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거안(居安)의 뜻
주언욱은 계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안소각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우물 위에는 석판이 덮여 있었고, 건물은 조금 낡아 칠이 벗겨진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깨끗해 보였다.
머리 위의 대추나무는 밖에서 볼 때마다 더욱 커 보였다. 나무는 마치 커다란 화개(*華蓋: 옛날, 어가(御駕) 위의 씌우던 일산(日傘))처럼 거안소각 뜰의 반 정도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겨울의 햇빛이 그 사이로 쏟아져 들어와, 그늘에 있는데도 따뜻하고 밝은 느낌이 들었다.
주언욱이 시선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거안소각의 편액을 살펴보니 정교하게 표구된 것은 아니었고, 편액의 각 변두리를 모양내어 깎은 정도였다. 하지만 목재는 꽤 좋은 것을 썼는지, 금이 가거나 벌레가 먹은 곳은 없었다. 그 위의 글자는 지워지거나 얼룩덜룩해져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선물로 벼루를 가져온 주언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계연이 갖다 놓은 문방사우(*文房四友: 종이, 붓, 먹, 벼루)로 향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종이는 없었으니, 사우(四友)가 아니라 삼우(三友)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먹은 분명 아주 상등급의 품질이었고, 도자기로 된 붓걸이 위에 걸린 붓도 무척 특이해 보였다. 그가 각도를 달리해서 바라보니, 햇빛이 그 위에 닿을 때 붓 위로 색다른 광택이 흘러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붓 한 자루 때문에 이렇게 놀라워해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벼루는 그저 보통의 검은 벼루였기 때문에, 자신이 가져온 벼루가 이보다는 좋은 듯했다. 아까는 계 선생님께서 그저 예의상 거절한 것일 수도 있으니, 주언욱은 가기 전에 한 번 더 받아달라고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계연이 주방에서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쟁반을 들고 나왔다.
“주 대인, 오래 기다리셨군요. 집에 와본 지도 오래되고 손님을 접대해본 지도 오래되어 제가 마땅한 예를 잊었습니다. 대인께서 오시자마자 찻물을 대접했어야 하는데요.”
그러자 주언욱이 다급히 일어서서 그를 도와 쟁반을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부 제가 연통도 없이 방문해서 그렇지요. 선생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차를 따른 후 주언욱은 찻물을 후후 불었고, 계연은 한쪽에 놔두고 식혔다.
주언욱도 실은 무슨 요청이 있어 온 것이 아니라, 계연이 돌아온 것을 보고 조금 친분을 쌓아볼까 하고 온 것이었다. 윤공(尹公)께서 예전에 거안소각에 그리 자주 드나들었던 것을 보면, 그때부터 윤공은 이미 계 선생님이 비범하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비록 윤공께서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주로 자신의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계 선생님께서 얼마간 도움을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언욱은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계 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막상 지금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차향을 음미하며 계연이 목판 위에 남은 주칠(朱漆)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감회에 젖은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께서 영안현에 돌아오지 않으신지 십여 년은 족히 넘으셨지요?”
계연은 작은 조개껍데기로 주칠을 벗겨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었네요.”
주언욱은 차를 한입 마시며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추나무 가지를 바라보다가 계연을 향해 말했다.
“눈 깜짝할 새에 제가 벌써 이리 늙어버렸네요. 계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그 당시의 풍채 그대로시고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인이야말로 진정 노익장이십니다. 옛날과 비교해도 풍채가 여전하시네요. 진 대인께서도 마찬가지시겠지요.”
진승과 주언욱 두 사람이야말로 수십 년간 영안현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큰 ‘영안현의 두 영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어느 날 갑자기 명성을 떨친 윤재성은 영향력으로만 따지자면 그들 다음일 것이다.
각각 문무를 담당하는 두 부모관(*父母官: 옛날, 지부(知府), 지현(知縣) 등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이 없었다면, 가난하고 척박했던 영안현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계연은 이 두 사람을 무척 흠모하고 있었고, 동시에 속으로는 만약 자신이 관리가 되었다고 해도 이들보다 잘해 내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언욱은 다시 차를 한입 마신 뒤 떠보듯 물었다.
“선생님께서 떠나신 후 이 대추나무에는 줄곧 꽃이 피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선생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나무에도 꽃이 피겠지요?”
비록 지금은 영안현 사람 중 많은 이들이 대추나무에 관해서 기억하지 못했지만, 예전에는 대추꽃이 피면 그 향기가 현성 전체에 널리 퍼지곤 했었다. 주언욱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무가 꽃을 피우든 안 피우든 그건 나무의 뜻에 달렸지요. 하지만 주 대인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제가 내년 꽃이 피는 시기까지 여기에 머문다면, 나무도 분명 꽃을 피우겠지요.”
“아, 하긴 그렇겠네요!”
계연은 이런 질문에도 건성으로 대답하지 않고, 묻는 것이 무엇이든 성의껏 대답해 주고 있었다. 곧 주언욱도 잠시 입을 다물고 때때로 차를 마시기만 했다. 하지만 찻잔을 쥔 주언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하는 걸 보니, 계연이 보기에는 그에게 무언가 망설일 만한 일이 있는 듯했다.
