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서신을 보내고 받다
계연이 멜대를 메고 나타나자 그들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마치 예전에 쌍정포에 물을 길으러 처음 왔던 순간 같았다.
“저 사람은 누구지?”
“서생인 것 같은데!”
“물을 길으러 온 걸 보니 같은 방(坊)에 사는 사람인가?”
“하지만 전에 본 적이 없는걸!”
젊은 아가씨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풍모가 비범한 계연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한편 나이가 조금 더 있는 부인 중에서 두세 사람이 눈썹을 약간 찡그린 채 계속 계연을 관찰했다.
“어이, 소동(小東) 엄마, 저 사람 얼굴이 낯익지 않아?”
옷 빨래를 하던 부인이 곁에 앉은 이웃에게 이렇게 묻자, 솜옷을 입은 아낙네가 침상에 까는 요를 빨다가 계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네, 준수하기도 하지. 우리 동네에 언제 저런 사람이…….”
그 부인은 돌연 말을 멈추고 우물가에 다가온 계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계연이 소매를 걷고 도르래를 이용해 물을 긷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뇌리에 한 장면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어어, 왜 얼굴이 빨개져? 세상에, 언제부터 저런 인물이 살고 있었지!”
그러자 ‘소동 엄마’라고 불린 여인이 고개를 탈탈 흔들고는 무언가 찔리는 기색으로 계속해서 빨래를 이어갔다. 옛날, 그녀가 한창 꽃다운 나이였을 때 이 쌍정포에서 저 선생이 물 긷는 것을 몇 번 본 게 떠올랐다.
천우방 백성들은 모두 순박했고, 특히나 혼인하지 않은 아가씨들은 집밖에 잘 나오지 않아 준수한 외모의 이성을 마주치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그랬기에 그 당시 거안소각의 계 선생님은 천우방 소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낭군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소녀들의 꿈은 현실에 깨어진 지 오래였다. 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고, 영안현 안에서 시집을 갔다 해도 같은 천우방 이웃에 시집간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이전에 자신이 젊었을 때도, 이곳 쌍정포에서 지금 저 아가씨들처럼 부인들 옆에서 집안일을 하며 친우들과 떠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아주머니들은 모두 나이 들었고, 자신이 그 부인들의 나이가 되어있었다.
대정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인이 60세 이상이 되면 모든 일선에서 물러났고, 70세를 넘기면 고령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진자주 같은 이는 그야말로 특별히 장수(長壽)한 경우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러저러한 옛일을 떠올리던 부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계연이 이미 두 번째 물통을 채우고 있었다.
“자네, 뭐라 말 좀 해봐. 왜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
곁에 앉은 부인이 어깨로 그녀를 툭 치자, 한창 옛일을 떠올리던 그녀가 번쩍 정신을 차리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 저분은, 그, 아무래도 거안소각에 사시는 계 선생님이신 것 같아. 아닐 수도 있지만…….”
“계 선생님? 그게 누군데?”
곁에 앉은 그녀의 이웃은 다른 곳에서 천우방으로 시집온 경우였다. 비록 그녀가 시집온 후에도 계연은 거안소각에 두 번쯤 돌아왔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니 이 20년간 계연은 영안현 사람들 눈에 그다지 띄지 않은 상태였다.
계연의 명성이 영안현에 널리 퍼졌을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몰랐다. 계연에 대한 소문은 한담을 나누는 백성들 사이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다더라’ 하는 식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겠는가?
그녀의 물음에 솜옷을 입은 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계연이 물을 다 긷고 멜대를 지고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킨 뒤, 물 묻은 손을 털어 옷에 닦았다.
“계 선생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 흰옷을 입은 서생을 의식하여 소곤소곤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는 계연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미 몇 걸음 뗀 계연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자, 물통이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물은 금방이라도 넘칠 듯 요동쳤지만, 이상하게도 단 한 방울도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계연은 양손으로 물통 위에 달린 밧줄을 꽉 쥐고 몸을 돌려 그 부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에 다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나갔다.
“정말 계 선생님이네! 아직도 저렇게 훤칠하시다니…….”
조금 전 계연의 인사 때문에 솜옷을 입은 부인의 얼굴은 다시 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곧 실소를 터뜨리며 얼음처럼 차가운 두 손을 뺨 위에 갖다 댔다.
“계 선생님이 누구신데 그래?”
“계 선생님은 우리 천우방 주민이셔. 정말 좋으신 분이지……. 가서 자네 남편이나 시부모님께 물어봐, 분명 알고 계실 테니…….”
쌍정포는 다시 시끌벅적한 소리로 뒤덮일 즈음은 계연이 이미 순조롭게 거안소각에 도착한 뒤였다.
“휴우, 보통 사람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나는 듯이 빠르구나…….”
그는 이렇게 탄식하며 길어온 물통 두 개를 기울여 물항아리를 가득 채웠다.
원래는 곧바로 한 번 더 물을 길으러 갈 예정이었던 계연은 일부러 반 시진 정도를 기다렸다가 갔다. 과연 이번에는 그 부인들이 모두 떠난 뒤였다.
이미 국수와 내장으로 배를 채워서, 계연은 따로 밥을 짓지 않고 솥에 찻물을 끓였다. 하지만 예전에 갖고 있던 찻잎에는 모두 곰팡이가 슬었기 때문에, 그냥 끓인 물을 마셨다.
점심시간이 지난 뒤, 계연은 집을 나서 영안현 관아로 향했다.
