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그래도 집은 집이지
“알겠어요. 하긴,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知足常樂)는 말도 있으니까요.”
계연은 젓가락을 그릇 위에 올려놓고, 국물이 묻을까 접어두었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렸다. 그는 손복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복의 손녀를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부끄러운지 손수레 뒤에 숨어 이쪽으로 오려 하지 않았다.
“허, 참! 저리 낯가리는 듯 보여도 실은 사내애들처럼 아주 천방지축이랍니다. 그나저나 저 아이도 이제 곧 학당으로 보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예? 여자아이들도 학당에 가서 공부할 수 있나요?”
계연이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비록 대정국의 법률에 여자아이는 공부하러 갈 수 없다는 명문은 없었지만, 누구나 여자아이를 학당에 보내지 않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척 낮아서, 학당에는 거의 여자아이가 없다고 봐도 되었다.
대갓집의 규수들도 집으로 선생들을 불러 글을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허허, 몇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우리 영안현이 무슨 고장입니까? 인재가 나는 영험한 땅 아닙니까! 윤 문곡(文曲)께서 조정의 대신이 되신 후부터, 여자아이도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고 계시거든요.”
“아, 반발이 무척 거셌겠네요.”
손복이 계연의 그릇과 젓가락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윤 문곡의 말씀이라면 저희 영안현에서는 군말 없이 따르거든요. 그분의 이름을 꺼내 들기만 하면, 감히 반대하려 드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엄지를 내밀었다.
“하하! 탁월한 견해를 갖고 계시네요.”
그렇게 대답한 계연은 허벅다리를 몇 번 두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매에서 동전 몇 개를 꺼냈다.
“가격은 아직 그대로죠?”
“아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있다가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국수는 제가 대접해 드려야지요! 제가 어찌 선생님의 돈을 받겠습니까! 어서 넣으세요!”
손복의 강경한 태도에는 조금도 가식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러자 계연도 동전을 다시 집어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말씀대로 할게요. 저는 이만 집에 돌아가 볼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거안소각으로 꼭 찾아오세요. 그게 무슨 일이든지요.”
계연은 이렇게 말을 마친 뒤 성큼성큼 거안소각이 있는 방향으로 떠나갔다.
그가 떠나자 식사를 마치고도 일부러 자리에 남아있던 손님들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손 아저씨, 저 선생님이 대체 누구입니까? 아저씨께서 항상 계 선생님, 계 선생님하고 부르는 걸 보니, 무척 유명한 분입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보아하니 저 선생은 나이가 그다지 많지도 않은 듯한데, 어째 주인장께서는 꼭…….”
그렇게 말하던 손님은 그 느낌을 뭐라 형용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손녀까지 있는 엄연한 할아버지가 된 손복이 그 선생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그의 아버지뻘을 대하는 듯했던 것이다.
손복은 계연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들을 향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이 뭘 안다고! 저분의 존함은 계연, 계 대선생(大先生)이라네. 십몇 년에서 20년 전에는 우리 고장에서 아주 유명했다고. 집에 돌아가서 자네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여쭤보게. 분명 기억하실 테니!”
“그렇게 옛날이요?”
“저분 나이가 그리 많습니까?”
손복이 다급히 손짓하여 그들이 목소리를 줄이게 한 뒤 계속 말했다.
“저분은 예전에 기인으로 유명하셨다네. 전임 지현(知縣) 나리와 현위(縣尉) 나리께서도 저분께는 무척 공손하셨지. 참, 윤 문곡 어르신도 알지?”
“알죠!”
“아저씨, 윤 문곡을 모르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고요!”
“음, 윤 문곡께서 예전에 천우방에 사셨을 때, 계 선생님과 가장 사이가 좋았었지. 학당에서 훈장을 하실 때는 거의 매일 거안소각에 들르곤 하셨다네. 그러니 두 분 사이의 교분은 무척 깊다고 할 수 있지!”
“아하!”
“정말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손님들의 경탄하는 얼굴을 보자 손복도 무척 만족스러웠다. 한쪽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손복의 손녀딸은 그들의 호들갑스러운 얼굴을 보고 킥킥대며 웃었다.
계연이 거안소각으로 향하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침내 대문 앞에 도착한 그는 열쇠로 자물쇠를 연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익 소리와 함께 대문 위쪽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먼지는 계연의 몸에 닿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솨아아……. 솨아아…….
계연이 들어서자 뜰 안에 맑은 바람이 불더니, 대추나무의 가지와 잎이 이리저리 흔들려 가벼운 소리를 냈다.
샤아아아-!
스스슷-!
대추나무가 있어서인지 뜰 안의 기운이 무척 깨끗했다.
“고생 많았다!”
계연은 앞으로 자신이 영안현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번에도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이 거안소각은 앞으로도 대추나무 홀로 지키게 될 것이다. 집안에 훔쳐 갈 만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집은 집이니 말이다.
계연은 온 집안의 문과 창문을 전부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러고는 소매를 휘둘러 술법으로 바람을 일으킨 다음, 실내에 내려앉은 먼지를 전부 내보냈다. 그러자 집은 누군가 청소를 한 것처럼 저절로 깨끗해졌다.
하지만 주방에 들어선 계연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이런, 전부 못쓰게 됐군!”
작은 도기 안에 담긴 꿀은 10년이 지난 지금 당연히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연이 뚜껑을 열어보니, 아래쪽에 맑은 결정체가 굳어져 있었다. 그것을 살짝 긁어내 냄새를 맡아보니 향긋한 단내가 났다.
