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어르신이라고 부르게 해라
진자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뻣뻣하게 굳은 청송 도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오른손으로 <천지묘법>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맥이 없습니다. 심장도 멈췄고, 호흡도 없습니다!”
“사부님! 사부님이 돌아가신 겁니까? 사부님!”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고 있던 제문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비틀거리며 제선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던 응굉이 그를 붙잡았다.
“자네 사부는 아직 죽지 않았네. 흥, 우리 세 사람이 여기 있는데 누가 감히 자네 사부에게 손을 쓰겠나? 혹 그 스스로가 죽고 싶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도 그것도 쉽지 않을걸세!”
계연은 청송 도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 위로 새해의 맑은 기운이 떠올랐다.
“고목(枯木)이 봄을 맞이하노라. 천지화생!”
계연이 그 손가락을 청송 도인의 이마에 대자, 맑은 기운이 파문이 퍼지듯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뒤이어 제선의 부릅뜬 두 눈에 다시 초점이 생겼다.
쿵……. 쿵……. 쿵…….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하며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청송 도인은 점차 지각을 되찾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오른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두루마리가 아직 손안에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무척 안심했다. 내심 자기가 마지막 순간에 도망치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참이었다.
그리고 천지묘법에 대한 깨달음이 다시 청송 도인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어서 그는 이 두루마리와 별자리 그림과 자신이 서로 이어진 것을 느꼈다. 제선이 시험 삼아 두루마리를 던지자, 그것은 한 줄기 빛으로 변해 대전 안으로 날아가더니 별자리 그림에 ‘녹아들었다’.
청송 도인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 깊이 예를 올렸고, 그를 본 제문도 뒤이어 예를 올렸다. 그리고서 그들은 함께 계연을 비롯한 셋에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읍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도장께서는 이제 <천지화생>의 인정을 받아 천지묘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수행은 해야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이제 운산관 도교 일맥의 진정한 장교 진인이 되었군요.”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갑자기 목이 말라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차를 따라 마셨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고, 중요한 일을 끝마친 분위기는 자연스레 이전보다 더욱 가벼워졌다.
늙은 용은 이제 운산관에도 금제(禁制)가 필요하다 했고, 계연은 최소한 지금 당장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자주는 그 옆에서 허허 웃었고, 제선과 제문은 아직도 조금 전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러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지난번 점쳤던 <검의첩>에 관한 일로 넘어갔다. 계연이 <검의첩>을 꺼내 그들 앞에 펼치자, 제각각 떠들어대는 작은 글자들이 그 안에서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들은 ‘어르신, 어르신’ 하며 쉬지 않고 계연을 불러댔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신기하다며 연신 혀를 찼다.
* * *
이틀 후 새벽, 운산관에는 두 도인과 담비 두 마리만이 남아있었다. 진자주는 계연과 늙은 용을 따라 함께 떠났는데, 그들이 얼마나 있다가 돌아올지는 확실치 않았다.
제선과 제문은 대전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행을 닦고 있었다. 담비 두 마리도 각각 방석 위에 자리 잡고 앉아 그럴듯하게 수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침 수련이 끝나고 제문이 돌연 이렇게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은 이제 장교 진인이신데 진공과 계 선생님은 어찌 되나요? 저번에 그리신 그림도 이제 가져다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제선이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계 선생님과 진공의 그림은 아직 밖에 걸어놓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이후에 우리도 무슨 금제 같은 것을 만들거나, 복지(*福地: 신선이 사는 곳)나 동천(*洞天: 도교에서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의 유형 가운데 하나. 대개 동굴이나 석동, 계곡 등 지하 또는 반지하 공간)이 생기면 그때 가서 적당한 곳에 거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그분들의 칭호라면, 진공께서는 물론 우리 운산관 도문의 계유신군(界游神君)이시고 계 선생님은…….”
제선은 다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운산관의 규모가 커져 제자들이 많아지면, 계 선생님의 성격에 제자들이 당신을 일컬어 전법(*傳法: 교법을 전하여 줌) 조사(*祖師: 학파·종파 따위의 창시자)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을 듯했다.
그 순간 청송 도인 재선은 며칠 전 작은 글자들이 계연을 부르던 소리가 떠올랐다. 그것들이 귀따갑게 불러대는데도 계 선생님은 그 호칭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듯이 보였다.
짝!
제선이 돌연 손뼉을 쳤다.
“그렇지! 우리 운산관이 이후에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면, ‘계(計)’ 자가 적힌 그림 안의 저분을 ‘어르신’이라 부르게 해라!”
“어르신(大老爺)이라고요?”
제문은 이렇게 되물으며 저도 모르게 그 작은 글자들을 떠올렸다. <검의첩>이 처음 펼쳐졌던 그 밤은 운산관이 역대 가장 시끄러웠던 순간이었다. 제문은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할수록 무척이나 우스웠다.
“그래, 그냥 어르신이라고 부르라 해라. 너무 자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고.”
청송 도인은 자신의 결정에 매우 만족해했고, 제문의 표정을 보니 제자도 그 호칭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청송 도인은 대전 안에 걸린 별자리 그림을 바라보며 다시 제문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운산관은 이제 수행을 닦는 도문(道門)이 되었고, 우리는 이 도문을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후에 운산관이 점차 커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에 걸맞은 수행을 갖춰야 할 테고. 그러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련에 임해야 할 것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참, 사부님. 그럼 앞으로는 점치러 내려가지 않으실 건가요?”
“크흠…….”