다시 일각이 지나고 주언욱이 차를 두 잔째 마셨을 때, 계연은 마침내 목판 위의 주칠을 깨끗이 벗겨낸 후였다. 그가 목판을 들어 탁자 아래로 가볍게 흔들자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앉은 쪽으로는 조금도 날아들지 않았다.
계연은 목판을 다시 탁자 위로 올려놓고서 다시 가볍게 붓을 쥐었다. 그러자 주언욱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온통 정신이 쏠렸다.
소매를 접어 붓끝에 먹물을 흠뻑 적시는 동작에는 일종의 특별한 운치가 있었다. 원체 조용한 거안소각이지만, 주언욱은 너무나 집중하여 바라보는 탓에 주변의 소리를 조금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글을 쓰다 보면 마음이 고요해지는데, 글 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그런 느낌이 들지요. 그러니 자세히 감상하시고, 다 쓴 후에 대인의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계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계연은 먹물을 묻힌 늑대 털 붓을 목판 위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떨어뜨렸다.
붓끝이 닿자마자 실제로 붓이 닿는 부분보다 먹물이 더 크게 번져나갔다. 하지만 계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 천천히 글을 써나갔다. 그의 필획에는 웅건하고 우아한 멋이 있었다.
주언욱은 계연이 글씨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신기한 점을 발견해냈다. 계연이 쓰는 늑대 털 붓은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였는데, 실제 남겨진 필획은 최소 두 손가락을 합친 정도의 두께였다. 그런 두께에도 꺾어지고 들어가야 할 곳은 모두 제대로 표현되어 서법(書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
한참 후, 계연은 마지막 획을 긋고 붓을 붓걸이에 걸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액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으며 주언욱에게 말했다.
“대인의 감정(鑑定)을 부탁드립니다!”
“예.”
주언욱은 여전히 조금 전의 놀라움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계연의 말에 얼떨떨한 채로 대답한 후, 편액에 시선을 계속 고정한 채로 계연에게 다가왔다.
‘거안소각’ 네 글자는 너무 딱딱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고, 한 줄기 맑은 기운이 그 표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정신을 편안하게 했다.
특히 ‘거안(*居安: 편안히 머무르다)’ 두 글자가 주언욱의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혀, 그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쌓이기만 했던 피로가 단번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정말 잘 쓴 글입니다. 대단한 솜씨이십니다, 선생님!”
주언욱도 글을 알고 쓸 줄도 알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문인들처럼 듣기 거창한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는 이토록 보기 좋고 운치 있는 글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조금 더 보세요.”
계연은 이렇게 대답하며 식혀두었던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추운 겨울에 밖에 한참 놔뒀는데도 찻물은 여전히 그가 마시기 딱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울 오후의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아, 거안소각의 대추나무 아래는 무척 상쾌하게 느껴졌다. 주언욱은 호흡하는 매 순간마저 청량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어느새 오랜 시간이 흐르고,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서 있는 주언욱에게 다가갔다.
“주 대인, 주 대인! 일어나세요!”
주언욱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아, 정말 대단한 솜씨이십니다!”
“예, 과찬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더 늦으면 영부인(令夫人)과 자녀분들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주언욱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미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게다가 담벼락에 가로막히긴 했지만,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이게 무슨, 어찌 이리 시간이 빠르게 갔지…….”
주언욱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계연을 향해 물었다.
“계 선생님, 이 글자……?”
“하하, 너무 복잡한 일은 생각하지 마세요. 집에 따로 접대할 만한 게 없어, 식사 대접도 못 하겠네요.”
그러자 주언욱도 더 묻지 않고, 계연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인사했다.
“예, 알겠습니다. 혼자 나가도 되니 선생님께서는 그냥 앉아 계세요. 그리고 제가 가져온 벼루는…….”
“그건 다시 가져가셔도 돼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언욱은 재차 권했다가 계 선생의 노여움을 살까 봐, 벼루가 든 상자를 다시 집어 들고 계연과 함께 문으로 향했다.
“배웅 나오지 마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주 대인.”
“예!”
주언욱은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후, 무의식적으로 대문 위쪽을 한번 흘끔 바라본 후 떠나갔다. 조금 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건 확실했다.
어찌 됐든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절대 헛걸음이 아니었다!
* * *
주승은 부친이 화를 내고 나간 일 때문에, 자신이 혹여 아버지의 대업을 망친 것일까 봐 근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주언욱은 무척 기분이 좋고 정신마저 상쾌해 보였다. 말을 하는 어조도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한편 거안소각에서는 주언욱을 배웅하고 돌아온 계연이 대문을 닫자마자 소곤소곤하던 대화 소리가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휴우……. 드디어 갔네!”
“그러니까 말이야. 이렇게나 오래 남의 집에서 미적대다니!”
“벌써 해가 다 지려고 하잖아!”
“흥, 초대도 없이 찾아온 늙은이!”
“아이고,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나도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나만큼은 아니겠지!”
“무슨, 내가 너보다 더 답답했다고!”
“저 사람이 무슨 간식을 갖고 왔댔지?”
“묘외루 거래.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그거.”
“아아, 세심하게 신경 쓴 모양이군!”
“관아의 관리라잖아.”
“화조주, 화조주도 있어!”
“화조주가 뭐라고, 어르신이 가진 천두호에 담긴 술보다 좋겠어?”
…….