“아직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품 안의 종이학이 비단 주머니 안에서 나와 대추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대추나무도 ‘솨아아’하고 나뭇가지를 흔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종이학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계연은 주방에서 나와 물을 길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의첩>을 꺼내 뜰 안에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두루마리가 저절로 펼쳐지더니 그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거안소각이다!”
“정말이네! 우리 영안현에 돌아온 거야!”
“대추나무다!”
“하하하! 드디어 영안현에 돌아왔어!”
“대추나무 아직 말 못 해?”
“멍청아, 대추나무는 나무야. 정령(*精靈: 만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모여야지!”
“쉬이……. 여기 주변에는 전부 범인(凡人)들이 사니까 조용히 해야 해!”
“아, 그렇지. 조용히 하자…….”
글자들은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다가 하나둘씩 <검의첩>에서 뛰쳐나갔다.
말하고 움직이는 작은 글자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대추나무의 가지와 잎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계연은 처음 <검의첩>을 손에 넣은 뒤로, 그것을 무척 아껴 손에서 내려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뜰 안에서 <검의첩>을 수도 없이 읽었고, 두루마리를 펼쳐 놓은 채 나무 아래에서 나뭇가지로 검무(劍舞)를 추기도 했다.
그래서 대추나무도 당연히 <검의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의 글자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 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초목(草木)은 대지에 뿌리를 심고 이동에 제한이 있어,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사고능력이 없고 둔할 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영성(靈性)을 얻은 초목은 영지를 얻은 동물보다 더욱 총명했다.
계연조차 이 글자들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놀랐으니, 대추나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에 알고 있던 사물이라 그런지, 대추나무의 가지들은 다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무의 포용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글자들은 무척 소란스럽긴 했지만, 그간 계연의 교육이 헛된 것은 아니어서 전보다는 훨씬 얌전해져 있었다. 물론 그 ‘얌전함’의 기준은 상대적이어서, 만약 누군가 거안소각에 가까이 다가온다면 여전히 떠들썩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작은 글자들이 <검의첩>에서 하나씩 튀어 올랐다. 심지어 ‘잠을 자던’ 글자들도 다른 글자들에 의해 끌려 나와 흥분한 기색으로 곳곳을 돌아다녔다.
거안소각 안의 영기가 충만한 맑은 바람을 타고 백여 개의 글자들은 뜰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검의첩>은 처음 글이 쓰이던 때부터 이미 영성을 가진 채였지만, 이 글자들에게 있어 처음으로 의식이 생긴 이곳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집이었다.
이전에 이 글자들은 항상 ‘배고픈’ 상태였는데, 그 훔친 먹들을 먹은 것도 실은 헛된 낭비에 불과했다. 하지만 계연이 지난번에 다시 그들에게 먹을 칠해준 후, 글자들은 아직도 그 안에 담긴 힘을 소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글자들은 유달리 활동력이 충만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렴. 나는 물항아리를 채우러 나가볼 테니.”
계연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차를 끓이거나 밥을 짓는 것 정도는 직접 하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항아리에 물을 채워야 했다.
물론, 아무리 사람 냄새 나는 삶을 살고 싶어도 조금 전까지 실내에 쌓여있던 먼지는 너무 많았다. 그걸 혼자 청소하려면 최소 며칠에서 2주는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과감하게 술법을 부린 것이었다.
계연은 석판으로 덮인 우물을 바라보며 저 물을 길어다 쓸까 하다가, 그 우물 안에서 튀어나왔던 삿된 존재를 떠올리고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그는 물통이 달린 멜대를 지고서 물을 길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대문을 넘기 직전, 종이학을 불러 손짓했다. 종이학이 가볍게 날개를 파닥여 계연에게 다가오자, 계연이 왼손으로 멜대를 잡고서 오른손 검지를 뻗어 종이학의 머리 위에 가볍게 대었다. 그러자 법력과 더불어 계연의 생각이 천천히 전해졌다.
“옥회산에 가서 대신 말을 전하고 오거라. 석 달 안에 내가 방문할 테니 만약 그 전에 선유대회에 참여하러 떠날 예정이라면, 나를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주렴.”
이렇게 말하며 그의 생각을 전달하자 그것이 종이학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종이학은 곧바로 떠날 것처럼 힘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서두를 필요 없다, 내가 도와줄 테니!”
계연이 웃으며 종이학을 붙잡은 뒤, 손바닥 주위로 가벼운 회오리를 일으켰다. 바람은 점점 빠르게 돌더니 은은한 흰빛을 내뿜었다.
“가거라.”
계연이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휘익-!
손바닥만 한 범위 안에 광풍이 일자, 그 여파에 의해 대추나무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종이학은 그 바람을 타고 이미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후였다.
선유대회는 아직 몇 년이나 남았으니, 옥회산 수사들이 이렇게 일찍 떠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종이학을 보낸 것은 그저 미리 언질을 주고자 함이었다.
계연은 웃으며 다시 멜대를 지고 대문을 나섰다.
시각은 어느새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거안소각은 원래부터 외진 곳에 자리한 데다, 천우방을 오가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아 그는 가는 길에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천우방의 쌍정포 부근에 도착하자 그제야 조금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채소를 씻는 사람, 빨래를 하는 사람이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천우방에 사는 부인들이었는데, 대략 십여 명은 되어 보였다.
겨울이라 그들의 손은 모두 빨개진 채였지만, 동작은 조금도 굼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