그간 집을 오래 비웠으니, 자신에게 보내온 서신이 잔뜩 쌓여있을 터였다.
관아가 자리한 거리는 거의 변한 곳 없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오래된 상점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영업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실랑이하는 소리며 판촉하는 소리 등이 들려왔다.
계연이 현학(*縣學: 현에서 운영하는 학당)을 지날 때는 아이들이 경전을 낭송하는 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들은 마침 윤재성의 <군조론-학동의 대답>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아주 훌륭한 계몽 서적이 되어있었다.
관아의 사무를 처리하는 곳 앞에 도착한 계연은 발걸음을 늦췄다. 관아의 관차는 일찍부터 흰옷을 입은 서생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연이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물었다.
“대인께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기에 보관 중인 제 서신을 찾으러 왔는데, 무슨 수속이 필요한가요?”
계연은 누가 봐도 학식을 갖춘 서생처럼 보였기 때문에, 관차는 무척 정중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호적(戶籍)이 적힌 문서를 보여주시면 제가 먼저 확인한 뒤에, 그걸 가지고 안에서 주부(*主簿: 관리 밑에서 문서를 관리하는 보좌관) 대인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아, 그건 항상 갖고 다니지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오른쪽 소매에서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위에는 영안현 지현의 관인(官印)과 전전임 주부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예전에 거안소각을 매입할 때 집문서와 함께 만든 호적이었다.
“예, 맞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왼쪽 복도의 ‘호(戶)’ 자가 걸린 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보관하고 있는 우편물은 전부 그곳에 기록되어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계연은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실은 일부러 찾을 필요도 없었다. 좌측 복도의 문이 활짝 열린 단 한 곳이 바로 그 ‘호(戶)’ 자가 걸린 방이었기 때문이다.
시기는 11월 하순이라 몇 주만 더 지나면 금세 섣달그믐이었기 때문에, 연말이 된 이때가 관아가 가장 바쁠 때였다. 계연이 문밖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보자, 안에 있던 사람이 쉬지 않고 붓을 놀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바쁘게 쓰더니 종이를 바꿔 다시 글을 썼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똑똑-!
계연은 문틀을 두드려 안에 있던 사람의 주의를 끈 뒤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말했다.
“주부 대인. 제 이름은 계연이라 하는데, 제 우편물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붓을 멈추더니 천천히 계연이 살펴본 다음, 마찬가지로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대답했다.
“들어오시지요!”
실내에 들어온 계연이 주부를 살펴보자, 그의 나이는 대략 서른 즈음으로 보였다. 그는 짧은 수염을 기르고 네모난 관(冠)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상태였는데, 그의 주위로 흐르는 기운이 그리 깨끗하지는 않았다.
“혹 호적 문서를 가져오셨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계연은 다시 한번 관인(官印)이 찍힌 문서를 주부에게 내밀었다. 그는 문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계연에게 돌려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편물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찾아야 해서요.”
대정국의 우역(*郵驛: 옛날, 공문서와 서신을 전달하던 역참)은 주로 서신만 처리하지만, 돈을 충분히 내면 작은 물건 정도는 같이 배송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주부도 그에게 서신 말고 다른 온 것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는 책꽂이에서 책자를 몇 권 꺼내더니 천우방의 기록이 적힌 책자를 열었다. 그러고는 한 장씩 넘기며 확인하다가 마침내 계연의 이름을 찾았다.
책자에 쓰인 이름 옆에는 대부분 무언가 표시되어 있었고, 계연의 이름 옆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몇 번이고 이어졌다.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 온 서신은 한곳에 모아놓기 때문에, 하나만 찾으면 전부를 찾을 수 있었다. 그저 나중에 이름 옆에 일일이 표시하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다.
계연에게 온 서신이 창고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부는 책상 위에서 가느다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더니 그 위에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
“후우…….”
그는 그 종이 위의 먹물을 조금 말린 뒤 계연에게 건넸다.
“이것을 가지고 저 안쪽으로 가셔서, 문밖에 있는 아역(*衙役: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에게 주시면 됩니다. 그럼 그자가 선생을 창고 안으로 모실 거예요. 조심하세요,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거든요.”
“예, 감사합니다.”
계연은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겨받았다. 방을 나선 뒤 고개를 돌려보니 주부는 다시 전처럼 책상 위에 고개를 파묻고 문서를 처리하고 있었다.
과연 윤재성을 낸 고장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전의 영안현 지현(*知縣: 현을 다스리는 장관)이 공정하고 청렴한 자여서 그런지, 올바르고 자부심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영안현의 크고 작은 관리들은 모두 자신이 맡은 직무를 다하고 있었다.
반 각이 지나, 계연은 창고 바깥에서 아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역은 안에서 한참을 뒤지다가 계연의 서신을 찾아냈다.
“아이고, 많기도 하군요!”
아역은 창고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하나로 묶인 서신 위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손바닥 너비만 한 두께의 서신 꾸러미를 보니 적게 잡아도 수십 통은 될 듯했다.
아역은 서신을 묶고 있던 가느다란 줄을 풀어낸 다음, 한 통씩 살피며 그 위에 적힌 것이 ‘계연’이라는 이름임을 확인한 후 그에게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군요. 여기 있습니다. 선생께 온 서신은 이게 전부고, 다른 물건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연은 서신 꾸러미를 받은 뒤, 아역이 창고 문을 잠그는 것을 기다렸다가 함께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