청송 도인은 제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앞으로 점점 더 수행이 쌓일수록,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강호 무인에게 얻어맞는다고 해도 걱정할 게 없을 듯했다.
“수행은 수행이고, 취미는 취미지. 계 선생께서도 그리 많은 취미를 지니지 않으셨느냐. 물론 수행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사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문은 그가 평생 그 ‘취미’를 떼어놓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담비 두 마리도 수행을 마치고 방석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별자리 그림을 잠시 바라본 뒤, 제선과 제문을 향해 ‘끽끽’하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대전을 뛰어나가 도관 밖으로 향했는데, 대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 * *
운산관의 스승과 제자는 부지런히 수행을 쌓고, 담비들은 무언가 간식거리를 찾으러 간 동안, 계연과 응굉, 진자주에게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세 사람은 사실 운산관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그 부근을 날고 있었다. 계연과 늙은 용은 어풍술을 이용해 구름을 밟고 날았지만, 진자주는 아직 그런 신통한 술법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진자주는 계유신이 될 씨앗이었기에, 별의 힘을 이용해 천천히 하늘을 밟고 이동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나는 것만큼 빠르지는 않아, 계연이나 응굉이 그를 데리고 함께 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물론이고 응굉조차 그런 이유로 진자주를 우습게 보지는 않았고, 응굉은 오히려 진자주를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두고 대했다. 이전에는 그의 인품을 흠모했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이 좀 더 컸다면, 지금은 그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좀 더 컸다.
운산관에서 수행하며 본래부터 순수한 양기(陽氣)를 지닌 몸이었던 진자주의 기운은 점차 완성되어갔다. 처음에 그가 계유신이 될 가능성이 3할 정도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6할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무전진 상공을 지날 때, 늙은 용이 발아래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가 그 몸속의 신령(人身神)이 사는 곳이구려?”
계연은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쳐 주었다.
“저 사람의 이름은 황흥업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몸속의 신령은 그와 아직 한 몸인 상태예요.”
“하하, 그게 그거 아닌가! 범인(凡人)의 수명이 몇 년이나 된다고? 황흥업은 그 당시에도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니었으니, 이제 몇 년 안 남았지. 저런 신령은 무척 희귀하니, 만약 황흥업이 죽은 뒤에 자신의 기연(機緣)을 찾아 어딘가에 숨는다면 몰라도, 황흥업이 죽은 뒤 함께 사라지면 너무 아까울 것 같군!”
늙은 용의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그는 사실 계연이 일찍이 황흥업이 죽은 뒤를 대비해 무언가 준비를 해놓았을 거라 믿고 있었다.
“예, 확실히 아까운 일이죠. 그래서 그때 일을 마무리한 뒤 무전진 토지신께 칙령을 남기고 가면서 황흥업을 잘 지켜보라고 당부해 놓았어요. 그리고 그 희미한 기운마저 숨기기 위해 제가 황흥업에게 따로 손도 썼고요. 청송 도인의 점괘에 의하면, 그는 무사히 제 수명대로 살다 갈 거라네요.”
청송 도인의 점치는 실력은 이제 늙은 용마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청송 도인은 범인이었기 때문에 점괘를 칠 때 고려해야 할 제약과 전제조건이 무척 많았지만, 그런데도 그가 점치는 결과는 항상 정확했다. 계연이 지난번에 <검의첩> 위의 글자들을 찾아 점을 쳤을 때도 청송 도인의 점괘가 큰 도움을 주었었다.
“어서 가죠!”
세 사람은 구름을 몰아 무전진 토지신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려섰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무전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무척 일찍 일어났다. 거리에는 이미 많은 행인이 오가고 있었지만, 토지신당 주변은 한산한 편이었다.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무척 눈에 띄었다. 하나는 바람에 표표히 날리는 흰옷을 입은 비범한 인상의 서생이었고, 또 하나는 넓은 소매의 장포를 입고 눈썹과 수염이 새하얀 노인이며, 다른 하나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어 딱 봐도 귀한 신분의 남자였다.
그 세 사람이 함께 토지 신당으로 걸어가는 만큼, 원래라면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한 농촌 아낙네가 3,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토지신당에서 나왔다. 그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지척에 서 있는 세 사람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안은 아이는 단번에 그들에게 시선이 쏠렸고, 특히 진자주가 가슴 높이까지 기른 수염에 온 정신을 뺏겼다.
그들 세 사람은 평온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지녀, 아이는 그들을 앞에 두고도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손을 뻗어 진자주의 수염을 움켜잡으려 했다.
“할아부지, 수염 만져도 돼요?”
“어어, 안 된다, 안 돼! 그러다 수염이 뽑히기라도 하면 무척 아프거든!”
진자주는 자신의 수염을 보호하려는 듯 호들갑스럽게 피하다가, ‘실수로’ 수염을 아이의 통통한 손에 닿게 해 아이가 만질 수 있도록 했다.
“뭐? 누구랑 이야기하니?”
부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고쳐 안으며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돌려봐도 아이가 말하는 ‘할아버지’는 없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어눌한 발음으로 열심히 말했다.
“저기, 저기에! 수염이 길어. 수염 긴 할부지!”
“수염 긴 할아버지?”
여인은 주위를 돌아보며 속으로 혹시 아이가 토지신을 뵌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는 무전진뿐만 아니라 대정국 다른 지방에도 퍼져있는 미신으로, 바로 아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아, 여인은 아이를 안은 채 토지신이 있는 곳을 향해 깊이 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