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09화 (409/892)

409화. 나이 든 주(朱)대인

방(坊)에는 각기 다른 심부름꾼들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신을 가지고 각 가정을 방문했다가,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경우에만 다시 관아로 가지고 왔다. 게다가 서신 봉투의 색깔이 약간 바랜 것을 보니 최소 몇 년은 쌓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서신을 전달하는 것은 관아의 심부름꾼들에게 무척 쏠쏠한 업무였다. 가족들의 편지는 금덩이와도 바꾸지 않는다(家書金不換)는 옛말처럼, 편지를 받는 이들은 하나같이 기뻐했다. 집안 형편이 너무 가난하지만 않다면, 그들은 고맙고 기쁜 마음에 심부름꾼들에게 동전 몇 푼을 쥐여주거나 먹을 것을 권해왔다. 이는 관아의 심부름꾼들이 암묵적으로 누리는 특혜였다.

“선생님, 쌓인 편지가 많은 걸 보니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었나 보죠?”

아역의 물음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 오랫동안 다른 지역을 떠돌았지요.”

두 사람은 그 이상 대화를 하지 않고, 계연 홀로 다시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계연은 문 앞에 서 있던 관아의 관차를 향해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는 계연을 보내고서 관아의 사무를 처리하는 내정(內廷) 입구에서 곁에 있던 동료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몸을 돌려보니,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건장한 노인이 서 있었다.

두 관차는 서둘러 그를 향해 예를 올리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주 대인을 뵙습니다!”

“음, 그래!”

그는 바로 예전 영안현의 현위(*縣尉: 현령의 보좌관)였던 주언욱이었다. 전임 현령이었던 진승이 승진하여 떠난 것과 달리, 주언욱은 현임 현령에게 그 덕행과 무예를 인정받아 훈련교관을 맡아 관차들의 훈련을 책임지고 있었다.

주언욱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바깥을 쳐다보더니 관차에게 이렇게 물었다.

“방금 나간 사람이 낯이 좀 익은데, 서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냐? 이름이 뭐지?”

“주(朱) 대인께 아룁니다. 서신을 찾으러 온 것이 맞사옵고, 이름은 ‘계연’이라 하였습니다. 계책 할 때 계, 인연 할 때 연이요. 그러고 보니 찾아간 서신이 엄청 많았어요. 다 오래되어 보였고요. 음……. 주 대인? 주 대인?”

관차는 주 대인의 얼굴이 넋이 나간 듯 멍한 것을 보고 그를 일깨우려 했다. 비록 주 대인은 나이가 많았지만, 정정한 것을 넘어 그 무공 실력은 영안현에서 아직도 첫손에 꼽히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노인들처럼 갑자기 치매나 노망이 온 것일 리는 없었다.

“주 대인……? 대인!”

“어어, 그래, 들었다. 너희는 여기서 하던 일 해라. 나는 먼저 가봐야겠다!”

주언욱은 온통 정신이 다른 데 팔린 듯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관아 밖으로 나갔다.

두 관차는 그를 향해 얼른 예를 올린 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연이라는 선생과 주 대인께서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

“그러게나 말이야…….”

주언욱은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몸놀림이 재빨랐다. 그는 호쾌하고 안정적인 걸음으로 성큼성큼 관아를 나서 거리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계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황망한 표정으로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계연……. 정말로 계 선생이셨어! 예전 그 모습 그대로야!”

이전에 계연이 영안현의 유명 인물이었을 때, 관아에서는 한가한 이들이 그의 나이를 추측해보곤 했었다. 그 우아한 거동과 문인처럼 고아한 풍모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를 40살 정도로 추측했지만, 그저 얼굴에 나이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다. 어쨌든 그를 젊은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소한 윤재성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여겼다.

오늘 계연의 모습을 다시 본 주언욱은 예전에 계연에 관해 떠돌던 소문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은 원래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다른 일들은 기억 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게 된다. 그리고 영안현에 계연과 관계가 깊은 이들은 원래부터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 이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무척 드물었다. 이제는 아예 그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계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이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주언욱처럼 말이다.

주언욱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한편 뒤쪽에 서서 관아 문을 지키던 두 관차들은 슬슬 가서 그에게 괜찮으시냐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다. 그 순간 주언욱은 무언가를 다짐한 얼굴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고, 남겨진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주언욱은 무인(武人)으로서 그 나이에도 여전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걸음도 무척 빨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집에 도착한 그는 집안 곳곳의 장롱과 상자를 전부 뒤졌다.

뒤이어 바깥에서 노부인이 들어와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영감, 뭘 찾소?”

주언욱은 뒤적거리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이렇게 물었다.

“내 그 귀한 벼루(寶硯) 못 봤소?”

“제비집(*寶燕: 벼루와 제비집의 발음이 같다)? 제비집은 아들 부부한테 끓여 먹으라고 줬는데!”

그러자 주언욱이 눈썹을 찌푸리며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비집은 무슨, 벼루 말이오. 벼루! 운수류묵연(雲水流墨硯)이라는 이름의 진 대인께서 선물로 주신 그것 말이오!”

그러자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무인이 그걸 쓸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서재에는 없었소?”

“아이고, 거기 있었으면 내가 여기 와서 그걸 찾았겠소?”

