사, 이 세상에는 계 선생님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선들이 많이 있나요?”

장공주가 이렇게 묻자, 혜동대사는 합장한 채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소승은 수행이 얕고 견식도 부족하지만, 세간에 계 선생님 같은 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신통한 술법 중 하나일 뿐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도행이 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축에 드는 술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이들이 구사하는 편입니다.”

“그럼 왜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모두 신선들이 사는 세상에 따로 사나요?”

초여언은 계속 혜동대사의 준수한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두툼한 귓불이 그의 분위기가 더욱 온화하게 느껴지게 했다.

“선재 대명왕불. 장공주마마, 수행하는 이들은 당연히 그들이 머무는 법장(法場)이나 도장(道場)이 있습니다. 하지만…….”

혜동대사는 고개를 돌려 초여언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정말로 그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모두 사리사욕을 좇고 속세의 때가 묻어있어, 신선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계 선생님은 때때로 찻집에 가서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보통 손님들처럼 다과 두 접시와 찻주전자 하나를 시키고서, 설서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손뼉을 치는 분이시지요. 하하, 만약 장공주께서 그 근처에 계셨다면, 그분이 고인(高人)이라는 것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초여언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마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닌 서생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혜동대사와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몰라도, 이번에 대량사에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도 초여언은 그에게 조금의 거리감도 느끼지 않았을뿐더러 처음의 목적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일찌감치 승려들은 간단한 천막을 대량사의 금지구역에 있는 나무 아래에 세워, 계연이 남기고 간 책상이 비에 젖지 않도록 보호해 놓았다.

약 반 시진이 흐르자, 비가 점점 약해지더니 완전히 그쳤다.

비는 갑자기 쏟아진 것처럼 그치는 것도 빨랐다. 비가 그친 후 먹구름이 천천히 흩어지자, 햇빛이 다시 대지를 비추기 시작했고 대량사 북쪽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올랐다.

“무지개가 참 아름답네요. 대사와 함께 불경을 읽지 않고, 비 온 뒤의 무지개를 감상하는 것도 정말 좋군요!”

초여언이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자, 혜동대사는 살짝 한숨을 내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돌려 무지개 뜬 하늘을 바라보자, 그곳에서 은은한 법광(法光)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구름을 타고 대량사로 돌아오는 계연이었다.

“계 선생님이 돌아왔습니다! 과연 무사하셨군요!”

혜동대사는 기뻐하며 소리쳤고, 도행을 어느 정도 갖춘 승려들 또한 모두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장공주와 그녀의 여관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계연에게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을 꿰뚫어 볼 만한 실력을 지닌 자는 아직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계연이 대량사의 금지구역에 내려선 때에는 이미 금지구역 밖에 승려들이 모여든 후였다. 장공주와 그녀의 여관을 이끌고 온 혜동대사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있었다.

계연은 나무 아래에 놓인 책상을 소매 안으로 거두고 천천히 금지구역 밖으로 나갔다.

“계 선생님, 조금 전의 뇌겁은 어찌 되었습니까?”

대량사 방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계연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묘법에 관한 일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방장대사께서는 괘념치 마세요. 뇌겁은 대량사와 무관합니다. 그건 제가 쓰던 책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이미 무사히 지나갔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선재, 선재로다! 계 선생님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계연의 시선이 그들을 훑고 지나자, 모여든 승려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합장했다. 마치 불문의 명왕을 대하는 듯한 공손한 태도였다. 마침내 계연이 혜동대사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혜동대사, 대량사는 이미 불인대사의 화신을 맞아들였으니, 이제 대사께서도……. 크흠, 어쨌든 불인대사를 만나 뵙고 그분과 좌담을 나눌 수 있어 무척 영광이었습니다. 저도 이만 가봐야겠군요. 여러 대사께서도 수행에 진전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배웅하러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연은 본래 혜동대사에게 대량사는 이미 명왕의 화신을 품었으니, 이제 훌쩍 떠나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초여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거의 동시에,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생님! 계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자 계연이 장공주의 여관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줄곧 뻣뻣한 태도였던 여관은 무척 긴장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침을 꿀꺽 삼킨 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술법을 배우고 선도(仙道)를 닦으려면 무슨 자격이 필요한가요?”

그녀가 조금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당돌하게 물어오자, 계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자를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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