“그럼 아들내미한테 가서 물어보시구려!”

주언욱의 저택은 그리 작지 않아서, 각각 뜰이 갖춰진 건물이 두 채 있었다. 하지만 부리는 하인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부인의 말에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주언욱은 마침 제 아들이 관아에서 돌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주승(朱承)은 포쾌(捕快)의 관복을 입은 채 허리춤에 검을 찬 그대로 들어오다가, 그의 부친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너무 놀라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주승이 가슴을 두드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지금 농담을 할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내 벼루 어디 있느냐? 진씨 어르신께서 예전에 내게 선물로 주신 것 말이다.”

그러자 주승이 약간 찔리는 듯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아, 아버지께서 안 쓰시는 것 같아서……. 우추(雨秋)가 우리 집에 와서는 그 벼루를 보고 빌려달라고 몇 번이나 사정하길래, 그냥…….”

“이 못난 놈!”

주언욱이 호통을 내지르며 다시 순식간에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해시계가 미시(*未時: 오후 1시~3시)에서 신시(*申時: 오후 3시~5시)로 바뀌던 시각, 주언욱은 단목(檀木)으로 만든 상자 안에 다시 그 벼루를 담아, 좋은 찻잎 몇 덩이와 화조주 두 병, 묘외루에서 산 간식거리 몇 상자를 들고서 천우방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몇 사람에게 물어 겨우 거안소각을 찾아냈다.

예전에 영안현, 특히 천우방 주민들 사이에서는 거안소각이 흉가로 유명했었는데, 이제는 보아하니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없는 듯했다. 젊은 사람들은 거안소각을 ‘꽃도 안 피고 열매도 안 맺는 대추나무가 있는 폐가’로 알고 있었다.

거안소각에 점차 가까워질수록, 고희(*古稀: 70살)의 나이가 된 주언욱은 점차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대문이 살짝 열린 것을 보고 그는 앞으로 다가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대문 위에는 편액이 없었다.

“주 대인이시군요, 들어오세요!”

그때 계연의 온화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주언욱은 아직 문가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아 안쪽에서는 자신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곧 계연이 남다른 인물임을 기억해낸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주언욱은 마음을 진정시킨 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뜰 안에 놓인 돌 탁자 위에는 편액이 놓여 있었고, 계연은 그 앞에 서서 먹과 붓을 꺼내놓고 있었다.

계연이 주언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주 대인, 어서 와서 앉으세요. 편액이 너무 오래되어서 주칠(朱漆)이 거의 떨어졌지 뭡니까. 또 마침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도 있으니, 한번 써 보려고요.”

“아, 그러셨군요. 참, 계 선생님, 이왕 글을 쓰실 거라면 이 벼루를 사용해 보세요. 이건 ‘운수류묵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벼루인데, 영안현에서 일찍이 기술이 좋기로 유명한 장인이 만든 거랍니다.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건데, 진 현령께서 제게 선물로 주셨지요. 하지만 저 같은 무인이 쓰기에는 너무 귀한 것이라, 계 선생님께 드리고자 가져왔습니다. 아, 이것들도요. 전부 소소한 선물들입니다. 곧 섣달그믐이기도 하고, 손님으로 방문하는 입장에서 빈손으로 올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물건은 일단 그냥 내려놓으시고요. 벼루는 진 대인께서 선물로 준 것이니, 제가 받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듯하네요. 하지만 다른 선물은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아, 예예!”

주언욱은 약간 긴장이 되어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원래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려 했는데, 편액이 있는 걸 보고 일단은 탁자 곁에 내려놓았다. 계연이 천천히 먹을 갈자, 은은한 묵향(墨香)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가 비록 무인이긴 하지만, 그게 무척 좋은 먹이라는 것 정도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주언욱도 계연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방문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떤 일에 대해 더욱 또렷이 볼 수 있게 된다. 예전에 비해 지금의 주언욱이 가진 계연에 대한 감상은 조금 더 특별해진 상태였다. 계연이 천천히 먹을 가는 것을 보고 있던 그는 긴장되고 초조하던 마음이 점차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 대인, 제가 조금 전에 끓여놓은 물이 있는데, 갖고 오신 찻잎으로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계연은 먹물을 충분히 간 다음 주언욱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예, 좋고 말고요. 계 선생님께서는 유주의 봉첨차(峰尖茶)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 계주의 우전차(雨前茶)를 드시겠습니까? 모두 친우들에게 선물로 받은 귀한 차입니다.”

“우전차로 하지요. 안 마신 지 오래되었네요.”

“예!”

주언욱은 허리를 숙여 자신이 가져온 마대(*麻袋: 거친 삼실로 짠 자루) 안을 뒤져 대나무로 된 황색 단지를 꺼냈다. 뚜껑을 비틀어 열자 은은한 차향이 퍼져나갔다.

계연의 뛰어난 후각으로 짐작하건대, 이것은 무척 좋은 찻잎임이 분명했다. 예전에 위씨 집안에서 보내온 찻잎과 비교해도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죽통을 여는 주언욱의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것을 보고, 계연은 찬찬히 그를 살폈다. 그의 안색은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하니 건강해 보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피부에 검버섯이 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있던 강인한 주 현위의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계연은 주언욱에게서 죽통을 받아든 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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